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입: 우리 교회는 왜 ‘성령 충만’을 낯설어할까?
사랑하는 향린교회 교우 여러분, 혹시 우리 교회에서 ‘성령 충만’이라는 단어를 자주 들어보셨습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잘 못 들어봤습니다. 우리가 청년 예수를 사랑하고, 그 청년 예수를 치열하게 따라가는 삶은 너무나 귀하고 좋은데, 문득 상대적으로 우리가 ‘성령’에 관해서는 이야기를 잘 나누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우리는 성령이라는 단어를 이토록 어색해할까요?
처음에 저는 우리 교회에 와서 민중신학을 접하다 보니, 혹시 민중신학은 성령에 그리 큰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5월 10일, 김지목 목사님께서 하신 설교 말씀 한 구절이 기억에 남았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민중의 자기 초월적 능력은 성령으로 말미암음이다.”
그렇습니다. 민중이 불의한 역사 속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힘, 내 안위와 이익을 뛰어넘어 고통받는 타인과 연대하고, 그들을 위해 내 목숨까지 바치는 그 ‘자기 초월적 능력’은 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민중신학과 성령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에는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는 방탕이 따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라는 명확한 명령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이야기를 꺼려온 이유는 아마도 기성 교회가 보여준 ‘성령에 대한 오해’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성령을 받으면 신비주의에 빠져 갑자기 “랄랄라~ 쏴쏴쏴~” 방언을 터뜨려야 할 것 같고, 일상을 내팽개친 채 골방에 들어가 기도와 말씀 생활만 해야 할 것 같은 거부감이 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이 말하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보십시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막을 법이 없습니다.” 즉, 성령으로 충만해진다는 것은 특별하거나 대단한 신비주의적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해진다는 것은, 우리의 인격이 이 아름다운 성품을 닮아가며 생명력 넘치는 삶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성령이 임할 때 우리의 삶에 어떤 실제적인 변화가 일어나는지, 오늘 세 가지 본문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본론 1: 우상숭배의 본질과 ‘살갗 같은 마음’ (에스겔 36장)
오늘 첫 번째 본문인 에스겔 36장은 기원전 586년, 남유다가 바벨론의 잔인한 말발굽 아래 완전히 멸망하고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간 처절한 절망의 한복판을 배경으로 합니다. 에스겔 예언자는 이스라엘이 망한 근본 원인을 ‘우상숭배’라고 규명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우리는 기성 교회의 배타주의적 오해를 걷어내야 합니다. 우상숭배는 단순히 돌로 만든 신상 앞에 절하는 종교적 행위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에스겔 22장 3~4절을 보면 하나님은 우상을 만들어 스스로를 더럽힌 성읍을 향해 “너는 살인죄를 저질렀고 피를 흘렸다”고 고발하십니다. 이어지는 6절에서도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제각기 자신의 권력을 믿고 내 안에서 살인을 서슴지 않는다”고 엄히 꾸짖으십니다.
이것이 우상숭배의 본질입니다. 우상의 핵심은 탐욕을 정당화하는 힘과 폭력입니다. 권력의 편에 서서 아부하고, 탐욕을 위해 약자들을 압제하며 피를 흘리는 구조적 불의가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자본주의에 잠식되어 사람을 효율로만 따지고, 약자를 배제하며, 강자의 편에 서서 방관한다면 그것이 바로 이 시대의 우상숭배입니다.
그런데 이 고장 난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은 놀라운 반전의 선언을 하십니다. 22절을 보면 “내가 이렇게 하려고 하는 까닭은 너희들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너희가 가는 곳마다 더럽혀 놓은 내 거룩한 이름을 회복시키려고 해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언뜻 보면 하나님의 이기적인 체면 유지처럼 느껴집니다. 마치 이스라엘의 어려움과 압제받는 고난의 현실은 외면하고, 자기 자신의 이름 때문에 너희들을 내버려두지 않겠다고 느껴지는 것이지요. 하지만 제가 한 번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A라는 스마트폰 제조 회사가 신제품을 출시를 했는데, 그때 사장이 나와서 이렇게 말을 하는 겁니다. “우리 회사 이름의 명예를 걸고, 여러분의 스마트폰이 결함이나 하자가 발생한다면 저희는 여러분의 스마트폰을 끝까지 AS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여러분은 이 사장이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정말 신뢰할 만한 기업이라고 생각하시겠습니까?
더군다나 하나님의 이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과거 출애굽 시절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당시 이집트의 노예로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유를 주셨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내셨습니다. 마치 고장 난 제품을 기업의 명예를 걸고 무상 리콜하듯, ‘압제받는 자를 해방하는 하나님’이라는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그들을 반드시 구해내겠다는 선언은 다시 말하자면 당신의 정체성과 정해진 명예를 걸고, 자격 없는 우리를 끝까지 책임지고 구원하시겠다는 은혜의 선언입니다.
그 구원의 방식이 26절에 등장합니다. “너희 몸에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없애고 살갗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며.” 우상을 조각하던 차갑고 딱딱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시고, 피가 흐르고 온기가 있는 ‘살갗(바사르) 같은 마음’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살갗은 만지면 따뜻하고, 안으면 온기가 전해지며, 때리면 아픔을 느낍니다. 즉, 타인의 아픔에 아파하고 연대할 줄 아는 공감 능력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어 27절에 “너희 속에 내 영(성령)을 두어 율례를 행하게 하겠다” 하십니다. 성경에는 613개의 율법 조항이 있다고 하는데 도대체 사람이 이 많은 율법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모든 규례를 요약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즉, 성령이 우리 가장 깊은 내면 속에 임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타인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재창조된다는 것입니다.
본론 2: 성령, 세상의 사슬을 푸는 희년의 명령 (요한복음 20장)
그렇다면 이 재창조의 영은 우리에게 어떻게 찾아옵니까? 오늘 복음서 본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스승을 잃고 두려움과 절망에 빠져 문을 걸어 잠근 제자들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불어넣으시고”라는 단어는 신약성서 전체에서 이 구절에서만 등장합니다. 이 원어가 쓰인 다른 곳을 살펴보면 70인역 구약성서의 창세기 2장 7절과 에스겔서 37장 9절입니다. 다시 말해 숨을 “불어넣으시는” 장면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던 창세기 2장 7절의 유비입니다. 마른 뼈가 살아나서 새롭게 창조되는 에스겔의 환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들의 스승을 잃어버리고 낙심에 빠져 돌처럼 마음이 굳어 있던 제자 공동체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숨결을 불어넣어, 살갗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고 새로운 생명을 가진 대안 공동체(교회)로 재창조하시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 숨결을 받은 제자들에게 엄청난 사명을 맡기십니다. 23절입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 죄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이 구절 또한 가톨릭의 고해성사나 목회자의 종교적 권위로 많이 오해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으로 이 ‘용서(아피에미)’라는 단어를 추적해 보면, 구약 신명기 15장에서 일곱 해마다 찾아오는 안식년에 ‘가난한 자들의 빚을 면제(탕감)해 줄 때’ 쓰이던 단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은 이 뜻입니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아, 이제 너희는 세상으로 나아가 구조적 악과 빚의 사슬에 묶여 압제당하고 고난받는 자들을 해방하고 탕감하여라. 너희 교회가 연대하여 그 사슬을 풀어주면 풀릴 것이요, 너희가 방관하고 그대로 두면 그 세상의 죄와 고통은 역사 속에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성령을 받은 교회는 세상의 묶인 것을 푸는 희년의 대리자가 되어야 한다는 선포입니다.
본론 3: 눈이 열려 약자를 주목하는 변화 (사도행전 3장)
이제 성령을 받고 희년의 명령을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를 한 번 살펴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3장입니다.
성령 강림 사건이 있은 후 어느 날, 베드로와 요한은 늘 하던 관습대로 오후 3시 기도 시간에 성전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 성전 문 앞에는 ‘미문(아름다운 문)’이라 불리는, 고린도산 청동으로 만들어져 햇빛이 비치면 금보다 찬란하게 빛나던 화려한 문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화려한 문 아래에는, 나면서부터 걷지 못해 매일 그 자리에 누워 구걸하던 지체장애인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배경이 있습니다. 이 장애인은 그날 처음 그곳에 온 사람이 아닙니다. 매일 그 자리에 있었고, 베드로 역시 매일 그 문을 지나쳤습니다. 성령을 받기 전 베드로에게 이 사람은 성전 미문의 화려함에 가려진 무감각한 풍경의 일부, 즉 ‘돌덩어리’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4절입니다.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그를 눈여겨보고.”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약자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기서 ‘눈여겨보았다’는 것은 단순히 시선이 머문 것이 아니라, 그 존재의 아픔을 내 마음에 담고 깊이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성령이 임하여 베드로의 마음에 ‘살갗처럼 부드러운 마음’이 생기자, 늘 지나치던 이웃의 절망이 비로소 바늘로 찌르듯 아프게 느껴진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이 임하면 우리의 눈과 귀가 바뀝니다. 평소에는 들리지 않던 소외된 이들의 울부짖음이 들리고, 세상의 집회 현장과 시위 현장의 탄식이 내 아픔으로 다가옵니다.
멀리 바라볼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 주변을 한 번 살펴볼까요? 지금 우리 교회 1층에는 들녘교회에서 올라온 양파들이 쫙 깔려 있습니다. 성령의 눈으로 그 양파를 바라보면 무엇이 보입니까? 들녘교회 성도들의 거친 손마디와 땀방울, 기후 위기 속에서 애타는 농촌의 애환이 보입니다. 그냥 지나치던 양파였는데, 살갗 같은 마음이 임하니 ‘아, 내 주변의 이웃들에게 이 양파를 나누면 좋겠다’는 타인을 향한 따뜻한 관심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약자를 향해 외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그저 동전 몇 푼 얻어 오늘 하루 연명하려던 사람에게, 베드로는 성령의 능력으로 그의 삶을 밑바닥부터 뒤흔드는 근본적인 해방과 구원을 선물했습니다. '나사렛 예수'라는 역사적 예수를 고백하고, '그리스도'라는 우리의 구주를 선포하며 그 존재를 온전히 일으켜 세운 것입니다.
결론: 성령으로 충만하여 세상으로 나아가는 향린
사랑하는 향린의 교우 여러분, 우리가 서로 문안 인사를 나눌 때 “성령으로 충만합시다”라고 인사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숨결을 마시고 살갗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갖게 될 때, 우리는 세상의 탐욕과 자본이라는 우상의 길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눈과 귀를 갖게 되면, 우리는 이 땅의 불의와 약자들의 눈물 앞에 결코 잠잠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매주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세상의 고통받는 현장으로 나아가는 것, 바로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살갗처럼 만드셔서 그들의 신음에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연민을 느끼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의 안위와 안정을 위해 살던 안주함을 내려놓고, 자기 자신을 초월하는 성령의 능력을 받아 타인의 고통과 어려움에 연대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언제나 성령께서 이러한 능력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성령이 주시는 예수의 시선과 심장을 가지고, 이 시대 성전 미문 아래 주저앉아 있는 약자들의 사슬을 풀어내는 성령 충만한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파송사
하나님의 영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으로 충만하십시오.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세상을 살아가십시오.
여러분이 받은 은혜를 세상에 흘려 보냈을 때에
여러분이 서 계신 그곳에 바로 하나님나라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