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살전 5:14-24, 마 6:5-15)
장동원 목사
주님의 정의로운 평화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길 빕니다. 오랜만에 이 자리에 다시 섭니다. 작년 가을에 하늘뜻을 함께 나눴는데 그 사이에 제 신상에 변화가 있었지요. 지난 5월, 교우 여러분의 크나큰 기도와 지지, 응원에 힘입어 목사 임직을 하였습니다. 목사가 되고 우리 교회에서 처음으로 말씀을 전하게 되니 감회가 새롭고 영광입니다. 무한한 책임감을 느끼고요. 차분히 말씀을 읽고 기도하며 오늘 하늘뜻펴기를 준비했습니다. 바라기는 저의 나눔이 여러분에게 은혜와 도전의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작년 하늘뜻펴기 때는 그간 망우산에서 해온 자연묵상과 걷기기도를 사진과 함께 나누며, 세 본문 성서 말씀을 주석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영성 훈련에 대해서는 깊게 다루지 못했는데요. 이번에는 그 연장선상에서 제가 중요하게 여기는 ‘관상기도’ 훈련을 교우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 기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뜨겁게 기도하는 분들도 계실 것이고, ‘기도’라고 하면 왠지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분들도 계실 것 같아요. 특히 한국교회 지형에서는 통성 기도가 너무 일상화되어 있고, 개인의 성공과 축복을 위한 간구가 만연하다 보니, ‘기도’ 자체에 거부감이 들고, 편견을 가지기가 쉽지요. 물론 그러한 성공 지향적, 자본주의적 기도는 분명 잘못된 거 맞습니다. 하지만 기도 자체에는 죄가 없지요. 그보다 기도를 오염시킨 이들이 잘못이겠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기도를 구해낼 필요가 있습니다. 성공과 축복, 부흥과 성장으로 채색되고 오염된 기도를 구해내서, 예수 시대 때부터 이어져온 유구한 전통의 ‘기독교다운 기도’를 되살려야 하는 사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사실 통성기도의 역사는 길지 않습니다. 원래 기독교의 전통적 기도는 침묵기도이지요. 그리고 주기도문에서 알 수 있듯이 기도는 새로운 내용을 간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주어진 기도문을 반복해서 내면에 새기는 것에 가깝습니다. 특히 주기도문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도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지요. 저는 그래서 주기도문을 찬찬히 톺아보며 기도를 한번 구해보고 싶습니다. 우리는 보통 주기도문을 개역한글 변역본으로 많이 외워서 거기에 익숙한데요. 그런데 너무 습관적으로 (주문처럼) 기도를 빠르게 외우는 바람에 주기도문의 그 깊은 뜻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새번역으로 천천히 한번 외워보시길 권해드립니다. 그러면 낯설어서 뜻을 곱씹게 되고, 현대어 번역이 정확한 의미를 전달하여 그 뜻이 마음에 콕 박히는 경우도 있을 겁니다. 그럼 오늘 복음서 본문에 나온 새번역 주기도문을 교우 여러분과 함께 낭독해보겠습니다. 뜻을 하나씩 새기며 아주 천천히(이렇게 천천히 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그리고 의미 단위마다 잠시 간격을 두고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 이름을 거룩하게 하여 주시며, 그 나라를 오게 하여 주시며, 그 뜻을 하늘에서 이루심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주십시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내려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여 주십시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어떠신가요? 조금 새롭지요? 그리고 천천히 읽으니 그 의미가 잘 와닿습니다. 의미에 따라 주기도문을 크게 두 덩어리로 나눠보면, 주기도문은 첫째,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이루어 달라는 기도입니다. 둘째, 오늘 하루의 양식에 만족하지 못하게 하는, 그리고 타자의 잘못에 관대하지 못하게 만드는 모든 시험과 악으로부터 자유롭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체제는 끊임없이 우리의 탐욕과 편협함을 부추기지요. 주기도문은 그러한 사회적 악으로부터 벗어나길 간절히 바라는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석해보니 첫째와 둘째는 자연스레 연결됩니다. 즉 이 땅이 하나님 나라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사회구조적 모순 때문에 시험에 들지 않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개개인이 사회적 악으로부터 자유한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기도를 우리에게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뤄지길 간절히 고대하며 기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도 내용은 ‘성공, 축복, 부흥, 성장’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다림이 되어야겠죠. 이처럼 주기도문은 복음의 핵심을 드러내고 있기에 많이 되뇌면 되뇔수록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도문이 너무 길어요. 그래서 반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 기도문이 발전을 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대표적으로 ‘마라나타’가 있지요. 아람어로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재림 즉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간절한 소망이 담긴 기도인데, 이런 짧은 기도문을 쉬지 않고 되뇌는 것, 바로 그것이 기독교다운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서신서 말씀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개역개정 번역으로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이지요. 제가 작년에 아주 인상 깊게 들은 하늘뜻펴기가 있는데요. 바로 우리 성가대 김영민 집사님께서 설교 중에 “항기쉬말기범감”이란 기도문을 우리에게 나눠주셨습니다. 여러분 기억나시나요? 한번 따라 해볼까요. ‘항기쉬말기범감!’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를 줄인 김영민 집사님의 아주 훌륭하신 기도문입니다.(웃음)
저는 이 바울의 말이 참 좋습니다.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 사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창조의 원형이요, 하나님의 형상 그 자체로서의 삶입니다. 그런데 이게 가능하려면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삶이 꼭 필요합니다.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복음의 정수를 항상 기도하며 나의 가슴팍에, 심장에 새겨 넣어야 하는 것인데요. 이것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까요? 참 쉽지 않지요. 그래서 저는 이와 관련하여 동방기독교의 관상기도 전통인 예수기도를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 19세기의 한 러시아 순례자가 이 바울의 가르침을 접하고 끊임없이 수련하였는데, 『순례자의 길』이라는 책으로 이 기도여정이 우리에게 전해졌지요. 우리나라에서는 종교학자 오강남 교수님이 번역하셔서 『기도』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거기에 나오는 러시아 청년은 예수기도를 배우기 위해 이리저리 찾아다니다 큰스승님을 만나서 기도를 배우게 됩니다. 그 기도문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짧은 기도문이었습니다. “주 예수님,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더 짧게 축약해서 할 수도 있습니다. 러시아 청년은 이 기도를 처음에는 하루에 3천 번, 며칠 지나서는 하루에 6천 번, 그리고 또 열흘 뒤에는 하루에 1만 2천 번을 했다고 하는데요! 이 기도를 실제로 해보면, 아무리 빨리한다고 해도 10번 기도하는 데 1분 정도는 걸리니, 1만 2천 번 하는데는 1,200분, 적어도 20시간이 걸리는 겁니다. 잠도 별로 안 잤다고 하니, 정말 3-4시간 빼놓고 하루 종일 기도만 한 것입니다. 정말 쉬지 않고 하는 기도이지요. 이 기도를 하게 되니 나중에는 자면서도 기도하는 느낌이었고, 아침 일찍 기도가 잠을 깨웠다는 고백도 하게 됩니다. 이뿐만 아니라 마음은 한없이 평화로워졌고, 잘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도 가족처럼 사랑스럽게 여겨졌고, 잡생각이 사라지고 기도에 관한 열망이 가득 찼으며, 가슴속에 따뜻함이 자리 잡았고, 교회에서는 예배가 짧게 느껴질 뿐 아니라 예전과 달리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여러분도 제 하늘뜻펴기가 지루하지 않길 바랍니다.) 또한 청년이 살던 초라한 오두막은 화려한 궁전처럼 느껴졌다고도 합니다. 이러한 것들을 예수기도의 유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정서적‧영적 성장이 일어나는데, 특히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이해가 크게 바뀌게 되지요. 지금 이 순간, 이 공간에서 주님과 함께 머무는 것 말고는 더 바랄 게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이 러시아 순례자의 예수기도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앞에서 말씀드린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어떻게 하면 정말 내 마음판에 새길 수 있을까, 정말 각인시킬 수 있을까’ 그 방법을 깊게 나누고 싶어서입니다. 그럼 이러한 예수기도를 간단히 분석해 보겠습니다. 먼저 한번 같이 기도해볼까요? 네 호흡으로 기도할 건데, 먼저 한 호흡(들숨, 날숨)에 맞춰 기도하시고, 잠시 멈췄다가 다음 호흡에 기도를 이어가시면 됩니다. “주 예수(들숨) 그리스도(날숨) / 하나님의(들숨) 아들이시여(날숨) / 이(들숨) 죄인을(날숨) / 불쌍히(들숨) 여기소서(날숨).” 제일 먼저 나오는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 안에는 많은 열망이 담겨 있습니다. ‘마라나타! 주님 어서 오시옵소서. 이 땅을 하나님 나라로 만들어주소서’ 하는 지향이 드러나지요. 그리고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에는 이 죄 많은 사회, 자본주의라는 괴물이 만들어 놓은 구조악들, 구조적 모순과 폐해에서 허우적거리는 우리 모든 죄인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 자비를 베풀어 달라, 우리를 해방시켜 달라, 하나님 나라에서 머물고 싶다’는 열망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예수기도를 주기도문의 축약판이며 기독교적인 기도, 복음적인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기도를 구해내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하고 있는데요. 이제 제 경험을 짧게 나누면서 이 기도 훈련을 조금 더 구체화하고자 합니다. 저는 2020년 말부터 5년간 꾸준히 관상기도 훈련을 해오고 있는데요. 향심기도, 렉시오디비나, 예수기도 등을 훈련해오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저의 관상 훈련의 근간이 되는 향심기도를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 향심기도는 아주 간단한 관상기도 방법입니다. 관상이란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품 안에서 쉬는 것입니다. 뭘 애써서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현존하심과 활동하심에 고요히 머물며 나 자신을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바다에서 수영을 할 때도 긴장해서 힘을 세게 주면 가라앉잖아요. 그냥 힘을 ‘촤악’ 빼고 바다 위에 누워 있으면 그냥 뜨죠? 지중해 바다나 몰디브 바다를 상상해 보세요. 에메랄드 바다에 힘을 빼고 누워서 따스한 햇살을 맞으며 ‘축’ 늘어뜨리는 그 이미지. 그냥 가만있어도 너무 좋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너무 좋다는 느낌. 그렇게 하나님의 품 안에서 고요히 머무는 것 그게 바로 관상입니다. 그것을 훈련하는 것이 향심기도입니다.
방법은 간단합니다. 먼저 조용한 곳에 앉아서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며 30초간 침묵합니다. 그런 다음 거룩한 단어를 도입하는데요.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승복한다는 지향을 떠올릴 수 있는 단어를 선택하시면 됩니다. 예를 들어 평화, 주님, 예수님, 사랑 등 3음절이 넘지 않는 아주 짧은 단어를 고르시면 됩니다. 쉽게 말해서 그 단어를 떠올렸을 때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가 충만하다는 느낌, 내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느낌, 하나님의 품 안에서 푹 쉰다는 느낌이 드는 단어를 고르시면 됩니다. 저는 ‘주님’이라고 합니다.(하늘뜻펴기 말미에 기도 체험을 해볼 테니, 들으시면서 교우 여러분도 거룩한 단어를 하나 마음에 품으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거룩한 단어를 도입할 때는 아주 부드럽게 도입해야 합니다. 솜에 깃털 하나 올려놓듯 아주 살포시 올려놓는 건데요. 내 가슴에 따스함/몽글거리는 어떤 느낌이 드는데요. 비유로 하자면, 잉크 한 방울을 솜에 떨어뜨리면 ‘쏴악’ 퍼져서 모든 솜을 적시듯 나의 현존 모두를 가득 감싸는 느낌입니다. 그러한 상황이 되면 이제 그냥 가만히 쉬면 됩니다. 가능한 한 애쓰지 않고 하나님의 품 안에서 머무는 게 중요합니다. 기도하면서 초점을 맞추거나 뭔가를 움켜잡으려고 하지 않고 그냥 쉽니다. 그게 다입니다.
그렇게 20분 동안 침묵하는데요. 그러면 이제부터 지옥이 시작됩니다. 잡생각이 얼마나 많이 나는지…. 그동안 수백 번, 수천 번의 잡생각, 잡념 즉 분심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아까 먹었던 맛있는 음식이 생각나고, 내일 회사에서 해야 할 일들이 떠오릅니다. 심지어 평소에는 절대 생각 안 나던 기가 막힌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하고, 이미 로또가 되어서 세계일주를 하고 있는 등 갑자기 없던 상상력이 발휘되기도 합니다. 이렇듯 수많은 잡생각에 사로잡혀 기도를 망쳤다는 느낌이 들게 되지요. 하지만 그럴 때마다 거룩한 단어를 다시 아주 부드럽게 도입합니다. 그리고 다시 쉽니다. 처음 하는 분은 그 과정을 아마도 최소 수백 수천 번은 경험하게 될 겁니다. 관련해서 재미난 일화가 하나 있는데요. 미국의 트라피스트 수도원 토머스 키팅이라는 신부님이 이 기도를 창시했는데, 하루는 그분이 향심기도를 소개하는 피정을 인도했습니다. 그 피정에서 한 수녀님이 20분 내내 분심에 사로잡혔다며, 한 만 번 정도 거룩한 단어를 외쳤다고 키팅 신부님께 불평을 했다는 거 아니에요. 그랬더니 키팅 신부님이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수녀님, 아주 좋습니다. 만 번이나 하나님께로 돌아갈 기회가 있었군요.”
그렇습니다. 향심기도를 할 때 중요한 것은 20분 동안 그 자리에 앉아서 이 과정을 반복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기도가 성공했다 실패했다 그런 건 없습니다. 그냥 기도 시간에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잘 마치면 그것으로 성공입니다. 여기서 이 기도의 지향점이 보이죠. 이 기도는 기도하는 시간에 드라마틱한 효과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를 마쳤을 때 황홀감도 없고, 뭔가 성과도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실패감만 맛보게 됩니다. 관상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그냥 하나님과 함께 머무는 것이지, 그런 지점을 향해 지향해 나가는 것이지, 뭔가 목표를 잡고 초점을 맞춰 그것을 움켜잡는 기도가 아닙니다. 이것이 아주 세상의 방식, 자본주의의 방식과 다르죠. 세상은 끊임없이 뭔가를 소유하라고, 성과를 이루라고, 자극적인 것, 빠른 것들을 추구하게 만드니까요. 그래서 이 기도는 너무나 불편한 기도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꾸준히 해나간다면 분명 하나님의 방식, 복음의 방식에 가까워지리라 저는 확신합니다. 이 기도의 유익은 가랑비에 옷 젖듯이 아주 조금씩 일상의 초연과 평온이 늘어난다는 겁니다. 화와 분노가 줄어들고, 사랑과 감사가 늘어납니다. 아침에 눈을 뜰 때 찌뿌둥하고 졸리고 몸이 무겁고 오늘 하루는 또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부정적인 감정이 예전에 저한테 가득했다면, 이제는 아침에 눈 떠서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성경 말씀이 읽고 싶고, 오늘 새로운 날이 저에게 선물해 줄 일들이 기대가 됩니다.
향심기도뿐만 아니라 예수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관상기도의 핵심은 ‘현존감’입니다. 지금 여기 머문다는 거죠. 과거의 잘못을 후회하거나 미래의 일을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의 품 안에서 고요히 머무는 느낌, 그 현존감이 중요합니다. 예수기도를 쉬지 않고 되뇌는 것은 주문을 외우는 것이 아닙니다. 현존감을 가지며 고요히 머무는 것입니다. 향심기도의 지향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하심에 동의하며, 그것에 감싸인 채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러한 감각이 깨어나 매 순간 지속되는 상태, 즉 현존감을 지닌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말한 대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아니 세상이 이렇게 부조리하고 부정의한데 어떻게 기쁘고 감사한가요?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포인트는 존재론적 자각입니다. 불의한 구조에 맞서서 행동하지 말자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품에 온전히 머무는 현존감을 가진 채 운동하자는 겁니다. 패배주의나 냉소주의나 분노나 증오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한 채 주님의 빛으로 “아픔이 있는 곳, 그 세상의 중심”을 감싸자는 말입니다.
이런 영성을 위해서는 우리에게 실천적인 기도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 시간 짤막한 체험을 하나 해보려 합니다. 최근 한국샬렘영성훈련원에서 예수기도 강의를 8주간 들었는데요. 그 강의에서 감리교의 이민재 목사님이 ‘관상적 리추얼(의례)’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기도나 향심기도 같은 관상기도를 하기 전에 이 의례를 5분 정도 꾸준히 훈련하면 현존의식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몸 – 어둠 – 숨 – 침묵’ 총 4단계로 이루어져 있는데, 먼저 몸을 바로 하고, 그다음 눈을 감고 어둠에서 주님의 찬란한 빛을 발견하고, 이어서 숨을 고르며 성령님의 숨결을 느끼고, 마지막으로 침묵 속에서 주님의 현존을 온전히 느끼는 것입니다. 제가 인도를 할 테니 5분 정도 관상적 의례에 머물러 보신 뒤, 3분간 깊이 침묵 속에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때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예수기도를 하셔도 좋고, ‘평화, 주님, 사랑’ 등 거룩한 단어를 하나 정하셔서 향심기도를 하셔도 좋습니다.
이제 분주한 마음을 내려놓고 몸과 마음을 가다듬습니다. 먼저 자세를 바르게 하고 조용히 눈을 감습니다. 허리를 바로 편 채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자신의 몸을 마음의 눈으로 쭉 따라가며 바라봅니다. 긴장된 부분이 있으면 잠시 멈춰서 몸을 부드럽게 풀어줍니다. 기도할 때 대개 양미간을 찡그리는 경우가 많은데, 입가에 미소를 살짝 띠면 미간이 넓어집니다. 그런 다음 손은 허벅지 위에, 위를 향해 손이 열려 있는 상태로 사뿐히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무릎은 어깨 넓이만큼 벌리고 발은 바닥에 11자 모양으로 딱 붙입니다. 이렇게 자세를 잡는 동안 벌써 내 안에 변화가 시작됩니다. 기도가 시작됩니다. 잠시 내 몸 전체를 바라봅니다. 바로 나의 몸덩어리가 하나님의 집이요 성령의 전입니다. 우리 몸은 세례를 통해 성령이 날인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이 몸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몸은 결코 부정한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것입니다.
다음 단계로 어둠을 주시합니다. 눈을 감고 나니 내면에 어둠이 펼쳐지지요. 거기에는 아주 깨알 같은 점들이 색색깔로 떠다니는데 밤하늘에 떠 있는 별 같기도 합니다. 이렇게 내면의 우주를 바라보며,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은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신성한 빛이요 찬란한 빛입니다. 영성가들은 그것을 찬란한 어둠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어둠은 하나님께서 내 안에 현존한다는 하나의 표지입니다. 그렇게 어둠에 둘러싸여 계신 하나님을 잠시 묵상합니다.
이제 천천히 숨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숨을 두 번 들이쉬고 내쉽니다. 우리가 들이쉬고 내쉬는 이 숨은 하나님의 속성과 똑같습니다. 숨과 하나님은 어느 곳에나 어느 시간에나 우리와 함께합니다. 그러므로 숨은 하나님입니다. 이 숨이 끊어지면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가까운 숨을 여태까지 소홀히 대해왔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늘 멀리 계신 분이 되고 맙니다. 이제 숨을 깊이 주시합니다. 다섯 번 천천히 들이쉬고 내쉬면서 내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신 하나님께 마음을 엽시다.
자세를 바르게 하고 내면의 어둠을 바라보고 호흡을 주시했더니 나를 둘러싸는 침묵이 더욱 잘 느껴집니다. 지금 여러분이 있는 그 공간에 가득한 침묵과 고요를 느껴보십시오. 그 침묵이 나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침묵 안에서, 침묵과 함께, 침묵을 통하여, 침묵처럼, 아니 침묵으로 현존하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침묵으로 지금 나와 함께 하십니다. 침묵 속에 푹 잠기면서 마음속으로 ‘주님,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 하시거나 ‘평화, 사랑, 예수님’ 등 거룩한 단어를 떠올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현존 속에 잠시 머물겠습니다. 3분간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어떠셨나요? 아직은 낯설겠지만, 그래도 조금 고요해지며 마음이 편안해지지 않으셨나요? 한번 꾸준히 훈련해보시기를 권합니다. 기도할 때 졸리거나 딴생각이 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도는 엉덩이로 하는 것입니다. 매일 같은 시간 기도의 자리에 앉아 있으면 그 기도는 성공한 기도입니다. 기도 훈련을 하고 싶으시면 저에게 연락주십시오. 최대한 도와드리겠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길 간구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간구를 쉬지 않고 하라고 했습니다.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고, 지금 여기 이 순간 그렇게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 봅시다. 우리의 세력은 지극히 미약해 보이고 한 줌도 안 되어 보일지 모릅니다. 나 혼자 하나님의 현존 속에 머물며 하나님 나라, 그 평화의 나라, 정의와 생명이 샘솟는 그 나라에 살아가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이 세상의 99%는 여전히 자본을 숭배하며, 폭력과 불의를 쏟아내고 있으니까 말이죠. 그러나 아닙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우리의 시간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에게는 천년이 하루이고 하루가 천년입니다.(벧후 3:8) 유한한 우리는 ‘지극히 작은 인원밖에 없다, 지극히 오래 걸릴 것 같다’는 불안에 휩싸이지만, 사실 무한한 하나님의 시간과 공간 안에서는 오늘 이 시간 하나님 안에 현존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자본이라는 옥에 갇힌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사랑 그 자체이시며, 평화 그 자체이신 하나님의 품에 안겨 그분과의 일치 속에서 거룩한 하나님 나라를 시작합시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실 것입니다. 잠시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에 자신을 의탁하십시오. 넘실거리는 파도에 몸을 맡기며, 하나님의 품 안에서 고요히 머무십시오. 현존감으로 충만한 채 쉬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기쁨과 감사함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십시오. 그렇게 자유인으로 살아 가십시오. 자본이라는 옥에 갇힌 우리 죄인들을 주님께서 불쌍히 여겨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