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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기도회

동서울터미널 "풀려나다" ㅣ 이민하 ㅣ 2025-07-10

by 이민하 posted May 03, 2026 Views 16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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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5-07-10

2025.07.10. 동서울터미널 임차상인 문제해결을 위한 기도회

 

"풀려나다"

누가복음서 13:10-17

 

오랜 시간 동안 투쟁을 이어오고 계신 상인분들, 그리고 거리에 나오신 여러분! 안녕하세요. 이토록 무더운 날에, 기도의 자리를 함께 지키는 분들이 계셔서 기쁩니다.

저는 동서울터미널 임차상인분들의 투쟁을 저희 교회 주보에 종종 실리는 소식으로 접했습니다. 기도회를 활자로만 접했던 것에 죄송한 마음을 갖다가, 지난달에야 예배에 참여해 보았습니다. 또, 상인분들이 어떤 이유로 투쟁을 시작하셨는지도 기사를 통해 부족하게나마 알아보았습니다.

제가 재개발 현장을 속속들이 알지 못합니다만, 개발이 이루어지면 그 공간에서 지내며, 거리와 건물을 가꾸고 돌보던 사람들이 늘 밀려난다는 것은 압니다. 건물주는 법의 비호를 받으며 사람들을 밀어냅니다. 실제로 법이 건물주의 이익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고, 법은 건물주에게 유리하게 해석되고 또 적용됩니다. 재건축 협상 전에 진행된 리모델링도 원래는 건물주의 몫이지만, 상인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돈을 들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법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시청과 같은 행정 기관은 자신이 감당할 일이 아니라며 갈등 상황에서 발뺌합니다. 무엇보다도 투쟁 현장을 향한 시선이 날카롭습니다. 재개발과 관련된 기사나 뉴스를 찾아볼 때면 이런 댓글이 반드시 있습니다. "주인이 나가라는데 왜 말을 안 듣느냐." 실은 이 한 마디에 모든 맥락이 삭제됩니다. 법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어떻게 해석되는지, 기관은 어째서 책임을 회피하고, 왜 누군가는 법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지 묻는 물음들은, "돈의 명령을 어째서 거역하는가?"라는 질타 속으로 속절없이 빨려 들어갑니다. 결국 다른 게 아니라 돈이 '법'입니다.

"어쩌겠어, 돈 없는 게 죄지. 힘없으면 그냥 수그리고 수긍하고 살아야지." 그렇게 체념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우리는 거리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집이든 상가든 그곳에 머물면서, 그 공간을 가꾸고 다듬는 사람들의 권리를 외치고 있습니다. 공간은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존재한다는 당연한 외침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자본이 아무리 무겁게 생명을 덮쳐오더라도 말입니다.

 

이제 성서가 전하는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어느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의 일입니다. 그곳에는 열여덟 해 동안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여성이고, 척추장애인이었습니다. 예수가 그를 불러 말합니다. "당신이 병에서 풀려났습니다." 그리고 예수가 그에게 손을 얹자, 그 사람이 곧장 허리를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회당의 지도자인 회당장은 이에 분개했습니다. 그의 불만은 예수가 안식일에 일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엿새 동안에 병을 고침 받고, 안식일에는 그러지 말라고 무리에게 엄포를 놓습니다. 예수는 그의 위선을 지적합니다. "당신들은 안식일에 소나 나귀에게 물을 먹이면서, 아브라함의 딸인 사람이 열여덟 해 동안이나 사탄에게 매여 있는데도 이를 풀어주지 말란 말입니까?" 그 말에 어떤 이들은 부끄러워했고, 어떤 이들은 이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했습니다.

흔히들 오늘의 말씀을 나눌 때, 예수의 자비, 동정심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예수보다는 다른 두 사람을 상상하려 합니다. 그는 바로 열여덟 해 동안 아팠던 사람과 회당장입니다. 누가는 두 사람에 대해 자세히 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야기의 배경을 살펴야 합니다.

이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유대 문화에서 안식일은 중요한 날입니다. 안식일은 주민뿐만 아니라 종, 나그네, 가축까지도 쉼을 누렸습니다. 신분과 계층에 상관없이 모두가 쉬었지요. 생명을 귀히 여기시는 창조의 하나님을 향한 고백이 안식일의 의미니까요. 하지만 약속이 제도화되면서 본질이 잊힙니다. '쉼'이 평안이 아니라 법칙이 되지요. 사람들은 엄격한 규율 속에서 안식일을 지겨야 했고, 개개인의 사정은 무시되었습니다. 쉬고 싶어도 쉴 수 없는 하층민은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지 못해 멸시받았습니다. 쉬고 싶어도 쉴 수 없는 사람을 위해 안식일이 생겼는데, 오히려 안식일 규정이 약자를 비난하고 판단하는 근거가 되어버린 겁니다. 예수는 자신의 사역을 통해 안식일의 본질을 되찾고자 했습니다.

한편, 우리는 이야기의 공간이 회당이라는 데에 주목해야 합니다. 공관복음서에는 예수님이 안식일에 치유 사역을 하는 일화가 여럿 등장합니다. 그러나 안식일에 '회당'에서 사역하는 일화는 많지 않습니다. 우선, 세 복음서에 공통적으로 실린 '손 아픈 사람' 치유 사건이 있지요. 흔히 '손 마른 사람'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치유된 사건입니다. 그리고 가버나움 회당에서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친 사건이 있습니다. 이 사건은 마가와 누가가 전합니다. 이 두 사건을 제외하면, 안식일에 회당에서 치유 사역이 일어나는 이야기는 오늘의 본문이 유일합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누가복음에만 등장합니다. 정리하자면, 세 복음서 중 안식일에 회당에서 일어난 사역을 가장 많이 전하는 복음서는 누가입니다. 예배, 교육, 모임 등 유대교 공동체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핵심 공간인 '회당'이 오늘 이야기의 배경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그럼, 이제 상상을 시작합시다. 열여덟 해 동안 아팠던 사람은 대체 누구이고, 그는 어째서 회당에 있었을까요? 글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그가 척추 장애로 오래 고생한 여성이라는 게 전부입니다. 중요한 내용은 아닙니다만, '날 때부터'라 명시된 것이 아니라 아팠던 기간이 적힌 걸 보면, 후천적으로 장애인이 됐을 듯합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회당에 있었던 이유는요? 모르긴 몰라도 예수 때문은 아닌 듯합니다. 보통 치유를 원해서 예수께 나아온 사람들에 대해서는 '예수의 소문을 듣고 왔다.'고 서술합니다. 혹은 본인이 먼저 치유를 요청하든지요. 이날은 안식일이었으니, 이 사람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회당으로 왔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겁니다. 이게 무슨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인가 싶으신가요? 저는 여기에 어떤 맥락이 숨겨져 있다고 봅니다.

유대교 회당은 성인 남성 10명이 모여야 합니다. 여성들 역시 안식일에 회당에 가기는 했으나, 회당을 주도하고, 또 참석을 기대받는 이들은 주로 남성이었습니다. 이러한 문화 속에서 장애여성이 안식일 날, 회당에 참석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갈 수는 있지만, 결코 본인을 위한 공간이 아닐 그곳에, 장애를 죄의 산물이라고 보는 시각이 팽배한 '그곳'에 갔다는 것 말입니다. 그 사람은 자신의 존재를 부정적으로 정의하는 공간에 묵묵히 나간 것입니다. 언제부터, 얼마나 오래 그랬을지 알지 못하지만, 그는 자리를 지켰습니다. 어떤가요? 이 사람이 과연 율법의 언어에 얽매여 있는가요? 저는 제도의 언어에 사로잡히지 않고, 다만 자기 자신으로 존재 투쟁하는 한 사람이 보입니다.

저는 예수가 이 사람을 알아보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그에게 다가와서 이렇게 말했지요. "당신이 병에서 풀려났다."고 말입니다. 예수는 그에게 손을 얹기도 전에 그렇게 말했습니다. 예수가 그를 알아본 것이지요. 그는 이미 억압의 언어에서 풀려나 있었다는 것을요.

이 이야기는 누가복음이 전하는 예수의 첫 사역과도 잘 맞아떨어집니다. 공교롭게도 예수의 첫 사역 역시 나사렛 회당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는 그곳에서 이사야의 말씀을 전합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포로들이 해방되고, 눌린 사람이 자유를 얻으며, 무엇보다도 '희년'을 선포합니다. 50년마다 돌아오는 희년은 단순히 매인 이들을 자유케 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희년은 그들에게 생산 기반을 제공하는 진정한 해방이었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누가복음이 전하는 예수의 마지막 회당 사역입니다. 열여덟 해를 앓았던 이가 병에서 풀려나는 기적이 해방의 전부일까요? 해방은 그것을 넘어서는 자유입니다. 여성이 경험한 해방은 단순히 병에서 풀려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지 못하게 겁박하는 권력에 사로잡히지 않는 자유를 얻었고, 그를 '아브라함의 딸'이라 불러주는 동지가 생겼습니다. 그를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이르는 예수의 말은 존엄, 존중이 담긴 선포 아니었을지요.

 

다음은 회당장입니다. 그는 예수의 행동에 말 그대로 '분개'했습니다. 율법주의가 아무리 유대인들 사이에 강하게 작동했다 한들, 랍비들도 괴물은 아니었습니다. 안식일에도 생명이 위급한 상황은 예외로 쳤지요. 예를 들어, 아이를 낳는다거나 하는 상황 말입니다. 그렇다면 회당장은 어째서 예수의 행동에 분노했을까요? 아마, 그의 생각에 열여덟 해 동안 앓았던 사람의 고통은 '생명이 위급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일 겁니다.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닙니다. 현상만 놓고 보자면, 그 사람이 죽을 위기에 처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에 우리는 다시금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물리적으로 위험에 처해 있을 때만 생명이 위급한 상황인가? 어떻게든 숨을 이어 나가면 그것은 괜찮은가? 생명을 살린다는 것을 고작 그렇게 좁은 의미로만 이해해도 괜찮을까요?

무엇보다 주목할 것은 회당장의 분노가 향한 곳입니다. 그의 분노는 열여덟 해 동안이나 고통을 받았던 사람의 괴로움을 향하지 않았습니다. 회당장은 그토록 오랫동안 신체적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이, 공동체 안에서 경험했을 배척과 멸시에도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만 엿새가 아닌 하루, 안식일에 분노했습니다. 열여덟 해가 아닌 하루에 분노했단 말입니다. 그는 그곳에 분명히, 선명히 존재하는 고통에는 무관심했고, 다만 규정을 지키지 않은 이에게 성을 냈습니다. 그것이 그의 선택이었습니다.

 

회당장과 아브라함의 딸, 그리고 예수. '뒤틀린 질서'를 풀어내는 이야기에서 저는 오늘의 투쟁 현장을 발견합니다. 자본의 논리는 모든 문제의 책임을 개인에 돌립니다. 생존권을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에게는 늘 '돈 욕심에 저런다.'는 꼬리표가 들러붙습니다. 건물주가 감당해야 할 리모델링 비용을 상인 개인들에게 미뤄놓은 기업에는 어째서 그런 꼬리표가 붙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의 분노는 투쟁하는 사람들에 몰립니다. "어째서 시끄럽게 구냐."는 것이지요. 임차인을 지켜주지도 않는 제도로 인해 사람들이 거리로 내몰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면서 말입니다. 제도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가당치 않은 일이고, 사람이 내몰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순리'입니까? 목숨을 부지하느라 관행을 따르는 것조차 고달픈 사람들에게 제도의 엄격성을 들이미는 행동은 예수 때에도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참으로 상스러운 분노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우리가 다시 '아브라함의 딸'의 찬양을 떠올리길 바랍니다. 그는 예수를 통해 기적을 경험하자마자 곧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그 영광스러운 일을 지켜보던 사람들 역시 함께 기뻐했지요. 본문 바로 다음에는 겨자씨와 누룩을 통한 하나님나라 비유가 등장합니다. 이토록 작은 이들이 돌리는 영광이 점점 자라가는 것을 표현하듯 말입니다. 겨자씨가 자라 새가 깃드는 나무가 되고, 누룩이 밀가루를 잔뜩 부풀게 하듯, 누가는 우리로 하여금 쉼과 먹임으로 생명이 자라나는 하나님나라를 마음껏 상상하게 합니다.

이들이 권력의 언어를 거스르고, 완전히 새로운 공동체를 꿈꿨듯이, 이제 우리도 하나님나라를 그립시다. 회당에 그저 같이 앉아 있는 것만으로 몫을 다했다 생각하지 않겠다는 다짐과 함께, 서로를 믿고, 하나님나라로 갑시다. 우리는 이미 풀려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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