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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너머의 당신에게 ㅣ 이민하 ㅣ 2025-06-01

by 이민하 posted Jun 01, 2025 Views 185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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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5-06-01

선택 너머의 당신에게

(행 16:16-34, 계 22:12-14, 16-17, 20-21, 요 17:20-26)

2025.07.01. 부활절 일곱째주일

 

[우리가 잃은 것]

안녕하세요, 교우 여러분. 부활절의 마지막 주에 인사를 드립니다. 앞에 서는 일은 늘 떨리지만, 목사 안수를 받고 여기 서니 마음이 더 복잡합니다. 이 길의 시작도, 지금도 제게 온전한 확신은 없지만, 안수를 받고 나면 한 챕터를 마쳤다는 안도가 클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남는 것은, 스톨을 걸어주며 멍에를 메어주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는 선배 목사님의 말씀입니다. 시간이 흐르더라도 제게 주어진 몫을 가벼이 여기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한문덕 목사님께서 하늘뜻 날짜를 선택할 기회를 주셨을 때, 6월 1일을 선택했습니다. 안수 전으로는 도저히 시간이 나지 않을 것 같아서였습니다. 그런데 날을 잡고 보니, 이때가 대선 전 주일이었습니다. 의도한 것은 아닌데, 하필이면 오늘 하늘뜻 제목에도 선택이라는 단어가 들어갑니다. 제가 짐을 지겠다고는 했지만 이렇게 큰 짐을 질 생각은 못 했습니다. 오늘 하늘뜻이 영 시원찮으시더라도, 새내기 목사의 떨림과 서투름이었겠거니, 하고 이해해주시길 부디 바라봅니다. 또, 광장에서 수많은 시민이 외쳤던 민주주의와 평등이 실현되기를 기대합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나라임을 믿습니다.

삶은 크고 작은 선택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그간의 선택을 돌아볼 때, 만족하기도, 또 후회하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삶은 선택만으로 이루어져 있지는 않지요. 우리는 택하지 않은 것들을 감내하며 인생의 길을 갑니다. 무수한 선택들과 또 선택하지 않은 것들 틈바구니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놓칠 때도 있습니다. 무언가를 놓친 것 같기는 한데, 그게 대체 무엇인지를 모를 때도 있지요.

윤동주는 자신의 시, ‘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인생의 길에서 우리는 무엇을 놓쳤을까요? 선택과 선택 사이, 우리가 잃은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

오늘 사도행전 16장 16절에서 34절 말씀은 바울이 2차 선교여행 중, 한 여종과 간수를 만난 이야기입니다. 2차 선교여행 초반, 소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던 바울은 어느 날 ‘마케도니아 사람’이 자신을 도우러 와달라는 환상을 봅니다. 이 환상은 바울의 방향을 소아시아가 아닌 마케도니아로 이끕니다.

마케도니아는 바울 일행에게 익숙한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소아시아에는 유대 디아스포라가 자리 잡아 회당 중심의 전도가 가능했지만, 마케도니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특히 그 첫 행선지인 빌립보는 로마의 식민지로, 로마의 색채가 아주 강했습니다. 빌립보는 기원전 42년, 빌립보 전투라는 로마의 대규모 내전 이후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이후 대규모 퇴역 군인들이 정착했고, 도시는 로마의 계획에 따라 빠르게 변해갔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로마 시민과 현지인 사이에 긴장을 심화했을 것입니다. 식민화 과정에서 몰락하여 노예로 전락하는 현지인도 많았을 테지요. 당시 빌립보에는 빈민층이 20%, 노예가 20%였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 빌립보에 온 것입니다. 유대 문화가 소수 문화이고, 로마의 엄청난 압제가 체화된 도시에서 ‘새 시작’을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일까요? 사도행전 1장부터 16장에 이르기까지 지칭어를 3인칭으로만 쓰던 저자가 마케도니아 환상을 기점으로 ‘우리’라는 지칭어를 쓰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이전까지는 ‘바울이’, ‘그들이’ 등으로 쓰였던 지칭어가 ‘우리가’가 된 것입니다. 물론 이 ‘우리 본문’에서도 인칭은 번갈아서 사용됩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습니다. 저자가 선교여행에 직접 참여했다, 적어도 목격은 했다, 혹은 문학적 장치이다, 등. 무엇이 정답이라고 명확히 이를 수는 없습니다만, 저자가 말하는 ‘우리’라는 단어에 어떤 힘이 실려있음은 분명합니다. 익숙하지 않은 문화에서, 바울 일행 스스로가 이방인이 되는 상황에서, 신앙공동체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여 안정감을 느끼고 싶었는지도 모르지요. 선교지에서 '우리'를 하나, 둘 늘려가는 기쁨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우리’의 바깥]

이제,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빌립보 여행을 다시 읽겠습니다. 바울 일행은 '우리'를 꿈꾸며 빌립보에 옵니다. 16장 빌립보 여행에서 바울이 만난 주요 인물은 세 명입니다. 이야기의 앞과 뒤를 장식하는 이는 루디아와 간수이고, 그 사이 어딘가에 여종이 있습니다.

빌립보에 등장한 바울 일행은 복음을 전할 사람을 찾습니다. 이전처럼 회당을 찾고자 했으나, 빌립보에는 유대 문화가 안정적으로 정착하지 않은 상황이었는지 회당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성문 밖으로 향하지요. 그리고 어느 강가 기도처에 모인 여성들을 발견합니다. 이들과 함께 있었던 사람이 바로 루디아입니다. 두아디라 출신의 자색 옷감 장수인 그는 바울의 말을 듣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줍니다. 심지어 루디아는 자신의 집을 이들의 거처로, 예배 장소로 내어주기까지 하지요.

간수의 일화 역시 흥미롭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부당한 풍속을 선전한 죄’로 고발 당한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갇히지요. 이때 지진과 함께 모든 죄수가 풀려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죄수들을 지키는 데에 책임이 있는 간수는, 이들이 달아난 줄 알고 목숨을 끊으려 합니다. 그것을 막은 이가 바로 바울입니다.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하고 경이로운 사건에 놀란 간수는 바울과 실라에게 구원을 묻고, 복음을 받아들입니다. 이때 간수는 상당한 위험을 감행합니다. 죄인 신분인 바울과 실라를 감옥 바깥으로 빼내고, 심지어는 자신의 집에 초대하기까지 합니다. 어쩌면 어느 퇴역 군인이었을지 모를 간수는 빌립보에 와서 ‘부당한 풍속’을 선전하는 외국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 것입니다.

바울 일행이 사역의 시작에는 이방인 여성을 만나고, 또 그 끝에는 로마의 권력에 봉사하는 간수를 만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이 말하듯,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이 유대와 사마리아, 땅끝까지 이른다는 말씀이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접점 하나 없던, 서로가 서로에게 낯선 이들이 ‘우리’가 된 것이지요. 루디아와 간수의 열심과 노력은 가히 신도가 될 자격이 있어 보입니다.

그런데 빼먹은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하늘뜻을 시작할 때 말씀드렸듯, 오늘 본문은 바울 일행이 여종과 간수를 만난 이야기입니다. 저자는 여종의 이야기를 어떻게 전하고 있을까요?

우선 여종에 대한 소개가 필요합니다. 그의 신분은 노예로, 주인이 하나도 아니고 여럿이었습니다. 그는 점을 치는 사람으로, 주인들에게 큰 돈벌이를 해주었습니다. 바울 일행은 기도처에 가던 중 이 여종을 만납니다. 그런데 대뜸, 이 사람이 무언가를 외치기 시작합니다. 그 외침은 바울 일행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이들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들이고,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전하고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외침은 몇 날 며칠 이어집니다. 그러니까 바울 일행의 활동 내내, 그들을 따라다니며 외쳤다는 것이지요. 모르긴 몰라도, 여종의 외침은 바울 일행의 계획에 차질을 주기도 했을 겁니다. 결국 견디다 못한 바울은 그 여종에게서 귀신을 빼냅니다.

언뜻 들었을 때, 이 이야기는 일반적인 축귀 사건처럼 들립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종의 이야기는 누가복음의 거라사의 귀신 들린 이를 상기시키는데요. 여종과 거라사 사람은 모두 ‘외치는 사람들’입니다. 여성의 외침은 원어로 κράζω(크라조)이고, 거라사 사람의 외침은 그 앞에 접두사가 붙은 단어, ανακράζω(아나크라조)입니다. 이 단어는 복음서에서 귀신 들린 이 등의 영적인 존재들이 말할 때 사용됩니다. 그래서 여종의 이야기가 축귀 사건이라 말하는 데 무리가 없어 보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브라질의 신학자 리히터 라이머는 자신의 책 『사도행전의 여성들』에서, 사도행전의 저자가 이 단어를 ‘사람’이 주어일 때 주로 사용했다고 말합니다. 이는 여종의 외침을 단순히 귀신 들림으로만 해석하기보다, 그 속에 담긴 목소리와 메시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음을 시사합니다.

또, 바울의 행동은 선교적 실천으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착취자로부터 여종을 자유케 했다는 것이지요. 이 사건 직후, 바울은 여종을 착취하던 주인들에게 ‘부당한 풍속을 선전한 죄’로 고발을 당합니다. 물론 그건 명분에 불과했고,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이 침해당하자 분개한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여종은 착취를 당하고 있었으니, 이는 그럴듯한 해석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본문을 아무리 여러 번 읽어도, 저는 바울의 행위가 여종을 해방하기 위함이었다고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그를 며칠이나 버티다 귀찮아서 행동을 개시했습니다. 그는 여종이 ‘성가셨’습니다.

‘구마 당하여 사라져 버린 이’라고 하기에는, 여종의 삶에는 무수히 많은 맥락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는 그것을 상상하고 추측할 뿐이지만 말입니다. 그는 점을 쳐서 주인들에게 돈을 벌어다 주는 사람입니다. 노예에게도 일정의 자유는 있었을 수 있으나, 그가 몇 날 며칠 바울 일행을 따라다니며 그들에 대해 증언하는 행동은 여종에게, 정확히 말하자면 그 주인들에게 좋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점을 치는 행위는 주인들의 명령에 의한 수동적 행위였을지 모르나, 이 외침에는 그의 적극성이 비친다는 것입니다. 여종의 외침은 그의 '단독 행동'이었습니다. 이것은 어떤 강렬한 끌림이었다고 보는 게 더 맞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자신의 의지로 진실을 외치고 있었습니다.

저는 탈식민주의 페미니즘 신학자들이 주장했듯, 이 여성은 침묵을 당했다고 봅니다. 민중신학자 김진호는 자신의 저서 『리부팅 바울』에서 빌립보라는 도시의 특성과 여종의 능력을 연결 지어 설명합니다. 빌립보 전투와 식민화 과정을 통해 도시에 쌓인 트라우마가 전혀 극복되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살육의 기억, 빼앗긴 기억, 착취의 기억이 쌓인 공간에는 점술이 흥할 수밖에 없고, 그렇기에 '영적 도구'로 착취당하는 노예가 많았으리라는 게 김진호의 상상입니다. 여종의 주인들은 트라우마 그 자체인 인간을 자원 삼은 것이지요.

어느 모로나 여종의 삶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이 고달팠습니다. 그는 여성 노예였고, 경제적 도구로 착취당했고, 종교적 도구로 착취당했습니다. 그가 존재하고 움직이는 이유 자체가 철저히 주인을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외친 행위'도 그가 '도구'로서 움직인 것이었나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외침이었습니다. 도시의 트라우마와 체화하고, 가장 낮은 자리에서 억압을 당해온 사람, 살육의 시간을 지나온 사람이 진리를 외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외침은 '우리'가 되지 못했습니다. 로마의 식민지에 온 선교사들이, 두아디라에서 온 여성 상인과 빌립보의 간수인 퇴역군인은 품어주었지만, 진리를 울부짖었던 어느 여성 노예는 지나치고 만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말한 “남종과 여종이 예언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은 여기서 무너집니다. 감옥의 문이 열리고 모든 수갑과 차꼬가 풀리는 장면은 누구에게나 해방이 주어지리라는 메시지를 전하지만, 여종에게는 그것이 닿지 않았습니다.

모든 매인 것이 풀리는 순간에도, 여전히 풀려나지 못한 사람. 선택지에도 오르지 못한 사람. 그러나 선택의 바깥에 분명히 존재했던 사람. ‘우리’가 되지 못한 사람. 이제 그들의 외침을 들어야 할 때입니다.

[‘그들’과 하나 되기]

긴 이야기를 지나, 이제 요한공동체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의 고별 설교 후 드리는 마지막 중보기도입니다. 죽음을 앞둔 예수께서 남기신 이 기도에는 '그들'이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처음엔 제자들을 가리키던 '그들'이, 오늘 본문에서는 제자들 너머까지 확장됩니다. 예수는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그들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하여 빕니다.”

이 기도는 단지 당시의 제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선택된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닌 사람들, ‘그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됨'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예수가 하나이듯, 우리도 서로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우리와 그들을 넘어,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의 마지막 기도입니다.

예수의 마지막 기도는 단지 관념적 이상이 아닙니다. 요한 공동체는 영지주의와의 갈등 속에서 분열을 경험했고, 유대 회당에서 추방당하며 외부로부터 배척받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 고립의 시간 속에서, 이 기도는 자기의 정체성을 새롭게 구성하고, 하나님나라 공동체를 그리는 상상입니다. 또한, 예수의 기도는 모두를 향한 선언이자 위로이기도 합니다.

이 기도는 지금 우리의 자리에서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우리는 ‘그들’과 하나 되기를 계속해서 꿈꿉니다. 하나님나라는 지금 이곳, ‘하나’를 꿈꾸는 자들 가운데에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마지막 외침]

이제 우리의 기도를 지어갑시다.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장에서 들려오는 음성은 우리를 ‘생명’으로 초대합니다. 로마 제국의 끝없는 폭압에 ‘새 세상’을 꿈꾸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던 저자의 고백은, 오늘날 우리의 고백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하나님나라 고백을 듣는 사람도, 목이 마른 사람도 주님의 생명을 거저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알파며 오메가, 처음이자 마지막이고, 시작이며 끝입니다. 시작부터 끝에 이르는 모든 시간에, 새 세상을 꿈꾸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빌립보 여행의 처음과 끝, 그 사이에 분명히 존재했던 여종을 잊지 마십시오. ‘사이’에 있는 이들의 소리를 놓치지 마십시오. 거저 받는 생명의 물조차 받지 못한 이들을 끊어내지 마십시오.

선택 너머의 당신에게 외칩니다. 새로운 꿈에는 선택된 이들이 없습니다. 자격에 따라 꿈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목마른 자, 외치는 자에게 하나님나라가 ‘거저’ 주어집니다. 예수께서는 선택 너머의 당신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렇다. 내가 곧 가겠다.” 예수께서 당신에게 가십니다. ‘우리’ 안에 머무르지 않고, 선택 너머의, 저 바깥의 당신과 하나가 되겠다고 하십니다.

저 또한 당신과 하나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당신과 함께 다시 오실 예수를 열망하고, 하나님나라를 살아내며 외치겠습니다.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선택 너머를 보십시오. ‘우리’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 기울이십시오. 삶의 무수한 선택들 사이에 비스듬히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이와 함께 외치십시오. 각자의 선택이 놓치고 잃어버렸던 이들과 하나 되는 꿈을 꿀 때, 예수의 음성이 우리에 더 가까워집니다. “그렇다. 내가 곧 가겠다.”

이제 우리, 하나 되어 고백합시다.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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