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09. 09.
깊은 숲 속을 걷던 한 사내가 다리 잃은 여우를 보았다. 그것도 하나만 없는 게 아니라 다리 전부가 없는 여우였다. 사내는 저런 꼴을 하고 어떻게 살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래지 않아 호랑이 하나가 포획물을 입에 물고 오는 것이 보였다. 호랑이는 제 배를 다 채우고 나더니 나머지는 여우를 위해 남겨놓았다.
다음날도 신은 같은 방식으로 여우가 굶주리지 않게 해주었다. 사내는 신의 위대함에 탄복을 금할 수 없었다. 그는 혼잣날로 중얼거렸다.
“나도 구석에 가만히 앉아 신의 사랑만 믿고 있으면, 내게 필요한 것을 모두 주시겠지?”
그는 그대로 몇 날 며칠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주저앉아 있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 죽어갈 지경이 되었을 때야 사내의 귀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 그릇된 길로 들어선 자여, 진실을 향해 눈을 뜨라! 내가 너를 그 자리로 이끈 것은 호랑이 본을 따르라고 한 것이지 하릴없는 여우 흉내나 내면서 거저 얻어먹을 생각이나 하라는 것이 아니었음을 모르겠는가.”
앤서니 드 멜로 지음/문은실 옮김, <바다로 간 소금인형>(2004. 11. 22.) 126-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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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여우 흉내를 내는가, 호랑이 본을 따르는가?
우리는 다시 본회퍼 목사의 말을 명심해야 한다.
“종교적인 사람들은 인간의 인식이(흔히 사유의 태만으로 인해서) 끝나거나 인간의 능력들이 한계에 부딪히게 될 때 하나님을 말하지. ~~ 사람들은 불안 속에서 하나님을 위한 장소를 보존하려 했던 것은 아닌가? - 나는 한계가 아니라 중심에서, 약점이 아니라 강한 곳에서, 인간의 죽음과 죄책이 아니라, 삶과 선(善) 안에서 하나님을 말하고 싶다네. 한계에 처해서는 침묵하고, 해결할 수 없는 것은 미해결로 남겨두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되네. 부활신앙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지. 하나님의 ‘피안성’이 우리 인식 능력의 피안성은 아니지 않는가! 인식론적 초월은 하나님의 초월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지. 하나님은 우리의 삶 한가운데서 피안적이지. 교회는 인간의 능력이 실패한 곳, 한계에 있지 않고, 마을 한가운데 있지. 이것이 구약성서적이며,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신약성서를 너무 구약성서로부터 읽지 않고 있다네.”본회퍼 지음/손규태.정지련 옮김, <저항과 복종> (대한기독교서회, 2010년 10월 15일) 521-523
- 향린 목회 675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