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08. 06.
저는 정치적 이상이 지금까지 실현되지 못한 이유가 지나친 불관용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의견에 조금이라도 반대하거나 동조하지 않는 사람에게 정치적 이상을 말하는 사람들이 가하는 격렬한 단죄. 그런 태도야말로 ‘살기 편한 사회’의 실현을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인간의 나약함, 어리석음, 사악함을 그냥 내버려두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런 성질은 처벌과 억압의 대상이 아니라 교화와 치유의 대상이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처벌보다 포용이 폭력성과 공격성을 억제하는 데 더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선량하고 현명해야만 제대로 굴러가는 사회라면, 그 사회는 제도 설계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일정 수의 ‘어른’이 존재하고 그들이 자기 멋대로 구는 ‘아이들’의 행동을 대신 수습해 주는 것. 그것이 ‘보통’의 인간 사회입니다. 한쪽에서는 자기 지갑을 열고, 다른 쪽에서는 거기에 기대는 것.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들이 ‘악인’이라서 기대는 게 아닙니다. 노인이든 권력자든 갑부든, 모두가 이기적으로만 행동하면 공동체는 유지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일 수 있습니다. 그런 유아성은 처벌이 아니라 교화와 치유를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자기 지갑을 여는 사람’은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는가?”라고 날카롭게 반문할 분도 계시겠지요. 그렇습니다. 그런 ‘어른’을 제도적으로 확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사람을 억지로 ‘어른’으로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그저 ‘어른’이 기꺼이, 즐겁게 ‘자기 지갑을 여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 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어라, 재밌어 보이네”라고 느끼는 ‘아이들’ 가운데서 다음 ‘어른’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요.
우치다 다쓰루 지음/박동섭 옮김, <커먼즈의 재생: 공공, 환대, 관용은 어떻게 회복되는가?>(도서출판 유유, 2026. 2. 14. 초판 1쇄 발행), 9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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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학의 발전, 눈부신 문명이 우리 인류를 어른으로 만들었는가라고 묻는다면,
긍정적인 대답을 하기 어려울 것 같다.
지금 전 세계는 갈수록 비관용적 사회가 되어가고 있고,
미국이 앞장서서 그렇게 하고,
유럽 여러 나라도 그 뒤를 따른다.
선진국이라 불린 나라들이 죄다 빠르게 퇴화 과정을 밟고 있다.
조금 더 부드럽고 온화하며 넉넉한 마음으로 배려하는 이들이 늘어가야 하는데,
다쓰루 선생의 말대로 ‘어른’을 제도적으로 확보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이미 어른이 된 사람이 아이들이 기꺼이 본받고 싶어질 때까지
더 어른스럽고 매력적이도록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함께 아파하는 눈물 속에서 <자본론>이 탄생했듯,
오늘날 기후 위기와 전쟁, 급격한 빈부 격차로 고통 속에서 헤매는 이들을 향해
우리 모두가 어떤 마음을 지니느냐에 따라 인류의 미래가 결정될 것이다.
- 향린 목회 641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