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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성전으로 살아가는 우리 | 이원혁 목사 | 2025-10-19

by 이원혁 posted Oct 21, 2025 Views 167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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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5-10-19

창조절 일곱째주일

“성전으로 살아가는 우리”

(겔 47:1-12, 엡 2:14-22, 요 7:37-39)

 

이원혁 목사

 

 사랑하는 향린교회 교우 여러분, 반갑습니다. 저는 지난 2023년 10월 말에 처음으로 우리 교회에 아내와 함께 등록을 했고,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덕분에 작년 2024년 8월 18일에 미디어 담당 목사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드디어 오늘 이 하늘뜻펴기를 통해 여러분과 처음으로 교제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몇몇 분은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저는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보수 교단 소속 목사입니다. 현재 위탁교육을 받으며 교단을 옮기는 과정 중에 있기에. 아직 제 안에 보수 교회의 색채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제가 이 교회에 출석한 이후를 돌아보면, 지금 여기 앉아 계신 분들 중 절반 이상이 새교우이신 것 같습니다. 그중 다수는 기성교회에 계시다가 오신 분들이죠. 그래서 여러분이 우리 교회에서 겪는 당혹스러움이나 아직 적응되지 않는 부분들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기성교회는 장단점이 매우 뚜렷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보수교회일수록 교리가 상당히 탄탄합니다. 이 탄탄함이 성도들을 하나로 묶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만큼 지나친 신앙심과 배타적 특성으로 인해 율법주의적 태도를 보이게 되기도 합니다. 자기 나름의 신앙의 잣대로 “이건 맞아, 이건 틀려” 하며 재단하기 쉽고, 때로는 이것이 상처가 되어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교리를 중심으로 하나 되다 보니 목회자의 권위가 상대적으로 높아지기도 하지만, 목회자가 실수하면 교회 전체가 한꺼번에 무너질 위험도 있습니다.

 

 반면에 진보적 교회는 어떤가요?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고 수렴합니다. 배타적인 특성의 기성교회와는 달리 사회적 감수성이 훨씬 뛰어납니다. 기성교회가 때로 교리 안에 갇혀 교회 ‘안’에서만 빛과 소금이 되려 한다면, 진보적 교회는 매우 열심히 사회활동을 합니다. 우리 교회는 ‘아멘’ 소리보다 ‘투쟁’의 소리가 더 큰 교회이지요. 바깥으로 나가 더 많은 활동을 하고, 약한 이들의 아픔을 함께 돌보고 감싸 안고 공감합니다. 이것은 정말 큰 장점입니다. 다만 교리가 하나로 단단히 엮이기 어려워 서로간에 의견 충돌이나 다툼이 생기기도 하고, 말씀의 권위 자체가 많이 낮아진 탓에 성서 말씀에 관해 상대적으로 소홀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아직 보수교회의 결이 남아 있는 제 자리에서, 여러분 모두가 이미 알고 계시지만 잠시 잊고 살아온 신앙의 아주 기본적인 이야기에 대해 꺼내 보려 합니다.

 

 여러분, 많이 들어보셨죠? “하나님 나라는 가는 것입니까, 오는 것입니까?” 하나님 나라는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특히 기성교회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를 죽어서 가는 천국, 곧 가야 하는 ‘장소’로 생각합니다. 왜 이런 오해가 생겼을까요? 저는 하나님 나라를 우리가 사는 세상과는 전혀 다른 ‘공간’의 개념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죽어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장소 말이죠. 한국, 미국, 프랑스처럼 각기 다른 영토가 있듯, 하나님 나라도 어딘가 별도의 땅이나 공간이 있는 것으로 오해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영토의 개념이 아니라 통치의 개념에 가깝습니다. 성경에서 ‘왕/나라/통치하다’의 히브리어·헬라어 어근이 같은 뿌리라는 점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러니 ‘하나님 나라’는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통치 영역’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굳이 어딜 갈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면, 이 자리가 곧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 나라에 살고 계십니까? 우리 향린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 나라가 느껴지시나요? 개인적으로 우리 교회는 때로는 좀 이상하고, 때로는 너무 아름다워서 도깨비 나라(?) 같기도 합니다. 물론 농담이구요, 우리 공동체 안에서 서로 뜨겁게 사랑하고 섬기는 모습을 보면, 정말 우리 교회만큼 하나님 나라 다운, 하나님의 통치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교회도 드물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 그럼 이제 성서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작을 알려주는 창세기 1장 27절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고대 근동에서 왕은 자신의 통치 영역을 표시하기 위해 자신의 형상을 새겨놓은 조각상이나 경계석을 세웠습니다. 그런 배경에서 이 말씀을 다시 보면,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은 자기 통치 영역을 선포하신 것이고, 이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만들어갈 대리 통치자로 사람을 세우셨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 나라의 시작을 알리는 에덴동산의 모습은 성전과 아주 유사한 특징을 가집니다. 우리는 흔히 최초의 성전을 출애굽기의 성막으로 오해하지만, 성전의 본질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이라면, 에덴동산이야말로 최초의 성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 가운데 에덴이라는 특정한 장소에 거처를 정하셨고, 이곳에서 하나님은 사람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으며, 사람들은 하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그분과 함께 거할 수 있었습니다.

 

 또 창세기 2장 10절을 보면 “강 하나가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네 줄기로 갈라졌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이 되는 에스겔 47장의 환상을 기억하시죠? 성전의 동문에서 물이 흘러나옵니다. 이 구절에서 에덴을 ‘성전’이라는 단어로 치환하면 “강 하나가 성전에서 흘러나와…”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2장 12절에는 금과 향료, 보석의 언급이 나옵니다. 왜 갑자기 보석일까요? 출애굽기 25장 이하를 보시면 성막 제작에 온갖 보석과 귀한 재료가 동원됩니다. 최초의 에덴동산과 이미지가 겹칩니다. 무엇보다 2장 15절 “주 하나님이 사람을 데려다가 에덴 동산에 두시고, 그 곳을 맡아서 돌보게 하셨다”라는 구절은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경작하며 지키게 하셨다”라는 두 가지 동사로 번역되어 있는데, 이 동사는 민수기 3:7–8에서 제사장이 성소를 섬기고 지키는 것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어휘와 같습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본다면 성전을 관리하는 최초의 제사장은 아담과 하와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창세기 곳곳에서 에덴동산을 묘사하는 모습은 이후 건축될 성전의 성격을 짙게 풍깁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불순종으로 인해 사람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맙니다. 창세기 3장 24절을 보면 하나님이 에덴 동산의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칼을 두사 길을 지키게 하셨다고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힌트를 얻습니다. 에덴(성전)의 입구는 동쪽입니다. 성막과 성전의 모든 입구가 동쪽에 난 것처럼요. 성경에서 “동쪽으로 갔다/동쪽을 향했다”는 표현은 종종 성전으로부터 멀어짐, 곧 하나님과의 거리를 상징합니다. 가인이 동쪽으로 이동하여 애녹성을 쌓고(창 4:16-17), 후손들이 더 동쪽으로 이동하여 시날 평지에서 바벨탑을 쌓은 이야기(창 11:1-9)를 떠올려 보십시오. 이들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길을 택했습니다. 반대로 동쪽에서 돌아온다는 것은 하나님께 가까이 오는 표지이기도 합니다. 한편 24절의 그룹(케루빔)은 언약궤의 속죄소를 덮는 두 천사 형상과 연결됩니다. 성막의 금잔대가 ‘나무’처럼 묘사되는 것도 생명나무 이미지와 맞닿아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이 하나님께 범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지만, 하나님은 떠난 사람을 그대로 두지 않으시고 다시 성전을 지으셔서 그들과 함께 거하고자 하십니다. 출애굽기 25장 이하에서 성막 제작이 시작되고, 40장 34–38절에 성막이 완성되자 구름이 회막을 덮고 주님의 영광이 가득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깊게 살펴봐야 할 부분은 하나님이 성전에 임재하실 때 성서가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하는 부분입니다. 성서 전체에서 하나님이 임재하실 때에는 바람, 불, 구름, 지진과 같은 초자연적인 현상을 동반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왕국시대에 솔로몬이 건물 성전을 봉헌할 때에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열왕기상 8:10–11). 구름이 얼마나 빼곡하게 뒤덮였는지 제사장들이 서서 일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기원전 592년 에스겔은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우상으로 더럽혀진 성전으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겔 8–11장). 결국 기원전 586년에 남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며 성전은 무너집니다. 이것이 제1성전기의 끝입니다.

 

 70년 포로기 이후를 기록하고 있는 에스라 3장을 보면, 대제사장 예수아와 총독 스룹바벨에 의해 성전은 재건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제2성전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은 이 성전의 봉헌식 뒤에 구름의 임재를 기록하지 않습니다. 건물은 있는데 주인이 없는 집이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약 500년 뒤 헤롯이 성전을 대대적으로 증축하여 제2성전은 ‘헤롯성전’이라고도 불리우게 됩니다. 이제 예수님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주인이 없는 집에 주인이 오십니다. 바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사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오셔서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다”(막 11:17)고 책망하시고는 성전 밖으로 나가십니다. 그리고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일으키리라”(요 2:19) 하시며 자신이야말로 진짜 성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진짜 성전이신 예수님은 결국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하지만 부활과 승천 이후 예수님은 약속하신 성령을 사람들에게 보내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 강림 사건을 주의깊게 살펴봐야 합니다. 사도행전 2장 1-3절을 보면 오순절에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 위에 임하였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다시 성전에 들어오신 사건입니다! 곧, 우리의 몸을 성전으로 삼으시고 성령 하나님께서 집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이제 성전은 건물이 아니라 성도들 자신입니다. 바울은 “너희 몸이 성령의 전인 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6:19)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바로 성전입니다! 이 엄청난 사실을 의식하며 살아보셨습니까?

 

 이 깨달음 위에서 요한복음 7장을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37–39절, “명절의 큰 날에 예수께서 큰 소리로 이르시되 ‘목마른 자는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요한은 이것이 성령을 가리킨 말씀이라고 해설합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성전의 특징 중 하나가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물입니다. 에스겔 47장은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발목-무릎-허리-건너지 못할 강이 될 때, 나무가 우거지고, 그 잎사귀는 약재가 되며, 생명이 충만해지는 치유와 회복의 비전을 보여줍니다. 성령의 전이 된 우리에게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온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성전 환상과 동일한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성교회에서 즐겨 불렀던 복음성가 “물이 바다 덮음같이”(합 2:14; 사 11:9)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물이 바다를 어떻게 덮나요? 물도 바다도 물인데 말이지요. 성서의 물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생명을, 바다는 창세기 1장의 혼돈이나, 요한계시록 13장의 짐승이 올라오는 악과 무질서의 근원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물이 바다를 덮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세상의 악과 혼돈을 덮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의 물을 흘려보내는 통로가 바로 우리입니다. 여러분이 성전이기에, 여러분의 배—존재의 중심—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에베소서 2장 14–22절은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라고 선언합니다. 화평이 되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도 서로 화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휘장이 찢겨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길이 열린 지금, 성전이 된 교회는 성령 안에서 하나 되어 기도할 때 서로를 하나님이 거하시는 존재로 존중하게 됩니다. 여기서 저는 오래전에 선배 목사님께 들은 사례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어떤 교회에 건축 문제로 큰 분열이 생겼습니다. “이사하자”와 “이사하지 말자”로 완전히 갈라졌고, 한 치도 양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금요철야에 성도들이 모여 기도하는데, 갑자기 성도들 모두에게 성령이 임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신비 체험이라기보다는 어떤 마음의 깊은 깨달음이 임하고 많은 성도들이 회개의 눈물을 흘렸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주일에 다시 교회 이전에 관한 회의를 열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놀랍게도 입장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찬성은 여전히 찬성, 반대는 여전히 반대. 그러나 그들의 태도가 바뀌었습니다. 서로를 대하는 데 조심스러워졌고,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자각이 생겼습니다. 큰 소리가 사라졌습니다. 그 교회가 이사를 갔는지까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이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화평을 이루었다는 사실입니다. 성전됨의 회복은 곧 관계의 회복으로 드러납니다.

 

 이제 종말의 비전으로 가 봅시다. 요한계시록 21장 1–4절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여줍니다. “바다가 없더라”는 표현은 예수님이 갈릴리 호수를 지겨워 없애신 게 아니라, 앞서 말씀드린 악의 근원이 사라졌다는 뜻입니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하나님 나라는 결국 임하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의 완전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교회는 오늘 그 나라의 전초기지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전으로서 눈물의 현장에 생수의 강을 흘려보내야 합니다. 거리에서, 일터에서, 약한 이들의 곁에서 기도·연대·돌봄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지금 여기에 드러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나라는 “아픔이 전혀 없는 곳”으로만 묘사되곤 하지만, 저는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땅에서는 누구나 죽음과 아픔, 슬픔, 눈물을 경험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것들이 ‘전혀 없다’라고 생각하면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아픔이 아픔으로만 남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함께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동지들—교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굶주리면 오병이어처럼 십시일반 나눔이 일어나고, 그는 굶주렸어도 배고프지 않게 됩니다. 누군가가 슬픔과 고통 속에 빠져 있어도, 곁의 하나님의 사람이 일으켜 세우고 함께 울어주고, 공허를 채우려 애쓰는 사랑 속에 슬픔은 슬픔으로만 남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일구는 하나님 나라의 표지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성전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계속해서 성전을 지어가야 합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확장되는 길입니다. 오늘도 많은 이들이 아픔과 고통, 눈물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어제 팔레스타인 집회에 연대하신 교우들이 계셨고, 지금도 세종호텔 앞에서 고공농성 중인 분과 함께 여전히 고통을 함께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의 눈물을 닦을 능력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바로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의 강물, 곧 여러분이 흘려보내는 성령의 생수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각 사람에게 도전하십니다. 우리 잠시 눈을 감고, 귀를 열어 침묵 가운데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말씀을 조용히 듣겠습니다.

 

 

 

파송사

 

사랑하는 향린교우 여러분, 성령의 전이 되신 여러분, 평안히 가십시오. 

이 예배당 문을 나설 때 여러분 안에 성령 하나님이 거하고 계심을 잊지 마십시오. 

성전으로 살아가십시오. 성전 답게 살아가십시오. 

생명의 샘물을 흘려 보내어

우리 주변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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