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05. 16.
동서양을 물을 것 없이 대학의 본뜻은 바탈을 찾는 데 있다. 그러나 오늘날 대학 교육이 그러냐 하면 아니다. 점점 갈라져 나가 서로 끄트머리로 나가는 것이 대학 교육이다. 지금은 제 전문하는 부분 이외에 대하여는 서로 무식장이다. 부분적으로 발달하는 것은 좋으나 전체로서의 종합, 하나됨은 잃어졌다. 지금 대학 교육을 아무리 받아도 이 사회에 적응해 나가는 지혜를 조금도 갖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특수한 부분적인 지식은 있건만 지혜는 없다. 이것은 본래 희랍의 학문이 그런데다가 문예부흥 이래 발달하는 과학의 영향이 더해서 점점 그렇게 된 것이다. 거기서는 현상계에 대한 견문(information)을 넓히는 것이 목적이지 그 현상의 뒤에 무엇이 있나가 문제 아니다. 그러한 현상에 대한 지식이 아무리 늘어도 그것이 현상을 다스릴 수는 없다. 뵈는 것은 뵈지 않는 것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동양의 생각은 그 뵈는 것보다 뵈지 않는 것을 더 문제삼았다. 그러므로 과학은 발달 못하고 철학 종교가 그 문화의 주장이 됐다. 과학이 발달 못하고 현상의 세계를 경시한 죄로는 이른바 아시아적인 사회가 돼버려 서구 나라의 식민지가 돼버리는 불행을 당했지만 지금은 인류의 역사를 끌고 나가던 그 서구주의가 막다른 골목에 들어갔고 지식을 넓히는 주의의 교육은 사람을 불행하게만 만들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어 대학 교육은 그 학풍이 완전히 변해야 할 것을 느끼고 있다.
그럼 학풍이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 그것은 이 세대 자체가 전개시켜 나갈 것이요, 어느 개인이 플랜을 그려서 될 것은 아니지만 사람은 역사적 존재인지라 학풍을 변하려 할 때에도 전혀 새 것을 갑자기 시작할 수 없을 것이다. 역시 전번 문예부흥 모양으로 지금까지 나가는 길이 아닌 다른 어떤 길에서 찾아보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이 요새 동양 소리가 차차 높아가는 까닭이다. 그런데 그 동양 학풍의 특색이 무엇이냐 하면 밖이 아니고 안을 찾는 것, 지식이 아니고 지혜를 찾는 것, 듣고 보는 것을 넓히는 것이 아니라 성질이 달라지는 것(transformation)을 문제 삼는 일이다. 그것을 기질의 변화라 했다. 혹 깨달음이라, 해탈이라, 새로 남이라 한다. 대학 교육의 목적은 기질의 변화에 있어야 할 것이다. 변화란 현상계에서 하는 말이지 참의 세계에서 바탈을 찾음이다. 복명(復命)이다. 돌아감이다. 회개다. 이 물질의 지배를 받는 현실의 사람은 그 도를 아무리 높여도 그것은 현상이 복잡해졌을 뿐이지, 그것을 외계의 지배를 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사람은 어디까지나 썩어질 사람이지 생명이 아니다. 과학이 발달하여 장생불사하는 법을 발견한다 해도 그것은 참 생명은 아니다. 참 정신을 찾지 못하는 한은 과학이 발달한다 해도 죽음을 이기지는 못할 것이다.
함석헌, <함석헌 전집 4,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한길사, 1988. 2. 20. 제7판 발행), 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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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많은 지식정보가 있어도 그것으로 성숙한 인격을 만들어낼 수 없다면,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이랴!
인공지능은 묻는 말에 온갖 대답을 쏟아 놓지만,
그 답들이 참된 삶으로 이끌 수 없다면 그 또한 무용지물일 뿐이다.
밖이 아니라 안을 찾는 것!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매우 중요하다.
결코 잃어서는 안 된다.
참 삶을 살아가려면
정보(information)보다는 변혁(transformation)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
- 향린 목회 559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