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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나눔

자유와 운명, 아집과 숙명

by phobbi posted Oct 06, 2026 Views 2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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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6-10-06

2026. 10. 06.

 

참 자유인이란, 아집의 명령을 좇음 없이 무엇을 의욕할 수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자유인은 현실을 믿는다. 즉 ‘나’와 ‘너’라는 두 실재의 진정한 결합을 믿는다. 또한 자유인은 운명을 믿는다. 그리고 운명이 그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믿는다. 운명은 자유인을 결박하지 않는다. 아니, 운명은 그가 찾아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운명을 만나러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자유인은 운명이 어디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의 온 존재를 기울여서 운명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운명과의 만남은 그의 생각대로 전개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는 자기가 의욕할 수 있는 것을 의욕했을 때 비로소 운명과 만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물질적인 것 혹은 본능적인 것의 지배를 받는 연약하고 부자유한 의지를 내어 버리고, 필연적 존재를 떠나 운명적 존재로 향하는 대의지(大意志)에 몸을 던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경지에 한번 도달하고 난 뒤에는 사람은 다시는 아무것도 간섭하려 들지 않으며, 그와 동시에 사물의 단순한 생기(生起)를 결코 묵인하지 않게 된다. 그는 자기를 통하여 실현되어 가는 것 - 즉 세계 안에 깃들어 있는 존재의 방향- 을 지긋이 바라본다. 그리고 그것은 이러한 존재를 이용하여 자기를 유지코자 함에서가 아니라 그 존재가 바라는 것을 자기의 정신과 행위와 생사를 바쳐 실현시켜 주고자 함에서인 것이다. “자유인은 운명을 믿는다”고 나는 말하였다. 그러나 이 말의 참뜻은 “자유인은 ‘만남’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집의 사람은 아무것도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아무것도 만나지 못한다. 그러한 사람은 ‘너’의 세계가 가지는 관계의 터전을 전혀 알지 못한다. 그가 아는 것이라고는 오직 열에 들뜬 밖의 세계와 이를 이용코자 하는 자기 안의 격렬한 욕망 - 그러한 것뿐이다. 세계를 이용하기 위하여 예로부터의 이름을 붙여주기만 하면 손쉽게 신들과의 교제에 들어갈 수가 있다. 그러기에 그가 “‘너’여!”하고 부를 때는 그것은 “아, 물건을 이용할 수 있는 나의 능력이여!”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요. 그가 “나의 운명”을 운위할 때도 그것 역시 자기의 이용 능력을 장식하고 찬미하는 것에 불과 하다. “나의 운명”이라는 말을 되풀이하는 그의 주장과는 달리 그에게는 “운명”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그가 오직 사용과 본능에 의하여 결정된 존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사물이나 본능에 굴종할 때 사람은 도리어 승리감마저 가지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아집인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사람에게서 장엄한 의지 따위를 발견할 수가 없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직 아집뿐이다. 그러한 따위를 가지고서 참 의지이기나 한 듯이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자칫 그의 입에서는 “희생”이라는 말이 튀어나온다. 그러나 그가 희생의 행위를 가지는 일은 한 번도 없다. 그는 끊임없이 무슨 일에든지 참견을 한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하여 보고자 하기 때문이다.

 

마르틴 부버 지음/김천배 옮김, <나와 너>(대한기독교서회, 2011. 8. 30. 초판 12쇄), 85-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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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버는 자유(Freiheit)와 운명(Schicksal)을 한 짝으로,

아집(Willkür)과 숙명(Verhängnis)을 다른 한 짝으로 놓고

이 둘을 비교한다.

 

위의 책에서 아집으로 번역한 Willkür는 본래 ‘자의(恣意)’,

곧 제멋대로 하는 의지에 가까운 말이다.

 

인간은 누구나 관계 속에 있는 존재, 만남의 존재이기에 진정한 의미에서 제 홀로 자유할 수 없다.

부버가 말하는 자유로운 인간(der freie Mensch),

즉 자유인은 ‘나-너’의 관계 안에서 결단하는 사람이다.

자기 욕망을 비우고, 타자의 타자성을 수용하면서 의욕하는 능력이 자유다.

 

아집에 사로잡힌 인간,

즉 제멋대로 하는 인간은 스스로 자기를 생각할 때 가장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무엇에든 참견하고, 무언가를 하려 들고, 세계를 이용한다.

그런 사람을 부버는 “오직 사용과 본능에 의해 결정된 존재”로 본다.

그는 사물과 본능에 굴종하면서 승리감을 느낀다.

‘나-그것’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인과율이 그의 삶을 뒤덮어 버리고,

그런 시대에는 생물학적, 역사적, 사회적, 심리적 결정론들이 진리처럼 받아들여진다.

 

간섭하지도, 방관하지도 않는 행위의 감각을 기르고

모르면서도 다가오는 존재를 향해 나아가 때때로 나를 맡기며

하늘이 내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듣고

온 세계를 그것이 아니라 너로 마주할 때

우리는 운명 안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 향린 목회 702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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