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08. 13.
나에게 무엇보다 중요했고 중요한 것은 종교의 어두운 본질을 이성의 횃불로 밝혀 주어 인간으로 하여금 마침내 지금까지 그리고 오늘날에도 종교의 몽매성을 인간의 억압에 사용하고 있는 저 모든 인간에 적대적인 세력의 먹이나 노리갯감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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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는 미지의 종교, 종교의 어두움이 정치와 도덕의 최고원리였다면 이제부터는 또는 언젠가는 적어도 그 내막이 알려지고 인간 속으로 용해된 종교가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 바로 이러한 목적, 다시 말하면 인간의 자유, 독자활동, 사랑과 행복을 촉진시킬 수 있는 종교의 인식이 또한 나의 종교사적인 저술의 범위를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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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강의와 저술의 목적은 다같이 인간을 신학자가 아닌 인간학자로 만들고, 신을 사랑하는 자에서 인간을 사랑하는 자로 만들고, 내세의 수험생에서 현세의 학생으로 만들고, 천상적이고 지상적인 군주제와 귀족제의 종교적 정치적 하인에서 자유롭고 자신감에 찬 지상의 시민을 만드는 것이다. 나의 목적은 그러므로 부정하거나 거부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긍정하려는 데 있다. 다시 말하면 나는 긍정하기 위해서 부정하는 것이다. 나는 인간의 참된 본질을 긍정하기 위해서 신학과 종교의 환상적이고 가상적인 본질을 거부할 뿐이다.
오늘날 부정적이라는 말처럼 잘못 통용되고 있는 말도 없다. 내가 인식과 과학의 영역에서 어떤 것을 부정하려면 나는 그에 대한 충분한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근거는 가르침을 주고 맑음을 유지하며 내가 인식하도록 해준다. 모든 과학적인 부정은 그러므로 긍정적인 정신활동이다. 내 이론의 결론은 물론 신이 없다는 것, 다시 말하면 마음대로 세계와 인류의 운명을 결정하는 추상적이고, 비감성적이며 자연 및 인간과 분리되는 본질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은 신의 본질에 대한 인식에서 나오는 결론일 뿐이다. 다시 말하면 신의 본질이 한편으로 자연의 본질을, 다른 한편으로 인간의 본질을 표현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인식에서 나온 결론이다.
사람들은 물론 이러한 이론을 세계의 모든 것이 그 별칭을 갖고 있기 때문에 무신론이라 부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이름은 그와 정반대되는 이름인 유신론처럼 아무것도 말해주지 못한다. 테오스(Theos) 또는 신은 모든 가능한 것을 포함하는 하나의 단순한 이름에 불과하다. 그 내용은 시대나 인간처럼 다양하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신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느냐이다. ~~
이처럼 시대가 변하고 시대와 더불어 인간의 신들도 변한다. 그러므로 “신은 있다”, “나는 신을 믿는다”는 말은 “신은 없다”,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는 말과 같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 문제가 되는 것은 유신론의 내용, 근거, 정신인 것처럼 무신론에서도 내용, 근거, 정신이 문제가 된다.
루트비히 포이어바흐/강대석 옮김, <종교의 본질에 대하여>(2006. 5. 20.), 6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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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와 전통으로 이어져 온 현실종교의 교주들은
대개 초반에 자기를 따르는 이들에게 해방과 자유를 주었다.
그러나 이후 종교의 역사는 반대로 억압과 무지와 몽매함을 강화시키기도 했다.
신의 이름으로 포장된 종교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들춰낸 포이어바흐가 말하는 대로
오늘날 유신론 무신론 논쟁이나 신 존재 증명과 같은 것은 이제 쓸데없는 짓들이다.
문제는 신을 말하거나 말하지 않을 때
무엇을 내용으로 하고 근거로 내세우며 어떤 정신으로 채우는가이다.
특히 포이어바흐가 말한 대로
“마음대로 세계와 인류의 운명을 결정하는 추상적이고,
비감성적이며 자연 및 인간과 분리되는 본질”로서의 신은
오늘날 전혀 용인될 수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남는가?
아니 무엇을 남길 것인가?
- 향린 목회 648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