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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나눔

역설의 변주

by phobbi posted Oct 16, 2025 Views 226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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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5-10-16

2025. 10. 16.

 

삶은 왜 늘 불안한 걸까요? 어느 때보다 자유롭고 풍요롭게 살면서도 우리는 왜 고독과 허무 그리고 우울로 아파하는 걸까요? ‘신의 죽음으로 일컬어지는 큰 이야기의 종말,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절대적인 자유의 시대, 그러나 그것은 왜 행복이 아니라 불안으로 덮쳐 올까요? 모든 길을 혼자 더듬어야 하고, 모든 끝을 홀로 짊어져야 하는 절대적인 고독의 형벌로 말입니다. “모든 길을 허락한다. 그러나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두려우면서도 그리워지는 나다운 삶,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방황의 골은 꼬리를 물고 깊어지기만 합니다. 현기증 나는 자유, 이것이 죽음을 살아가는 우리 실존의 벌거벗은 얼굴입니다.

 

불안을 잊기 위해 우리는 일상적인 삶에 깊이 빠져들기도 하고, 타인의 욕망을 흉내 내면서 잘 살고 있다고 속이며, 아니 속으며 살고 있습니다. 삶의 감각이 마비된 기계인형처럼 세상이 정해 둔 궤도를 무한히 따라 돌거나, 타인의 가면을 쓰고 남들의 인생을 연기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눈을 감거나 달아난다고 해서 불안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실존의 불안은 내 밖에서 쫓아오는 기묘한 괴물이 아니라 내 안에서 출몰하는 잊힌 나의 부름이기 때문입니다. 생존에 탈진한 어느 깊은 밤, 불현듯 밀려드는 무의미의 심연이나, 치열하게 달린 삶의 황혼 녘, 노을처럼 내려앉는 자기상실의 고통은 죽음보다 더 큰 절망으로 다가옵니다. 모든 것을 얻고도 빈털터리가 되어 버린 삶, 그것이 우울의 근원입니다. “도대체 이것도 삶이란 말인가?”

 

누군가는 무의미한 삶의 고통(부조리)무의미의 긍정이나 의미의 무의미로 풀기도 합니다. “삶에는 반드시 의미가 있어야 하는가?” “의미를 위한 삶, 너무 거창하고 무겁지 않은가?” “그것은 무의미한 삶이 지은 환상이 아닌가?” 삶에 특별한 의미가 없어도 좋다면, 무의미한 삶도 그리 허무하지 않다고, 그럭저럭 살 만하리라고 여기는 까닭입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삶의 부조리를 견디려는 논리적인 저항이자 무의미를 삶의 의미로 새기려는 모순적인 시도입니다. 물론 의미는 앎이 아니라 믿음의 문제지만, 그런 겉멋든 달관은 죽음보다 못한 삶의 순간에 침몰하고 맙니다. 그것은 한가하고 권태로운 대낮의 철학입니다. 진지한 철학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대답 없는 물음에도 소진되지 않으면서, 무의미한 고통조차 삶의 일부로 끌어안을 용기의 뿌리를 말입니다.

 

그래서 이 강의는 죽음을 살아가는 인간이면 묻지 않을 수 없는 물음으로 시작합니다. “한 번만 주어진 되돌릴 수 없는 삶,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상투적인 물음으로, “나는 왜 없지 않고 있는가?”라는 철학적인 물음으로 이어집니다. “없어도 좋을 있음이라면, 왜 굳이 있는가?” “굳이 있다면, 그 이유와 목적은 무엇인가?” “나는 존재하는가?” 우리는 흔히 없었던없어질을 망각하고 살아갑니다. ‘잠시 있음일 뿐인데, ‘영원히 있음으로 착각하면서 말입니다. 시간을 망각한 삶입니다. 그래서 묻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없어질있음의 눈으로 아직도있음을 본 사람은 자신의 있음에 무한한 의미를 새기게 됩니다.

 

정진우 지음, <역설의 변주: 불안에 맞서는 고요의 철학>(세창출판사, 2025. 10. 2.),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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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에서 만나 학문적 교류의 삶을 진하게 나눈 후배가 자기 책을 냈다.

이해하기 쉽지 않은 헤겔의 종교철학을 공부하고, 그것으로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묵직한 헤겔 종교철학 관련 서적 3권을 번역한 후에 나온 책이다.

 

<정진우의 철학교실>이라는 유튜브를 통해 철학의 대중적 강의를 곧잘 하더니,

그중에 중요한 철학자 일곱을 골라 책을 엮었다.

 

니체의 <도덕의 계보>

키르케고르의 <공포와 전율>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아들러의 <삶의 의미>

헤겔의 <정신현상학>

프롬의 <사랑의 기술>

롤스의 <정의론>

 

묵직한 철학자, 달달한 심리학자, 그리고 사회철학 전공자답게 정의의 문제까지 건드린다.

 

오래 사유하고 글을 써온 철학 전공자의 언어가 멋들어지게 펼쳐지면서,

굽이굽이 에워 도는 삶의 굴곡들을 콕콕 짚어낸다.

함께 공부했던 시절의 언어들과 묻고 배웠던 스승의 사유 흔적도 묻어 있다.

함께 한 시간과 세월 덕에 읽는 재미가 더 쏠쏠하고,

글 속에서 사람이 그려지니 더 깊은맛이 난다.

 

명말(明末)의 선비 이탁오(李卓吾)의 책 <焚書>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나는 스승과 친구는 원래 하나라고 생각한다. 둘이 다르단 말인가?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친구가 곧 스승임을 모르고, 사배(四拜)를 올리고 학업을 받은 사람만이 스승이라고 여긴다. 또한 스승이 곧 친구임을 모르고, 그저 함께 사귀어 친밀한 관계를 맺은 사람만이 친구라고 여긴다. 만약 친구라서 사배를 올리고 학업을 받을 수 없다면, 그와 친구가 될 수는 없는 법이고, 또 스승이라서 마음속에 있는 말을 털어놓지 못한다면, 그를 스승으로 섬길 수는 없는 것이다.”(余謂師友原是一樣, 有兩樣耶? 但世人不知友之即師, 乃以四拜受業者謂之師; 又不知師之即友, 徒以結交親密者謂之友. 夫使友而不可以四拜受業也, 則必不可以與之友矣. 師而不可以心腹告語也, 則亦不可以事之為師矣. 卷二 書答 為黃安二上人三首真師二首에서)

 

- 향린 목회 347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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