2026. 08. 20.
물론 시선과 교환이 일치하는 관계는 환상일 뿐이며, 그 완벽한 일치의 환상 속에서도 이미 분열된 내가 교환하는 나를 보고 있다. 혹은 교환은 그 행위 자체의 요건으로서 모종의 대타자적 시선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 대타자적 시선이 없는 교환의 완벽한 자율성(일치)은 그것 자체가 규제 없는 규제이념일 뿐으로, 필시 그 자율성이란 오히려 공중부양하는 정신병적 자아의 상태에 버금가겠고, 마치 우리가 삶의 현장 속에서 진공을 느낄 수 없듯이 그 실체의 체감은 불가능할 것이다. 실제로 외부적 시선을 내재화/자기화해서 부지불식간에 교환의 규제적 원칙으로 삼는 일은 사회화의 과정 일반에 극히 흔하다. 예컨대 ‘양심’이라고 불리는 현상은 교환의 실제를 간섭하고 규제하는 내재화한 시선의 응결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로티처럼 ‘양심에서 조심으로(from conscience to prudence)’ 돌아가려는 태도는 곧 시선을 오직 상호영향의 교환 속에서 실천적으로 재구성하려는 것이다.
김영민 지음, <동무론: 인문연대의 미래형식>(최측의 농간, 신판 1쇄 발행 2018. 11. 15.), 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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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사람들은 “양심”을 걸고 말한다.
그런데 그럴 때도 정말 조심하고 신중해야 한다.
그렇게 말하는 이의 진정성이야 의심하지 않는다 해도,
“양심을 거는 행위”가 이미 자기기만과 자기도취의 산물일 수 있기 때문이다.
로티에게 ‘양심’이란 것은 어떤 초월적·준신적(準神的) 목소리가 아니라,
우리가 속한 특정 역사적·사회적 공동체가 내면화시킨 것일 뿐이다.
역사적 사회적 공동체가 내면화시킨 것도 이미 유한성을 지니는 상대 개념일 뿐인데,
이것이 한 개인에게서는 더더욱 사적인 것으로 축소될 수 있다.
그래서 양심을 거는 것보다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상대와 맞추어가며 늘 조심하면서 신중하게 응하는 태도일 것이다.
도덕적 진보란 초월적 도덕법칙을 더 잘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라고 부를 수 있는 공동체의 범위를 낯선 타자에게로
계속 넓혀가는 감성 교육(sentimental education)의 문제인 것이다.
- 향린 목회 655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