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뜻펴기 20260510 부활절6
“민중신학과 향린”
시34:1-9 사53:1-5 빌2:5-11 눅1:46-55
1.
이 시간 저는 우리 향린교회의 토대라 말할 수 있는 민중신학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민중신학에 대해서라면 우리 향린은 익히 들어온 것이며 우리가 간직하고 구현해 가야 할 중요한 주제임을 잘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주지하시는 대로 우리 향린교회를 세우신 안병무 선생님은 민중신학을 창시한 1세대 민중신학자이신만큼, 민중신학은 향린의 뿌리이고 향린을 향린 되게 하는 것이며, 그러하기에 지난 73년 동안 우리는 민중신학을 고이 품기 위해 노력해 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 새 예배당을 세우면서 안병무도서관을 설치하여 민중신학을 보존하고자 하였고, 교회건물 뒤편 향린순례길에도 우리 향린이 열어나갈 새 지평으로서 민중신학을 새겨두었습니다. 예배, 선교, 교육, 교회운영, 친교와 봉사 등 우리 공동체의 모든 면에서 민중신학의 정신에서 벗어나지 않기를, 우리는 기도해 오고 있습니다.
오늘 짧은 시간이겠습니다만, 우리 교회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민중신학을 다시한번 확인하고 우리의 과제를 함께 공감하기를 바랍니다. 최근 우리 공동체에 새 교우들이 많이 오셨는데, 미력하나마 향린의 토대가 되는 민중신학이 잘 소개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이 시간이, 민중신학에 대해 꾸준히 공부하시고 있는 교우들과 소통되고 이후에도 담론을 이어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2.
그리스도교 2천년 역사 그리고 세계사적 차원에서 한국교회가 돋보인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짧은 역사에도 급성장한 점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의 그리스도인이 민주화 투쟁 가운데 민중신학이라는 고유한 신학사상을 형성하여 세계 신학계에 이름을 올린 것입니다. 국내 학계에서도 근대 100년 동안 주목할 만한 이론을 20개를 꼽을 때 민중신학을 선정할 정도로, 민중신학은 고유한 이론으로 성취하여 우리에게 전승되고 있는 것입니다. 민중신학은 신학의 관점을 혁명적으로 바꾸어 성서를 새롭게 그리고 더욱 본질적으로 해석해냈다는 점에서 찬사를 받았습니다.
세계 신학계에서 민중신학에 대하여 특별히 주목하고 있는 바는, 서구 그리스도교 신학의 전통을 발전시켜 획기적인 각주를 달았다거나 어떤 세련된 철학적 사조를 배경으로 두고 각색한 특별한 신학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민중신학은 서재 안에서 조용히 만들어진 신학이 아니었습니다. 민중신학은 한국 현대사의 상처와 눈물 속에서 태어난 신학이었습니다. 군사독재의 폭력, 노동자의 희생, 민주화운동의 절규, 이름 없는 사람들의 고난 속에서 신학자들은 질문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민중의 고통에 통감하면서 던진 민중신학의 이 질문! 처절한 고통에서 하나님을 다시 찾았습니다. 교회의 전통과 권위주의에 의존한 교조적인 신학이 아니라, 역사의 현장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해방하는 하나님을 찾아 구원을 갈망했습니다. 하나님은 고통의 바깥이 아니라, 역사 한복판에서 민중과 함께 계신다는 고백이 민중신학의 출발점입니다.
이전까지 서구의 신학은 주로 권력자와 제도, 교리 중심으로 성서를 읽었고, 많은 전통적인 신학은 교회를 유지하는 일에 복무하는 신학이었습니다. 신학함의 출발점이 달랐던 민중신학은 “민중”을 주목하며 성서를 다시 읽기 시작합니다. 고통으로 울부짖고 억압당하지만 저항하고 해방을 꿈꾸면서 역사의 주체로 일어서는 민중을 보면서, 성서 속 예수와 함께했던 민중들, 민중이었던 예수에 주목하였습니다. 교회의 전통과 권위주의, 그 위에서 강요된 신학이 아닌, 고통과 소외의 자리 그 아래로부터 성서를 다시 읽은 것입니다. 출애굽의 노예들, 바벨론 포로들, 병든 자와 가난한 자들,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의 모습 속에서 민중의 얼굴을 발견하고 성서를 다시 해석한 것입니다. 그래서 민중신학은 기존 신학의 절대성을 해체하는 도전하는 반신학적(탈신학적) 성격을 지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독점하려는 신학을 거부하고, 하나님께서 민중 속에서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드러내려는 몸부림이었습니다. “누가 하나님을 부를 자격이 있는가?” 신학의 관점이 변혁되었습니다.
민중의 관점에서 성서를 해석하기 시작한 민중신학은, 성서에 기록된 하나님의 이야기와 오늘날 민중의 이야기가 서로 다르지 않다고 파악하였습니다. 오히려 민중의 역사적 사건 속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내신다고 이해합니다. 민중신학의 중요한 주제 중에 하나인 “두 이야기의 합류”란 바로 이것입니다. 성서의 이야기는 단지 하늘에서 내려온 초월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민중의 절규와 저항, 희망을 노래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성서의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 민중의 이야기와 만나야 합니다. 두 이야기가 합류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야훼신앙이 말하는, 그리스도교 복음의 선포하는 구원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고 민중신학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민중의 고통의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오셔서 함께 걸으시는 분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고통과 저항이 공명하는 민중사건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민중의 이야기에서 성서가 가르치는 구원의 의미를 체험할 수 있다고, 참 신앙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역사 참여인 것이라고,민중신학은 가르칩니다.
민중신학은 민중을 대상화하고 민중이란 존재를 해부하여 연구하거나 설명하려는 신학이 아닙니다. 민중의 역사 속에 참여토록 우리를 추동하는 신학입니다. 민중사건 속에서 하나님이 현존하시고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노동자의 외침, 민주화를 향한 저항, 생명을 지키려는 연대, 차별과 혐오의 세상을 바꾸려는 절규, 안전한 사회를 위한 인내, 평화를 사랑하는 간절함, 아스팔트에 흘린 빼앗긴 자들의 땀과 눈물, 정의를 향한 해방의 몸짓 속에 하나님나라의 흔적이 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려거든 갈릴리로 가라!” 했던 마가복음서의 기자의 말처럼, 민중사건의 그 현장으로 가라고, 민중신학은 우리를 추동합니다. 구원은 현실 밖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민중사건에 나타나시는 하나님과 함께 이 역사를 바꾸어가는 참여 속에서 누리게 되는, 우리 삶에 실로 실제적인 것입니다.
민중신학에서 ‘사건’은 예수의 사건을 기반으로 합니다. 민중과 함께 일으킨 예수의 사건, 그것은 민중에게 하나님나라를 약속한 구원의 사건이었습니다. 그 예수의 사건이 민중신학의 관점에서는 오늘날 민중의 사건에서 공명되고 겹친 것입니다. 민중신학자들은, 예수의 구원사건이 2천년 전에 유일회적으로만 일어났던 것이 아니라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여 화산맥처럼 민중사건으로 분출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성서에서 증언하는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이 감내하는 고통의 역사에 개입하셔서 구원하시는 분이니, 오늘날 민중사건에서도 하나님은 구원사건을 일으키시는 분입니다. 교회가 예수의 사건을 독점하여 교회에만 구원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세상 가운데서 자유롭게 구원활동을 펼치시는 하나님을 찾아서 교회는 나서야 한다고 말합니다. 민중신학적인 교회는 모여서 하나님을 찾고 또 하나님의 뒤를 따라 흩어져서 구원사건에 동참하는 교회입니다.
그러면 민중사건 속에서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는 것이 민중신학의 중요한 화두가 됩니다. 전통적으로 구원은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메시아를 통해 실현됩니다. 메시아가 구원의 주체로 인식되는 것입니다. 이같은 논리에 따라 “민중사건에서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민중신학은 민중이 구원의 주체인 메시아(그리스도)가 되는가?” 하고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서구신학의 기본 성향인 그리스도론 중심성과 이원론적 사상에 기반한 비판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 민중신학은 서구신학과 신학함의 자리가 다르다는 전제를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언하여 말씀드리자면, 예수와 함께했던 민중에 주목했던 민중신학에 있어서 예수와 민중은 주체와 객체로 구분되지 않습니다.
민중신학은 예수 또한 민중이었음을 환기하면서, 예수의 사건에서 민중과 예수는 혼연일체로 하나가 된 것이라고 역설합니다. 이러한 설명을 이해하지 못하고 서구신학이 “민중은 예수 곧 메시아일 수 없다”고 비판하는 것은, 민중신학자들이 목도한 한국 민중운동을 경험하지 못한 데서 온 한계지점입니다. 또한 서구의 신학은 존재론 중심적인 사고를 하여 구원의 주체를 강조하고 이에 따라 객체들을 나열하는 까닭에, 동양적 사유방식의 관계론 바탕에 기반한,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적 사고의 극복, 즉 예수와 민중의 혼연일체를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중신학은 서구신학을 향하여 “민중사건에서 민중은 스스로 구원한다”고 적극적으로 역설합니다. 이것은 서구신학이 오해하는 것처럼 민중이 존재론적으로 메시아가 된다는 말이거나, 민중이 하나님 없이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더구나 기름부음을 받은 메시아는 권력의 표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참여하도록 사명을 받은 자로 이해해야 합니다. “사건”이라는 특수한 배경 안에서 민중신학이 말하는 “민중메시아”의 의미를 이해해야 합니다. 민중신학자들이 “민중메시아론”을 말할 수 있었던 데에는 민중사건 속에서 민중이 자기를 초월하는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만난 삭개오가 새로운 결단을 했던 것과 같이, 민중신학의 민중메시아론은 민중이 자신의 인간적인 한계를 초월하여 새롭게 해방운동의 주체로 나선 민중의 모습을 보며 깊이 성찰한 것입니다.
민중의 자기초월의 능력에 대해서는 안병무 선생님이 어머니를 그린 책 <선천댁>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단순한 시대의 피해자로 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타인을 품고 자신을 넘어서 새로운 생명의 공간을 창출한, 어머니 선천댁에서 안병무는 민중메시아론의 원형을 찾았습니다. 민중의 자기초월은 자기 자신을 높이는 데 있지 않고, 자기를 비우고 자신을 넘어 타인을 품는 데 있습니다. 학생운동을 하다가 열사가 된 아들의 추모제에서 열사의 한 어머니는 추모제에 참석한 모든 학생을 자신의 아들과 딸로 품었습니다. 아들의 출세만 생각했던 어머니는 그때 자기초월하여 아들이 꿈꾸던 세상을 함께 꿈꾸게 되었고 또 아들과 한 뜻을 품은 모든 학생들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안병무 선생님이 목격한 어떤 어머니의 자기초월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자기초월은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리스도론 중심적으로 사유하는 서구신학과 다르게 민중신학은 성령론을 더욱 강조합니다. 민중사건이 화산맥처럼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여 발생한다고 주장하는 것 또한 민중신학이 성령론을 강조한다는 것을 방증합니다. 성령의 능력은 악의 세력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지킬 수 있는 힘입니다. 성령은 죽임의 위협과 불의한 권력의 폭력에 굴하지 않고 하나님이 약속한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하여 나아가도록 이끄는 용기입니다. 썩어지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게 하는 힘입니다. 세상의 논리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하나님을 포기하지 않도록 우리에게 능력이 되는 신비하고 거룩한 영입니다. 민중신학자는 한국 민중이 자기 자신을 넘어 타인을 품는 모습을 목도하면서 성령에 의한 자기초월의 능력으로 성찰한 것이었습니다. 민중은 이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와 혼연일체가 되어 구원사건을 일으키는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민중신학자들은 확신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 억압받는 민중의 저항, 자기초월, 성령의 역사 이 모든 과정이 “사건”에서 이루어집니다. 예수의 사건에서와 같이 오늘날 민중사건에서도 “그 사건”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것, “그 사건”에 동참하여 민중과 함께 구원사건을 체험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본분이라고 민중신학은 가르칩니다. 우리가 민중사건에 참여한다는 것은 단순히 사회운동에 동참하는 차원을 넘어서, 하나님께서 선교하고 활동하시는 그 자리에 함께 서는, 지극히 신앙적 행위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회참여 운동은 성령의 이끌림과 깊은 성찰이 동반된 진실한 신앙운동이어야 합니다.
3.
오늘 누가복음서의 본문은 <마리아의 찬가>입니다. 사실 이것은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의 개인적인 감사의 노래가 아닙니다. 이 노래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전후에 벌어진 매우 폭력적인 정치 현실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당시 민중은 로마의 식민지배와 헤롯 왕가의 폭력 통치, 과도한 세금과 토지 수탈 등의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 노래는 민중의 저항이 제국과 헤롯 대왕에 의해 반복적으로 억눌리고 진압되던 시대에 불려진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마리아는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시고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셨다”고 매우 급진적이고 과감하게 노래합니다. 제국과 헤롯의 질서에 저항하면서 억압체제로부터의 해방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용기에서 우리는 민중의 자기초월을 엿볼 수 있습니다. 억압적 현실에서도 도피하지 않고 민중의 역사적인 희망을 선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노래 “마리아의 찬가”는 출애굽의 해방 전통과 예언자들의 정의 선포, 그리고 민중의 저항과 희망이 집약된 명가로 전승 되었습니다.
이사야서의 본문은 민중신학이 꼽는 대표적인 구절입니다. 4절,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는 이 구절은 전통적으로 고난받는 종을 예수 그리스도로만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기원전 6세기 이스라엘이 바빌론 포로기 때 쓰여진 이 구절이 예수 그리스도만을 예견하고 쓰였다는 것은 논리적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또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그리스도론 중심적인 편협한 해석일 뿐입니다. 민중신학의 성령론적이고 공시적인 해석으로 확장하여 모든 민중사건을 묘사한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민중의 찔림, 상처, 징계는 같은 구조악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잘못과 무관하지 않다는 제2이사야의 통찰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민중사건에 우리가 함께 동참할 때 우리의 병이 낫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민중메시아론”적 해석이 논리적으로 타당합니다.
빌립보서의 본문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아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라는 권면입니다. 친히 민중이 되시고 민중과 혼연일체로 사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는 이 권면이 우리의 마음을 울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신앙은 아래로부터 민중과 함께 연대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4.
앞서 모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민중신학은 우리 향린의 토대이며 또한 과제입니다. 민중신학과 우리 향린은 여러 비유로 그 관계를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민중신학이 향린의 뿌리라면 향린은 민중신학에서 양분을 얻는 나무와 같습니다. 뿌리 없는 나무는 존재할 수 없고, 나무가 없다면 그 뿌리 또한 자신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민중신학이 향린의 숨이라면 향린은 그 숨으로 살아 움직이는 몸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 향린에게 있어서 민중신학은 단순히 학문적 이론일 뿐이거나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오늘 우리 공동체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호흡이며 생명입니다. 숨이 멎으면 몸이 쓰러지듯, 민중신학의 정신이 멎으면 향린 또한 쓰러질 것입니다. 민중신학이 길이라면 향린은 그 길을 걷는 걸음입니다. 민중신학이 우리에게 하나님나라의 방향을 제시했으니, 우리 향린은 민중과 함께 걷고 역사 속에 참여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민중신학이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부르시는 노래라면, 우리 향린은 그 노래에 응답하는 추임새와 같습니다. 판소리와 국악찬양에서 추임새가 없으면 그 소리는 살아 움직이지 못하듯이 민중신학에 우리 공동체의 응답과 실천 그 추임새가 없다면 민중신학은 생명력을 잃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민중의 역사 속에서 부르시는 해방과 생명의 노래에 우리 향린이 “얼씨구” “좋다” “그렇지” 하면서 응답하는 우리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어버이주일로 지킵니다. 내가 존재하도록 양육해주신 분들의 은혜를 생각하며 그 사랑과 헌신에 마땅히 감사하는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일찍이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교회를 일컬어 그리스도인을 양육하는 어머니로 비유하였습니다. 또한 종교개혁자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교회를 “그리스도인을 낳고 양육하는 어머니”로 설명했습니다. 교회란 단순한 조직이 아니라 말씀과 성례를 통해 신앙인을 품고 길러내는 모성적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생명을 낳고 돌보고 먹이고 성장시키는 존재로 교회를 묘사한 것입니다.
오늘 어버이주일에 우리들의 민중신학의 어머니인 향린공동체를 기리며 그 은혜에 감사합니다. 자기를 넘어 타인을 품을 수 있었던 어머니 선천댁과 같은 교회로 모시면서 우리 모두 민중신학의 신앙인으로 양육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모태를 기억하면서 우리의 정체성을 늘 확인하는 신앙인이 되는 것이 어버이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선교활동을 우리의 모태 안에서 서로 적극적으로 공감하고 나누면서 민중신학이 더욱 확장되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우리 교회와 같이 민중신학을 지향하는 교회들과 보다 적극적으로 연대하고 민중신학이 새롭게 잉태되도록 산파 역할을 감당할 수 있기를 또한 바랍니다.
침묵기도 드립시다.
......
(파송사)
1993년 강남향린교회 창립예배에서 안병무 선생님은 이렇게 축사를 전하셨습니다.
“예수의 얼굴을 제대로 그려봅시다. 우리 바른 예수의 얼굴을 그려봅시다.”
그때 안병무 선생님의 축사가 우리에게도 축복의 말씀입니다.
여기 향린의 모태에서 빚어진 예수의 얼굴로 세상으로 나아갑시다.
평안히, 자유인으로 나아갑시다.
초월의 능력을 주시는 성령께서 여러분과 늘 함께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