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07. 28.
신비주의가 ‘경험’의 차원이라면 관상은 ‘마음의 태도’의 차원인데, 둘 다 필연적으로 인간의 언어를 넘어서기에 침묵 속에서 가장 온전하게 표현된다.
신비주의는 무언가를 불러일으키는 환기의 성격을 지니기에, 우리를 담론적 사유와 인식의 차원 너머로 이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신과 하나 되는 황홀한 경험을 짧게나마 맛보게 되는데, 그 순간은 찰나일지라도 삶을 통째로 바꾸어 놓는다. 마찬가지로 관상은 깊은 내면의 자각과 세계를 향한 성찰적 주의를 키우는 실천을 통해, 우리가 신의 현존 안에 온전히 머물도록 붙들어 준다. 이 두 영적 경험은 서로를 빚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함께 풍요로워지는 여정 안에서 조화롭게 공존한다.
신비주의와 관상에 대한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나는 신비적 침묵을 ‘일상의 지평을 넘어서는 초월적 경험으로 이끄는 침묵’으로, 관상적 침묵을 ‘신 및 타자와의 관계를 깊게 하는 침묵’으로 정의한다. 신비적 침묵과 관상적 침묵은 강제적 침묵, 즉 강요되고 억눌린 침묵, 방치되거나 순응적인 침묵, 혹은 회피하는 침묵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강제적 침묵이 관계로부터 인간을 고립시킨다면, 신비적·관상적 침묵은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을 듣고 보게 함으로써 우리를 모든 존재의 근원과 이어준다. 강제적 침묵이 목소리를 빼앗고 억누른다면, 신비적·관상적 침묵은 지배 권력이 설계한 언어의 강압적 요구로부터 거리를 두게 함으로써 오히려 억눌린 목소리를 되살린다. 강제적 침묵이 자아를 파괴하고 존재를 지운다면, 신비적·관상적 침묵은 스스로를 발견하고 돌아보며 탐구하고 변화하도록 돕는다. 궁극적으로 신비적·관상적 침묵은 사랑에 기반한 사귐 속에 계시며 그 존재 자체가 곧 관계성인 삼위일체 하느님을 향해 우리 삶의 방향을 돌려놓는다.
조민아 지음/이은진 옮김, <침묵하는 신과 침묵당하는 사람들>(비아토르, 2026. 06. 15. 초판 1쇄 발행), 7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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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를 파괴하고 존재를 지우는 침묵에서
스스로를 발견하고 돌아보며 탐구하고 변화하도록 돕는 침묵으로 나아가야 한다.
기독교 전통의 신비적 침묵, 관상적 침묵이 도움을 줄 수 있다.
통성기도와 묵상기도, 향심기도와 관상기도 전통에서 배울 수 있다.
침묵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침묵 속에서 듣는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내신다.
언어를 넘어서는 존재의 근원에 다다르려면
침묵할 줄 알아야 한다.
- 향린 목회 632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