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07. 15.
아침 식사가 끝나고 얼마 후에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조부는 날더러 소를 끌라고 한다.
조부와 머슴과 나는 소를 몰고 뒷산 밭으로 갔다. 머슴은 소에 쟁기를 달고 밭을 갈기 시작한다. 조부는 밭 가장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말없이 담뱃대를 빨고 있다. 나는 이럴 때만큼 조부가 바보처럼 보인 적이 없었다. 참을 수 없어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밭 갈아 봐도 소용이 없지 않아요. 농사 지어봤자 또 가져갈 건데 뭐.” 조부는 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말했다. “그렇구나, 네 말이 맞다.” 잠시 한숨을 쉰 후에 조부는 산골짜기를 보랏빛으로 물들이고 있는 여기저기의 진달래를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너는 어른이 되어도 모를 거다. 아니 모르는 게 나아. 봄이 되면 가랑비가 온다. 그러면 농군들은 말이다. 들이나 산의 밭을 갈아서 어김없이 씨를 뿌리지. 무슨 일이 있어도 씨를 뿌리는 거지.” 국민학교 2학년인 나는 무슨 뜻인지 통 알 수가 없어 조부가 더 상세하게 말해주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뿐 조부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나는 영원히 조부한테서 그 뜻을 듣지 못하고 말았다.
이우환 지음/서인태 옮김, <시간의 여울>(디자인하우스, 1994. 9. 27. 1판 2쇄 펴낸날), 2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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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전, 일제시대 이야기다.
저자의 아버지는 독립 운동을 했고,
한국인 순사가 매번 찾아와 깽판을 놓으며 아버지를 내놓으라며
집에 있는 가재도구들을 망가트리고, 곡식을 빼앗아 가던 시절이다.
농사지어 다 털리고 말던 그 시절,
손자인 저자가 할아버지에게 농사지어 무슨 소용이냐고 투덜댄 것이다.
다 털려도, 내가 지은 것 남이 먹어도,
기후가 좋지 않고, 날씨가 맞지 않아도,
농군은 언제나 씨를 뿌린다.
그렇지. 봄이 되면 농군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씨를 뿌리는 거지.
- 향린 목회 619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