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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기도회

세종호텔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 ㅣ 이민하 ㅣ 2026-02-10

by 이민하 posted May 03, 2026 Views 45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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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6-02-10

2026.02.10. 세종호텔 거리기도회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

고린도전서 1:18-25

 

[도입]

투쟁에 힘쓰시는 여러분, 그리고 거리를 기도의 자리로 삼고 나아오신 여러분. 세종호텔 해고 노동자들의 복직을 촉구하며 모인 이곳에 하나님께서 은총으로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저는 세종호텔 농성장에 방문한 적이 많지는 않습니다. 저희 교회에서 주관한 새벽송이나 기도회를 통해 몇 번, 그리고 최근 들어 몇 번 들러 자리한 것이 전부입니다. 방문할 때마다 앞에서 발언하시는 분들의 말씀을 듣긴 했으나, 조금 더 잘 알고 싶어서 최근에는 뉴스와 성명문, 법원의 판결 등을 찾아 읽었는데요. 법원의 판결, 그리고 사람들의 부정적인 댓글이 제 마음에 그을음처럼 남더군요. 이 운동을 향한 판단이 고작 글줄 하나로 남아버릴 때, 투쟁을 하는 이유와 맥락, 사람의 마음은 전혀 기억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가령 세종호텔이 인원을 선택적으로 선별하여 부서를 배치, 발령하고 해고한 것, 해고 전에도 오랫동안 부당한 처사로 노동자들을 탄압했던 것 말입니다. 마음을 찌르는 말들은 대체로 비슷합니다. 해고되면 끝났다거나, 노조가 다 그렇다거나, 이해되지 않는다거나. 그런가요? 정말 다 끝났나요.

흔히들 말합니다.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지혜라고. 힘의 결과를 인정하는 것이 지혜라고. 부끄럽지만 그런 냉소가 저의 마음을 흔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끝났다고 선언된 곳에서도 여전히 끝나지 않은 삶이 있습니다. 정리되었다는 말 뒤편에는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고통이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은 진실을 붙들기 위해 이곳에 모였습니다.

성서는 오늘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무엇이 지혜인가? 현실은 어떠하고,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는 무엇인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그 질문을 두고 씨름하는 한 공동체의 이야기입니다. 제국의 질서가 상식으로 작동하던 시대, 힘과 성공, 합리가 사람의 가치를 가늠하던 시대에, 이들은 어떻게 전혀 다른 질서를 꿈꾸었을까요?

 

[초대 교회의 꿈: 하나님 나라]

예수는 유대교를 변혁하려 했던 사람입니다. 당시 유대교는 율법주의와 선민의식에 매몰되어, 주변부의 존재들을 종교의 언어로 배제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는 배제의 자리 한가운데에서 율법의 정신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그 정신은 바로 사랑입니다. 예수는 그 사랑이 실제 삶의 질서가 되는 세계, 곧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살아냈습니다.

예수가 처형된 이후에도 이 운동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예수가 유대교 내부의 변혁을 꿈꾸었다면, 예수 사후 운동은 점차 유대교와 구별되는 종교적 정체성을 형성해 갑니다. 이 예수 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바울입니다. 바울은 열렬한 유대교인이었지만,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예수를 증언하게 된 사람입니다. 그는 여러 도시를 다니며 공동체를 세웠고, 오늘 우리가 읽은 고린도전서는 그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모든 공동체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세종호텔 앞에 모인 것처럼 말입니다. 초대 교회 공동체의 목적 또한 명확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가 몸소 보여준 ‘하나님 나라’를 지금 여기에서 실현하는 것이었습니다. 인종과 계급의 벽을 허물어 공동체를 이루고, 소유를 기꺼이 내어놓으며, 평등한 식탁을 나누는 공간. 이는 공포와 폭력을 무기 삼아 착취와 축적으로 유지되던 ‘제국의 질서’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습니다. 당시 이런 실천은 그야말로 혁명이었습니다. 외국인도, 여성도, 노예도, 그 누구도 이 공동체에서만큼은 하나님 나라라는 ‘새로운 질서’를 경험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공동체를 침투하는 ‘지혜’의 언어]

그런데 이 새로운 질서를 꿈꾸던 고린도 공동체에 문제가 생깁니다. 이를 이해하려면 고린도라는 도시를 알아야 합니다. 고린도는 항구도시이자 상업 중심지였습니다. 원래 그리스의 도시였지만, 로마에 의해 파괴된 뒤 로마의 식민 도시로 재건됩니다. 지리적으로 번화할 수밖에 없는 데다가 이러한 역사적 사건까지 있었으니, 이 도시는 다양한 민족과 계급이 뒤섞인 공간이 되었습니다. 부유한 상인, 퇴역 군인, 유대인 디아스포라, 귀부인, 해방 노예까지. 고린도 교회 역시 이런 다양성을 품고 있었겠지요.

이들은 부유한 도시에 살며 고린도라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보았을 겁니다. 누가 힘을 가지는지, 어떻게 성공하는지, 무엇을 “설득력 있다” 이르는지. 그러한 경험은 차곡차곡 쌓여 어떤 확신이 됩니다. “부유해져야 한다.” “줄을 잘 서야 한다.” “이렇게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이 확신은 곧 합리적인 삶의 태도, 즉 세상을 사는 지혜가 됩니다. 세상을 사는 지혜라니… 오늘날 우리에게도 너무 익숙한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이 지혜가 교회 안에서도 여전히 작동했다는 점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이냐, 아볼로냐, 게바냐 하며 편을 갈랐습니다. 교회의 선생들 중 누가 더 설득력 있는지, 누가 더 세련된 언어를 쓰는지를 다투며 말입니다. 언뜻 보면, 이 분열은 단순하고 유치한 싸움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고린도 사회는 논리적이고 언변이 뛰어난 사람을 높게 쳐주었습니다. 언변이 뛰어난 사람은 부유한 상류층으로부터 후원을 받을 수 있었지요. 상류층은 이들을 후원함으로써 자기 명예를 높이고,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었고요. 달변가와 상류층의 관계는 고린도라는 도시가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여줍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이 작동 방식을 교회에서도 그대로 구현하려 했던 것이지요. 연줄에 따라 파벌을 나누고, 초대 교회 선생들의 이름 아래 모여 세력을 불리면서요. 그것이 ‘지혜로운 일’이라고 굳게 믿으면서 말입니다. 이는 고린도 사회를 움직이던 세상의 지혜가 교회 안으로 그대로 들어온 사건이었습니다.

 

[지혜를 비트는 어리석음]

‘지혜’를 무기 삼아 자신의 영향력을 확장하려던 고린도 교인들에게,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하셨다고 말입니다. 바울은 세상의 지혜로 두 부류를 예로 듭니다. 하나는 유대인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인입니다. 유대 사람들은 기적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에게 진리는 압도적인 힘으로 증명되어야 했습니다. 메시아라면 바다를 가르고, 적을 무너뜨리고, 승리를 보여주어야 했습니다. 이집트에서, 척박한 광야에서 히브리를 이끌었던 모세처럼 말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지혜를 찾았습니다. 그들은 논리적으로 아름답고, 설득력 있는, 고상한 설명을 원했습니다. 납득되지 않는 것은 진리가 될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힘에도, 논리에도 없다고요. 오히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가장 어리석어 보이는 방식을 택하셨습니다. 이것은 힘을, 논리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굉장히 허황되고 모순되게 들릴 것입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어리석어 보이는 이들’을 통해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노예, 부랑자에 불과했던 히브리인들, 죄인이라 낙인찍힌 사람들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 어리석음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 곳이 어디입니까? 예수가 죽임당한 십자가입니다. 예수는 세상의 합리와 지혜를 거부한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지혜롭다는 통치자들에 의해 처형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지혜를 힘, 성공, 결과로 증명하지만, 하나님의 지혜는 고난 속에서, 서로 기댄 관계를 통해 나타납니다.

 

힘을 열망하는 이들에게 십자가는 무능함입니다. 고상함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십자가는 한심함입니다. 그러나 어리석다 손가락질 받기에 되려 하나님의 지혜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압니다.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의 연약함이 사람의 강함을 이긴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 또한 그렇습니다. 연약한 숨결들이 모여 기도를 드리고 있으나, 이 기도에는 힘이 깃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에 기댄 우리의 약함이 힘과 지혜를 믿는 저들의 비웃음보다 강합니다.

 

[우리의 자리: 십자가]

오늘 우리의 자리를 돌아봅니다. 세상의 지혜가 말합니다. “법적으로 끝난 일이다.” “당신들이 해고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라.” 세상의 힘이 말합니다. “이기지 그랬냐?” 실재했던 부당함은 어째서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것이 될까요? 그것은 그들이 실재를 보려고 하지 않고, 들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지혜는 힘의 논리에 기대기 때문입니다. 진정 비루한 지혜입니다. 그곳이 우리의 자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예수는 그런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고상하고 그럴듯한 자리, 고난을 비웃는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의 자리는 언제나 십자가였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노래가 하나 있습니다. 정우가 부른 ‘철의 삶’이라는 곡입니다. 노래에는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내가 죽길 바라는 이 세상에서 이대로 사라질 때도 되었지, 라 생각해도. 당신, 녹슬면 끝이라 했지만 천 번을 두드리는 삶도 세상에는 있는 것이었다.”

철은 가열되고, 두들겨 맞고, 그렇게 모양새를 바꾸고. 또다시 가열되고, 다시 두들겨 맞으며 형체를 얻습니다. 세상은 비루한 지혜로 우리 삶을 두들깁니다. 천 번을, 만 번을 두드립니다. 복직 투쟁을 이어오며, 동지들이 경험했을 그 천 번들을 떠올립니다. 천 번의 추위와 천 번의 더위, 천 번의 눈물. 천 번에 천 번을 곱하는 그 절망을 어찌 감히 가늠하겠습니까.

“세상이 내가 죽길 바라는 것일까. 세상은 내가 이대로 사라지길 바라는 것일까.” 투쟁을 이어가며 가슴에 품었을 무수한 울분을 상상합니다. 아마 예수도 그렇게 곰곰이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세상이 내가 죽길 바라는 것일까. 세상은 내가 이대로 사라지길 바라는 것일까.” 그렇게 산화한 예수의 죽음을 이제 우리가 증언합니다. 비천하게 죽임당한 예수, 그의 십자가가 바로 하나님의 지혜를 보였다고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셨다는 것을 기억하며, 우리 이곳에 모였습니다. 어리석음의 힘을 믿는 우리는 이제 십자가의 자리에 머뭅니다. 내 안에 도사리는 세상의 지혜를 밀어내고, 농성장에 자리합니다. 아직 그 지혜를 밀어내지 못한 분이라면, 당신에게 따스히 찾아드는 주님의 은총을 겸허히 감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마음으로 서로를 붙들고, 진실되게 기도합니다. 세상의 비루한 지혜가 아무리 우리를 두드릴지라도. 천 번을 만 번을 두드릴지라도, 우리 부서지지 맙시다. 서로의 품 안에서 부서지지 맙시다.

이제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며 다만 기도합니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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