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07. 23.
(니체에 따르면) 인간은 스스로의 생물학적 자기한계 속에서 진리들을 내재화, 상징화, 유연화하면서 패턴화한다. 인간의 사회적 존재를 건사하는 진리들은 우선 ‘안전’해야 하는 것이다. 오이디푸스의 실명(失明)을 초래할 정도로 위험한 진리들은 거세된다. 예를 들어, 십자가 위에서 비참하게 거세될 수밖에 없었던 예수의 혁명은 당대의 정치종교적 체계를 근본에서 뒤흔들 정도로 위험한 진리의 힘이었지만, ‘사회적 구성물로서의 교회’(시몬 베유)와 그 제도적 역사는 그 힘을 조직적으로 거세하고 교리적 내재화(indoctrination)를 통해 ‘안전’하게 만들었다. “종교는 기본적으로 진리 추구가 아니라 거의 전적으로 안전 추구다.”(J. S. 스퐁 주교)
색은행괴(索隱行怪)로 공부할 수는 없고, 아이러니만으로 성립하는 체계는 없으며, 변이(變異)만으로 진화하는 생물은 없다. 마찬가지로 (정신분석자로서의) 니체가 줄기차게 비판하는 것처럼, 실재로서의 진리는 결코 생물의 자기보호에 이롭지 않다. 말하자면, 문화상징적 체계의 너머로부터 침입하는 진리들은 곧 초인의 몫인 셈이다. 그러나 인문학은 초인의 변설을, 폭력적인 실재를 논급하기에 앞서 실재를 체계적으로 회피하고 억압함으로써 이루어가는 세속의 이치들과 그 패턴에 주목한다. 이 패턴을 교직하는 일리들을 탐색하는 것은 가장 고유한 의미의 인문학이며, 이 같은 인문학의 근본적인 보수성을 넘어서려는 다양한 변형 속에서 인문학은 인문학 이상의 인문학으로서 내내 자기갱신을 계속한다.
김영민 지음, <세속의 어긋남과 어긋냄의 인문학>(글항아리, 2011. 2. 14. 초판발행), 2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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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이나 인문학이나 생존의 안전 체계를 넘어서긴 어렵다.
그렇다고 한없이 고리타분하게 안전지대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안전만을 추구하는 인문학과 신학은 생기를 잃고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다르지 못한다 하더라도 언제나 진리에로의 도전과 모험이 있어야 한다.
그 길이 험하더라도, 때로 지치더라도 잠시 쉬었다 다시 일어나 계속 걸어야 한다.
- 향린 목회 627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