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09. 24.
“사려깊음은 […] 타자를 보면서 자기를 시야에서 지우며 타자를 나의 잣대가 아니라 그들의 잣대로 재려(messen)하는 자발적인 개방성이다. 사려깊음은 다른 영혼에 대한 영원히 깨어있는 존중이며, 따라서 인간의 마음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덕목이다.” 그러므로 플레스너는 사려깊음을 중추적인 사회적 실천으로, 더 나아가 사회적 에토스[품성] 자체로 고양시킨다, 그것은 사려깊음이 타자를 그 타자성에서 지각하고, 타자와 대면하면서 자기를 거두어들이는 능력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타자에서 단지 나르시스적 만족만을 추구하는 자는 사려깊음을 발휘할 수 없다.
“자기의 힘과 우월성을 과시하는 자, 미리 정해진 생각이나 근거 없이 통용되는 이미지에 따라 타자를 대하거나 판단하는 자는 사려깊지 못하다. 영혼이 귀먹거나 눈먼 자와 어느 한 가지에만 꽂힌 자는 사려깊지 못하다.”
진짜 인간적인 것은 필수적이지 않은 것, 즉 사치에서 나온다. 삶의 본질로서의 아름다움은 곤궁과 필요에서 생기지 않는다. 그것은 사치의 표현이다. 삶은 필요하지 않은 것, 직접적 유용함에서 벗어나 있는 잉여들에서 드러난다. 곤궁과 필요를 의식적으로 외면하는 것이 사치의 본질이다. 친절과 무심코 나오는 웃음은 사치의 영역에 속한다. 그래서 플레스너는 말한다.
“진정한 선은 까닭도 근거도 없이 단지 사랑이라는 잉여[의 마음] 때문에 행위하며, 어떤 재화나 가치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
이런 사치의 정신은 사려깊음에도 본질적이다. 곤궁과 필요에 뒤따르는 직진성과 노골성에 대한 명시적 거부는 “인간의 모방 불가능성”을 드러낸다. 오늘날 삶은 점점 더 곤궁과 필요에 지배되고, 사치의 정신에서 멀어진다. 그래서 삶은 생존 모드로 전환된다. 단지 기능적이고, 문제 해결에만 몰두하는 삶은 삶이 아니라 생존일 뿐이다. 삶은 사려깊음과 정중함처럼 아름다움에 귀의하는 사회적 실천들 없이는 단지 생존에 가까워진다. 무존중과 오만불손, 수치심 상실 그리고 방자함(Enthemmung)은 생존 사회의 전형적 특징들이다.
타자에 대한 조심스러운 거리 유지는 사려깊음의 한 구성 요소이다. [서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교감, 탐색”하는 태도는 “사려깊음의 섬세함”을 구성한다. 사려깊음을 소유한 자는 타자를 못살게 굴지(traktieren) 않는다. 원래 무엇을 다루거나 연구함을 뜻하는 이 단어(traktieren)는 놀이의 대척점에 있다. 사려깊음은 아름다운 가상(假像)을 가지고 논다. 거기서는 아무것도 도덕화되지 않는다. 아무도 [도덕의 이름으로] 심판받거나 단죄되지 않는다. 사려깊음은 급격한 직진, 거리 상실, 방자함에 대항해 [우리를] 지켜주는 완충지대를 만든다. 이 아름답고 보살피는 가상은 상처를 줄 수 있는 진리를 에둘러 간다.
한병철 지음/정창호 옮김, <존중 없는 사회>(간디서원, 2026년 10월 5일 초판발행일), 4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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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사려깊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타자의 타자성에 나를 개방하고,
상대를 ‘너’로 존중하며,
‘그것’으로 상대해서는 안 된다.
무분별한 진리 주장보다는
거리를 유지한 채 섬세하게 보살피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
- 향린 목회 690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