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안녕하세요. 오늘은 성탄절 전날입니다. 저는 어릴 적부터 교회를 다녔는데, 성탄절 전이 되면 떠오르는 장면이 몇 가지 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줄곧 예수님 탄생에 대한 연극을 목자부터 시작해서 동방박사 등 여러 분야에 걸쳐서 했었습니다. 그 중에 기억나는 것은 제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주인공을 맡았는데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알리는 어린이 천사역이었습니다. 연극에 충실하고자 입술을 엄마몰래 빨갛게 입술을 바르고 양 갈래로 머리를 묶고, 제 몸보다 큰 흰색의 블라우스를 입고 연극에 나갔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고3때 마리아 역을 맡아서 그토록 어렵다는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을 표현하고자 애썼던 기억이 납니다. 그와 함께 지금은 사라져가는 새벽송을 돌면서 초대해 주신 교우들의 집을 방문하여 맛난 음식을 먹고 밤을 세워가며 친구들과 이야기하던 기억이 납니다. 여러분에게는 어떤 기억으로 성탄이 자리 잡고 있으신지요.

 

[성탄절 유래]

 

이런 저런 문화를 갖고 있는 성탄절, 크리스마스는 라틴어 그리스도를 뜻하는 Christus미사를 뜻하는 massa의 합성어로, '그리스도 모임'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모임'을 뜻합니다. 우리가 지키는 1225일은 기원 전 부터 로마, 이집트 등 이교도 지역에서는 태양 숭배 및 관련 신화에 따라 '무적의 태양신' 축일로 기념하고 있었습니다. 1년 중에 해가 가장 짧아지는 동지(冬至)에 즈음하여 그 이후부터는 해가 조금씩 길어지기 때문에, 어둠이 물러나고 빛이 세력을 얻어 만물이 소생해 나갈 수 있음을 기념하기 위해서 1225일을 지정하여 지켜왔던 것입니다. 성탄은 313년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국교화로 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보며, 역법에 의한 날짜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기독교 교파들은 1225일부터 17일 사이에 성탄절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관계를 통해 정해진 성탄을 맞이하면서 오늘은 루가의 예수 탄생이야기를 통해 오늘의 성탄의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그간 알고 있었던 말구유에서 태어난 예수를 경배하기 위해 별을 보고 직접 찾아온 동박방사들, 천사들의 안내로 양을 지키던 목자들이 찾아오는 이야기는 마태오와 루가의 탄생이야기가 섞인 것입니다. 본래 마리아의 수태고지, 요셉과 마리아가 호구조사로 인해 베들레헴에 가게 되는 이야기, 말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 천사들의 안내로 목자들이 찾아오는 장면은 마태오복음서에는 없는 루가복음서의 독특한 예수탄생이야기입니다.

 

[루가의 저항운동]

 

그렇다면 루가가 전하고자 한 예수 탄생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루가가 쓰여진 배경은 이렇습니다. 유다전쟁으로 인해 팔레스틴은 사실상 초토화되었기 때문에 글자 그대로 가난한 땅이 되었습니다. 수없이 많은 유다인들은 전쟁으로 인해 모든 재산을 잃었고, 로마제국은 반로마전쟁을 일으켰던 유다인에 대한 근본적인 응징으로 팔레스틴에서 유다인을 추방하는 정책을 폈습니다. 집과 고향을 잃고 이방에서 거지가 되어 배회하는 수많은 군중이 생겼습니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친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무리가 되었기에 가난은 더더욱 실존적인 문제로 중요성이 가중되었습니다. 루가시대에는 가난문제와 함께 사회적 조건들의 몇 가지 특징들이 더해지는데, 유다 그리스도인들이 헬레니즘 영역에 이주함으로써 예수전통에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헬레니즘 영역에는 금욕주의를 표방하는 이들에 의해 가난 자체를 찬양하는 풍조가 있었는가 하면, 가진 이는 가진 사람대로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대로 살아가는데 있어, 가난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느끼지 않는 풍조가 지배적이었습니다. 이것은 팔레스틴 전통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보니 루가공동체는 헬레니즘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살아왔던 이방 그리스도인들 중 부유한 이들에게 가난한 사람에게 자신의 소유를 나눔에 있어 민감하게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로마제국으로부터 박해를 많이 받았는데, 주로 황제숭배 거부가 표면적 원인이었습니다. 이 박해는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소유를 박탈하면서 새로운 가난한 이들이 생기게 했습니다. 주후1세기 중엽 예루살렘 근방에서 끊이지 않고 일어난 반란, 혹은 저항운동은 루가의 이야기에 나오는 예언자적 인물(요한과 안나)들과 관련된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저항운동은 외세로부터의 해방을 넘어 부채로 인한 노예살이에서의 해방, 즉 사회경제적 해방으로까지 확대한 운동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루가복음서는 가난한자,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자, 여성 그리고 이방인들에 대한 놀라운 관심을 보입니다. 이런 배경을 갖고 있는 루가는 오늘의 예수탄생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루가의 예수 탄생 이야기]

 

요셉은 다윗가문의 자손으로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자기 약혼자인 마리아와 함께 호적 등록을 하러갑니다. 로마 황제의 호적등록 명령은 단순히 그리스도론적 의미의 장소이동을 위한 것 이상이었습니다. 로마의 조공 요구는 농민들에게 심각한 경제적 압박을 느끼게 하는 결정적 요인이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고향 땅을 떠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의 마리아와 요셉은 그렇게 뿌리를 잃어버린 수천 명의 사람들을 대표합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강제 귀향을 명령합니다. 이유는 조세 징수의 대상에서 누락되지 못하게 등록을 하라는 것입니다. 로마 황제가 만든 평화 아래서 대다수 민중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아우구스토의 호적령에 얽힌 역사성입니다. 가이사 아우구스토가 전 제국 걸쳐 호적령을 내린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집트를 정복한 후에 인구조사를 실시한 적은 있었습니다.(주전 10-9) 그리고 시리아의 퀴리오에 의해 인구조사가 더 실시됐습니다. 아우구스토의 통치는 주전 42-30년에서 주후 14년까지, 시리아의 총독 퀴리노의 통치는 주후 6년부터이고 유대의 인구조사는 주후 6-7년에 조사 실시되었습니다. 요한의 탄생 예고가 헤롯때였고 그 후 6개월 후에 마리아는 잉태했기 때문에 결국 예수의 탄생은 요한 탄생예고 후에 16개월 정도 지난 때입니다. 그런데 헤롯은 주전 4년에 죽었습니다. 결국 예수 탄생은 주전3년을 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퀴리노의 인구조사는 주후 6-7년에 있었으니까 여기에서 예수의 출생년도가 맞지 않습니다. 즉 예수 탄생은 퀴리노의 인구조사보다 10년 전이 되는 것이다.

왜 루가는 헤롯, 아우구스토, 퀴리노의 연대가 시간적 간격이 있음에도 세례요한과 예수의 탄생을 당시의 통치자들의 이름과 함께 한 시대의 현재 사건처럼 연결하고 있을까요?

 

이런 역사의 현재성을 통해 권력자와 예수의 구유에서의 나심을 배치하여 새로이 나타난 메시아가 누구인지를 더욱 짙게 규명해 주고자 하는 뜻이 숨어있습니다. 로마제국이 말하는 평화의 길과 예수그리스도의 평화의 길이 서로 적대적인 역학관계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또 하나 주목하게 하는 점은 목자의 출현입니다. 목자는 메시아가 어떤 분이실지를 가리키는 표지입니다. 예수의 조상 다윗은 베들레헴 출신의 목동이었으며 하느님께로부터 당신 백성을 돌보도록 간택되었습니다. 천대받는 사람들의 범주에 속하던 목자들에게 메시아 탄생의 좋은 소식이 전달되었습니다. 새로운 구원자의 탄생 시기가 마침 로마제국의 구원자가 조세 칙령을 반포했을 때라는 사실이 의미심장합니다. 갓난아기가 가축의 먹이를 담아 놓는 여물통에 누워 있다는 사실은, 사회적으로 그 메시아를 비천한 목자의 수준에 가져다 놓습니다.

 

[해방하는 성탄]

 

리차드 호슬리는 예수탄생 이야기를 해방의 이야기라고 말합니다. 즉 아기 그리스도가 탄생했다는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이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해방으로, 하느님께서 폭압적인 왕의 지배와 착취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일을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예수탄생 이야기는 미완의 역사적 가능성이 가장 많은 이야기라고도 합니다. 왜냐하면 아직 가능성으로 남아있는 해방에 대해 말하고 그 해방을 기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잠정적으로 하늘의 보좌를 차지하게 되는 이야기, 그 이야기는 지금 자신들을 위한 이야기라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이들은 그 이야기에 나오는 것과 비슷한 삶의 정황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의 지배자들에 의해 지배와 착취를 당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경험과 처지를 성서이야기가 반영해 주고 있다고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서구문명 사회는 성탄 이야기 가운데서 억눌림과 고난의 이야기는 빼고 자기들에게 편안한 내용들을 취사선택하여 지금은 선물이나 주고받는 소비의 축제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산타클로스의 등장은 어떤가요? 산타클로스는 원래 오늘날의 터키에 해당하는 지역의 주교였던 성 니콜라우스라는 실존 인물과 관련된 유럽의 설화입니다. 그는 남몰래 많은 선행을 했는데, 그가 죽은 후 그의 이야기는 유럽으로 전해졌습니다. 12세기 초 프랑스의 수녀들이 니콜라우스의 축일(126)의 하루 전날인 125일에 성 니콜라우스의 선행을 기념해 가난한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기 시작했고, 그 풍습이 유럽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던 것이지요. 17세기쯤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이주한 네덜란드 사람들이 자선을 베푸는 사람을 성 니콜라우스라는 이름 대신 산테 클라스라고 부르게 되었고 이후 산타클로스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현대에 와서는 본뜻과 다르게 백화점을 비롯해서 각종 행사장에서 예수보다 더 주인공 같은 산타소비문화로 변질되어 가고 있는 것이 참 안타깝습니다.

 

[깨어있기]

 

깨어있는 사람들은 이런 사회의 흐름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극소수가 지닌 의식의 통제력과 통제 수단에 대해서 말이지요. 이유는 우리는 의식하지 못한 채 그 통제의 영향력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인간이 지구라는 낙원 위에 만들어 온 인류문명은 점점 물질주의적 감옥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극소수의 부와 권력이 거대해지고 그들의 통제력이 커지면서 동시에 그 통제력이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한 장치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큰 손이 시장을 지배하고, 언론을 통제하는 시대입니다. 그간의 이명박 박근혜 정권이 있는 동안 언론을 움직이지 못하게 막아온 것들을 생각하면 그 통제력의 힘이 얼마나 막강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한국의 자살률이 왜 높을까요? 지난주 아이돌그룹 샤이니의 종현씨가 자살하여 많은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아이돌 가수로서 가치를 보여주며 정상에 올랐었지만 성공을 위해 더 내달리며 고통 속에서 자신의 생을 마감한 사건은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공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음에도 채워지지 않는 깊은 갈망은 단지 한 사람만의 아픔이 아니라 현재 더해가는 사회적 압력과 아픔, 통제 안에서의 살아감이 얼마나 고달픈 오늘인가를 말해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회적 구조가 아무리 멋지게 치장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이 감옥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아 저항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도 때때로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지 알아차려야 합니다. 경제 상황은 악화되고 청년들에게는 일자리가 없으며 동시에 정보 통제도 심해졌습니다. 사람의 의식을 통제하는 주요 수단은 엔터네인먼트와 쾌락인데, 이것들은 통제의 틀 안에 사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를 덜 느끼게 해주는 아편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성탄절을 비롯한 종교의 문화에도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개인의 안일을 위해 존재하는 종교생활로 멈추게 하고 생각할 힘을 빼앗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통제에 대한 깨어있음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크리스마스! 예수의 탄생이야기는 억압받는 민중의 해방을 염원하는 이야기입니다. 보다 정치적이었고 보다 처절했으며 힘이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억압당하는 이들은 지배자의 대한 복종과 의존을 내면함이 아닌, 하느님이 민중의 문제를 직접 처리하겠다는 것을 과감히 보여줍니다.

[이사야의 해방]

 

오늘의 이사야 본문도 메시아의 탄생을 해방으로 이끌기를 간절히 염원하고 있습니다. 주전 732년 앗시리아는 갈릴래아의 영토와 즈불론과 납달리를 포함한 인접 지역을 점령했습니다. 남부 왕국의 백성은 앗시리아의 진경에 두려워 하고 있었지만 이사야 예언자는 야훼께서 억눌린 사람들을 구출해 평화를 안겨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임마누엘의 태어남을 이야기하면서 그는 하느님께 충실하고 든든하고 평화를 가져다주는 현명한 왕이다. 다윗왕조를 영원히 이어갈 것이다. 정의와 인권에 기초를 둔 사회를 조직하여 해방의 길이 열릴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은 지금 이 시대에도 가난하고 억압당하는 사람들의 해방을 위해서 일하고 계십니다.

 

메리 크리스마스!’의 의미 다시 새겨봅니다. 크리스마스를 문화적 소비구조로 길들여 놓으려는 틀, 그 안에서 억압과 수탈을 일삼는 자본권력을 걷어내고, 예수탄생의 의미를 되새기며 착취와 억압으로부터 약자가 해방되는 이야기로 읽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해방의 이야기에 가장 먼저 응답하게 될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 이야기에 묘사된 비슷한 상황 속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것이 정권의 폭주에서 내몰림 당한 이들의 이야기, 더 이상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구조 속에서 자포자기된 이들의 이야기, 더 나아가 자신안의 약함으로 인해 고통 하는 이들의 이야기라 생각할 것입니다.

 

부당 해고에 맞서는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LCD 디스플레이를 생산해 온 하이디스 농성이 이번 성탄절에 1,000일을 맞습니다. 하여 오늘 오후에는 향린공동체 사회선교부 주관으로 가장 낮은 곳, 노동자들에게 오신 주님을 기억하며 함께 기도회를 드립니다. 한상균 위원장 석방과 이영주 사무국장 수배해제를 위한 긴급기도회도 내일 진행됩니다.

 

주께서 사랑하는 사람들,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과 연대하기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오는 평화가 있습니다. 오늘 구유에 누인 아기예수가 평화의 왕으로 오심으로 해방의 날을 맞고자 하는 약한 이들의 갈망을 기억합시다. 이 갈망은 새로운 해방의 역사를 만들어 가게 될 것입니다. 성탄의 전날, 주님이 사랑하시는 이들에게 평화를 주심을 믿고 기다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