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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자리: 생명의 물과 죽임의 물 ㅣ 송진순 목사 ㅣ 2026-09-20

by 이민하 posted Sep 20, 2026 Views 5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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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6-09-20

물의 자리:

생명의 물과 죽임의 물

(겔 47: 9-12, 약 2:14-17, 눅 13:1-5, 시 85:10-13)

 

송진순 목사

 

 

반갑습니다. 이 시간 향린교회 교인들 위에 주님의 은혜가 평화가 임하기를 기원합니다. 이번 주일은 한가위 감사주일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과 만물 가운데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합니다. 또한 기후재난으로 인한 네팔 희생자들을 비롯하여 세계 곳곳에서 신음하고 있는 인간과 비인간 존재를 기억하며 묵상으로 시작합니다. 

 

[파괴된 아폴로의 토르소]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는 1908년 <새로운 시집 2부> 출간하면서 “고대 아폴로의 토르소”(Archaic Torso of Apollo)라는 작품을 발표합니다. 이 시가 유명한 것은 “너는 너의 삶을 바꾸어야 한다.”라는 마지막 구절 때문일 것입니다. 

 

      무르익은 눈망울이 있었던 그의 미증유(未曾有)의 머리를

      우린 본 적이 없다. 그러나

      그의 토르소는 여전히 촛대처럼 빛난다,

      그 속에서 그의 응시는 다만 웅크려들었을 뿐,

 

      변함없이 번쩍인다. 그렇지 않다면야 가슴의 만곡(彎曲)이

      그대 눈을 부시게 할 수 없을 것이며, 살포시 허리를 뒤틀어도

      한 가닥 미소가 생식의 요람이었던 저 중심을 향해 갈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야 이 돌덩이는 그저 두 어깨가 투명하게 내려앉은

      짤막하고 일그러진 모습으로 서 있을 것이며

      맹수의 가죽처럼 그렇게 윤이 나지 않을 것이다.

  

      또 별처럼 모든 가장자리에서 빛을 발하지도 않을 터인데,

      그럴 것이 너를 바라보지 않는 데가 거기엔 한 군데도 없으니 말이다.

      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만 한다.

 

릴케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고대의 조각상을 바라보다가 이상한 경험을 합니다. 물론 릴케가 실제로 보았던 토르소가 무엇인지는 확정할 수 없지만, 사람들은 루브르의 ‘밀레토스 토르소’(기원전 약 480–470년)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목할 것은 릴케와 조각상 사이의 시선입니다. 머리와 팔다리가 온전히 남지 않은 돌덩이인데, 파괴된 몸 전체가 눈이 되어 자신을 바라봅니다. 낡은 유물을 바라본다고 생각했던 시인은 당황합니다. 부서진 몸은 살아있었고, 눈은 없어도 몸통 전체가 눈이 되어, 번쩍이는 시선으로 릴케를 응시합니다. 그 순간 시인의 의식은 깨어지고, 그는 더 이상 안전한 관람객으로 남아 있을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시의 마지막에서 시선이 역전됩니다. “너를 보지 않는 곳은 하나도 없다. 너는 네 삶을 바꾸어야 한다”

 

이번 광주비엔날레의 주제이기도 한 이 문장은, 기후 재난 앞에 서 있는 우리에게 되돌아옵니다. 우리가 시선의 주체가 되어 타인을 보고, 자연을 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철저하게 깨집니다. 녹아내리는 빙하, 쏟아져 내리는 흙더미, 불타는 산과 땅, 희생당한 동물과 식물, 그리고 진흙 속에 있는 주검들이 우리를 바라봅니다. 이 모든 것이 너를 보고 있는데, 너는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살 것인가? 무너진 세계, 파괴된 지구의 몸이 묻습니다. 

 

[넘치는 물과 사라지는 물]

지난 8월 26일, 네팔과 티베트 접경의 히말라야에서 빙하와 산 사면이 무너졌습니다. 거대한 토사와 물이 72km 구간의 수십 개 마을을 덮쳤고, 도로와 다리는 유실되고, 열두 곳 넘는 수력발전소가 무너졌습니다. 관련 지역의 인프라 대부분이 파괴되었습니다. 9월 18일 기준 1,400명 이상이 숨지고 5,600명 이상이 실종됐습니다. 마을은 이전 수준으로 복귀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재건 예산만 7조, 하지만 그것은 숫자 그 이상의 파괴를 의미했습니다. 이렇게 물은 생명을 살리기도 하지만, 기후위기로 흔들린 산에서는 모든 것을 삼키는 죽임의 물이 되었습니다.

 

사실 네팔이 배출한 온실가스의 몫은 전 세계에서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재난은 그 몫에 비례해서 오지 않습니다. 적게 배출한 나라가 더 크게 무너졌습니다. 이것이 기후위기가 기후정의가 되는 지점입니다. 기후위기는 무엇이 일어나는지를 묻지만, 기후정의는 누가 더 많은 원인을 제공했고, 누가 먼저 더 크게 다치며, 누가 복구 비용을 떠안는지를 묻습니다. 이번 참사의 원인이 기후변화라고 특정되면서, 유엔 기후총회와 네팔 외무장관은 “기후변화 피해 복구에 관한 외교의 틀을 ‘원조’가 아니라 ‘정의 실현과 그 보상’으로 전환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미국 중국 등의 최우선 탄소 배출국이 기후피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네팔에서 해빙으로 물이 넘쳤다면, 다른 한편에서는 물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일주일 전, 눈을 끄는 기사가 하나 있었습니다. “인니 산불에 11만 명 호흡기 질환, 이탄지 화재 공포”라는 제목이었습니다. 여러분 이탄지(Peatland)가 뭔지 아시나요? 이탄지는 수천 년에 걸쳐 식물 잔해가 퇴적된 유기물 토지로, 지구 지표면의 3%에 해당하는 습지입니다. 산림과 바다와 같이 탄소를 흡수하는 거대한 탄소 저장소로 기후를 조절하고, 오랑우탄, 희귀조류 등 생물 다양성을 보존하는 지구 생태계의 보고입니다.

 

사실 건강한 이탄지는 물로 덮여 있어 좀처럼 타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탄지가 비옥한 땅이기에 글로벌 기업들이 적극 투자했습니다. 팜유와 펄프 농장을 만들기 위해 수십 년간 땅을 긁어 수로를 파고 물을 빼냈습니다. 물이 사라진 땅은 불이 붙기에 최적의 상황이었습니다. 여기에 불법 화전이나 포크레인 같은 작업 마찰열, 그리고 강한 엘니뇨가 덮치면 불이 붙게 됩니다. 불은 지표면을 태우다 땅속으로 들어갑니다. 말 그대로 수십 미터 아래에서 땅이 탑니다. 이번 인도네시아의 화재도 1월에 시작하여 지금까지 타는 중입니다. 이 과정에서 산소가 부족하여 불완전 연소가 일어나면서 일산화탄소와 미세먼지 등 대기오염 물질을 배출합니다. 학교는 휴교령이 내려졌고, 호흡기 질환자가 11만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시민의 안전과 건강권, 아이들의 학습권이 박탈당했고, 수많은 식물과 동물이 죽임을 당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시작했지만, 인간이 끌 수 없습니다. 그저 기상조절을 위해 헬기로 소금을 뿌리는 것이 다입니다. 대규모 생산과 막대한 이윤을 위해 물을 빼내는 개발이 땅을 연료탱크로 바꾼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평범하고 약한 이들이 기후재난 최전선에서 그 피해를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사라지는 물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AI 산업입니다. 이를 위한 대규모 데이터센터에는 수천 대의 서버가 쉬지 않고 계산하며 열을 냅니다. 그 열을 식히는 증발식 냉각은 전기를 덜 쓸 수 있지만, 많은 물을 대기로 날려 보냅니다.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막대한 양의 물에서부터 서버 냉각과 전력공급 발전 과정에 필요한 물까지 더하면, AI 산업은 막대한 물을 소비하는 산업입니다. 게다가 데이터센터 상당수가 텍사스, 캘리포니아 등 서부 건조지역에 몰려있어 상황은 더 악화되는 중입니다. 

 

네팔에서는 물이 넘쳐 세계가 무너졌고, 이탄지에서는 물이 사라져 땅이 타들어가고 있습니다. 다른 지역에서는 물을 휘발시키며 새로운 미래로 나아간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편리와 속도를 위해, 정확하게는 지불 능력이 있는 인간을 위해 물이 제자리를 이탈하고 있습니다. 이 세 사건은 서로 다른 이야기가 아닙니다. 더 많이 개발하고 더 빠르게 계산하고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해야 행복하다는 이 시대 신화가 만들어낸 죽임의 현장입니다. 넘치는 물과 사라지는 물은 같은 문명의 다른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느려지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무너지는 것에는 놀랄 만큼 무감각합니다. 성장률이 낮아지고 처리 속도가 늦어지고 배송이 하루 미뤄지는 일은 곧바로 위기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강이 마르고 땅이 타고 마을과 생태계가 무너지는 일은 개발 비용 혹은 피할 수 없는 부작용, 외부효과라 말합니다. 우리는 속도의 손실에는 민감하면서 생명의 손실에는 둔감해졌습니다. 잠시 늦추면 바꿀 수 있는 것을 끝내 늦추지 못해 돌이킬 수 없이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느려지는 일이 아니라 생명의 기반이 무너지는 일입니다.

 

[그들이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이 점에서 누가복음 13장의 말씀은 흥미롭습니다. 어쩌면 기후정의의 이면을 예수께서 우리에게 묻는 것처럼 들립니다. 사람들이 예수께 빌라도가 갈릴리인들에게 행한 악행을 고하자, 예수는 반문합니다. “빌라도에게 죽임을 당한 갈릴리 사람들이 다른 사람보다 죄가 더 많은 줄 아느냐?”, “아니다!”,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의 다른 사람보다 더 죄가 있는 줄 아느냐?”, “아니다!” 질문은 오래되었지만 낯설지 않습니다. 왜 그곳에 살고 있는가? 왜 미리 피하지 않았나? 왜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나? 왜 재난에 대비하지 않았나? 우리는 때로는 재난의 원인을 피해자의 삶에서 찾으려 합니다. 그러면 구조의 문제를 묻지 않아도 되고, 나의 삶을 바꾸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그들이 죄가 더 많아서 죽은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은 악을 개인의 도덕성으로 설명하는 신학을 끊어 냅니다. 예수께서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다 이와 같이 망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이것은 피해자와 거리를 두는 안일한 신앙을 넘어서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회개가 결코 개인의 문제로 한정될 수 없다는 경고입니다. 타인의 재난은 구경거리가 아니고, 일주일 정도 소비되고 마는 뉴스거리가 아닙니다. 예수의 경고는, 우리는 안전하다고 착각하는 이들,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한 이들에 대한 경고이고, 그러니 지금 당장 인식을 전환하라는 요청입니다. 그러하기에 “그들의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라는 질문은 바로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회개는 죄책감에 머물거나 불편함을 주는 일이 아닙니다. 메타노이아는 생각과 방향을 돌이켜 이전과 다른 삶을 살라는 요청입니다. 우리가 딛고 있는 이 세계가 인간의 탐욕과 욕망으로 들끓고, 나를 위해 타인의 희생이 당연시되며, 생명을 살리는 물이 죽임의 물이 되는 것을 직시하며 묻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어떤 세계를 만들고 있는가. 개발과 성장의 결정이 누구에게, 얼마나 지속적으로, 어떤 위험으로 넘겼는지 직면하는 것입니다. 

 

[가해자 피해자 연루자 그리고 행위자]

이 지점에서 우리는 불편하지만 중요한 구분을 해야 합니다. 기후위기 앞에서 우리는 모두 피해자입니다. 그러나 착취한 땅에서 나온 팜유를 먹고 입고 바르며 글로벌 기업의 이윤에 봉사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누구보다 많은 탄소를 배출하며, 이 모든 일에 눈감고 무감각하게 살아간다는 점에서 기후재난의 가해자입니다. 그렇다고 한 사람이 차를 운전한 책임과 수십 년 동안 위험을 알고도 화석연료 사업을 확대한 기업의 책임은 같지 않습니다. 한국의 평범한 시민이 쓴 전기와 에너지 정책을 결정하고 이익을 축적한 권력의 책임이 같지 않습니다. 책임을 모두에게 똑같이 나누면 책임의 구조가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같은 가해자가 아니며 모두 같은 피해자도 아닙니다. 개인의 잘못을 면피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피해와 가해 사이에서 연루된 자들입니다. 

 

연루되었다는 말은 우리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 상황을 바꿀 수도 있다는 힘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책임을 지닌 행위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개발과 착취를 멈추고, 타인을 희생하는 구조를 물으며, 교회의 예산과 건물 그리고 우리가 앉는 식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데이터센터와 발전소 그리고 산업단지가 들어설 때 물과 땅을 어떻게 쓰는지 공개하라고 요구할 수 있습니다. 피해 지역의 목소리를 중심에 놓고, 더 큰 책임을 가진 기업과 정부에게 더 큰 몫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문제를 선량한 시민과 나쁜 기업의 대립으로 두려는 것이 아닙니다. 현장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너무 잘 압니다. 발전소가 들어서고, 산업단지가 들어설 때 그리고 대량 폐기물이 버려지는 곳에서 선전되는 수사들과 실제 벌어지는 일들 말입니다. 독성물질을 배출하면서 지역의 일자리 확보와 경제 발전 그리고 세수 확보와 복지를 제공합니다. 어떤 주민은 오염의 피해자이면서 산업의 노동자이고, 어떤 가족은 기업에 항의하면서도 그 임금으로 살아갑니다. 이러한 의존 관계를 지역의 생존이라고 말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복잡함이 기업의 책임을 흐리는 이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정의를 더 분명하게 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택지가 오염된 일자리와 실업뿐이라면 그것은 자유로운 선택이 아닙니다. 위험한 산업에 의존하도록 만든 뒤 주민도 이익을 얻었으니 공범이라고 말하는 것은 또 하나의 폭력입니다. 정의는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누가 선택지를 만들었고 이익을 얻었으며 위험을 떠넘겼는지 밝히는 것입니다. 피해자가 생존을 포기하지 않고도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다른 길을 함께 만드는 일입니다.

 

정의로운 전환은 발전소를 닫는 날짜만 정하는 일이 아닙니다. 노동자의 삶과 터전을 마련하고 지역경제를 함께 전환하고 물과 땅, 에너지의 결정에 시민이 참여하는 일입니다. 화석연료를 재생에너지로 바꾸었다고 정의로운 전환이 아닙니다. 에너지원만 바뀌고 성장에 대한 욕망은 그대로 둔 채 더 많은 자원을 착취하고, 더 크게 산과 바다를 희생한다면, 그것은 개발의 연장일 뿐입니다. 

 

시편 85편은 노래합니다. 인애와 진리가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춘다. 정의는 평화를 방해하는 말이 아닙니다. 불화를 일으키고, 반대 세력만 만들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정의가 빠진 평화는 약자에게 참고 견디라고 요구하지만, 정의와 입 맞춘 평화는 상처를 만든 권력과 구조를 바꿉니다. 정의는 사랑과 반대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세계를 창조하고, 만물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기에 불의를 그대로 둘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의를 따르며 그의 길을 닦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

올해 창조절의 주제가 에스겔 47장 9-12절에 근거한 “생명의 물에 잠기어” 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입니다. 에스겔 47장에 기록된 에스겔의 환상은 폐허 한가운데서 시작됩니다. 예루살렘은 무너졌고 성전은 파괴되었고 백성은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바로 그 절망의 자리에서 선지자는 성전 문지방 아래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것을 봅니다. 처음에는 발목에 차던 물이 무릎과 허리를 지나 사람이 건널 수 없는 강이 됩니다. 그 강이 죽음의 바다로 흘러가자 물이 되살아나고 온갖 생물이 번성하며 강가의 나무가 달마다 열매를 맺고 잎은 약재가 됩니다.

 

물은 성전을 휘돌아 나가 성 밖으로 흘러갑니다. 성전을 떠나 가장 낮고 메마른 곳으로 갑니다. 창조절 자료집에 따르면, "살아있는 물이 성소에서 흘러나와 땅을 새롭게 하는 에스겔 예언의 환상에서, 우리는 치유, 정의, 그리고 모든 것들을 회복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약속을 마주합니다. 이 환상은 생태적 파괴, 자원추출 중심의 경제, 그리고 특별히 취약한 공동체들이 겪고 있는 고통이 심화되는 것으로 특징되는 현재 우리의 현실에 강력하게 말을 건넵니다. 

 

하지만, 죽음을 다루는 체계가 지배하는 듯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생명의 강은 끊임없이 흐르며, 땅에 새로움을 가져오고, 사람들에게 존엄을 회복시키며, 변화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일깨워 줍니다. 이것은 정의, 공유된 풍요로움, 그리고 생태적인 온전함에 기반한 생명이 번성하는 공동체를 양성하는 하나님의 사역에 모두를 참여하도록 부르는 선교적 부르심입니다. 교회는 생명을 부정하는 모든 세력에 저항하고, 창조의 거룩한 선물을 보호하며, 모두가 존엄과 충만함 가운데 살아갈 수 있는 공의롭고 지속 가능한 미래를 가꾸기 위해 하나님의 생명을 주는 운동에 동참할 것을 부름 받았습니다. 라고 기록합니다. 

 

주목할 점은 11절입니다. 진펄과 개펄은 되살아나지 않고 소금 땅으로 남겨 두겠다고 합니다. 모든 곳을 인간의 쓰임에 두는 것이 구원은 아니라는 뜻으로 읽힙니다. 살아 있는 세계에는 인간이 점유하지 않고 남겨 두어야 할 자리도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땅을 생산하게 만들고 모든 강을 에너지로 바꾸고 모든 시간을 효율로 환산하려 합니다. 에스겔의 강은 더 큰 개발의 환상이 아니라 생명이 스스로 살아갈 여백까지 돌려주는 하나님의 질서입니다. 인간의 문명이 물의 본래 자리를 뒤흔들어 놓음으로 생명의 물을 죽임의 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물이 자기 자리에 있을 수 있게, 생명의 물 앞에서 우리의 질문을 바꾸어야 합니다. 이 물로 얼마나 더 생산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이 물이 무엇을 더 살려낼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데이터센터 몇 개를 더 돌릴 수 있는가, 산업단지와 발전소를 얼마나 더 확장할 수 있는가만 묻는 대신, 이 물이 어떤 강과 습지를 되살리고 어떤 농부와 마을을 지키며 어떤 물고기와 새와 나무와 미래 세대를 살려낼 수 있는지 물어야 합니다. 물은 생명을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생명의 전환은 기술의 종류만 바꾸는 일이 아니라 질문의 방향을 바꾸는 데서 시작됩니다. 얼마나 더 가질 것인가에서 무엇을 살릴 것인가로, 얼마나 더 빠르게 갈 것인가에서 어디를 향해 함께 갈 것인가로 돌아서는 것,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요청되는 회개입니다.

 

[말로만 평안히 가라 하지 말라]

야고보서는 묻습니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먹을 것이 없는데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먹으라고 말하면서 필요한 것을 주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입니다.

 

기후재난을 당한 이들에게 안타깝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거기서 멈춥니다. 네팔 희생자를 위해 기도하면서 손실과 피해 기금에 대한 부유한 국가의 책임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이탄지의 불을 걱정하면서 값싼 팜유와 종이의 공급망의 구조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AI의 편리를 누리면서 데이터센터가 어느 지역의 물을 얼마나 쓰는지 확인하는 것을 성장을 막는 규제로 볼 수 없습니다. 기도는 행동을 면피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보게 하고 행동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입니다. 정의와 평화가 하나님에게서 흘러나오도록 여는 길입니다.

 

어제 기후정의행진이 있었습니다. 노동, 인권, 종교, 청년 등 620개 시민단체가 전국 17곳에서 함께 걸었습니다. 정부가 추진하는 3대 메가프로젝트를 고발하고, 기후위기에 대응 정책 마련과 정의로운 전환을 요청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덕수궁 돌담길에서 예배하며 마음을 모았습니다. 오늘 주보에 실린 사진입니다. 어제는 호세아의 말씀을 따라 “땅의 탄식을 들으라, 하나님의 정의를 행하라”는 명령을 들었다면, 오늘 우리는 에스겔의 환상을 따라 “생명을 살리는 물, 그 물에 스미어 봅시다”라고 말합니다. 넘치는 물과 사라지는 물 사이에서 인간이 물의 자리를 깨뜨린 것을 반성하고, 생명과 치유 회복의 역사가 이 세계를 통해 일어나도록 합시다. 비록 그 길이 멀고 가능성이 없어 보여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을 고백하며 생명으로 나아가는 향린 교회 교인들,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너는 네 삶을 바꾸어야 한다]

릴케가 조각상을 바라보다가 오히려 응시당했듯 오늘 우리는 성서의 말씀 앞에서 응시당합니다. 에스겔의 강물이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의 믿음은 어디로 흐르고 있는가. 누가복음의 예수께서 묻습니다. 너는 타인의 재난을 판단하는가 아니면 방향을 바꾸는가. 야고보가 묻습니다. 너의 연민은 누구의 몸을 따뜻하게 하는가. 시편이 묻습니다. 너의 평화는 정의와 입 맞추고 있는가.

 

너는 네 삶을 바꾸어야 한다. 이 문장은 우리를 머뭇거리게 하는 명령이 아닙니다. 아직 바꿀 수 있다는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폐허의 성전에서도 물을 흐르게 하셨습니다. 죽음의 바다도 다시 살 수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세계를 홀로 구원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미 흐르게 하시는 생명의 물에 몸을 싣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를 지킬 때 그것은 세계를 위한 희생이 아닙니다. 우리도 함께 사는 길입니다. 나무의 잎이 약재가 되고 강물이 닿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살아나는 그 세계에서 인간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애와 진리가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며 진리가 땅에서 돋는 세계. 주님께서 좋은 것을 주시고 우리 땅이 열매를 내는 세계. 한가위 감사주일에 그 아름다운 세계를 상상해봅니다. 그것은 막연한 미래가 아닙니다. 어제의 행진과 같이, 오늘 우리의 발걸음이 향해야 할 방향입니다. 

 

우리는 어제 기후정의행진에서 파송의 말씀으로 서로를 세상으로 보내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우리의 기도로 대신하겠습니다. 

 

      인도자: 우리는 오늘 땅의 탄식을 들었습니다. 이제 그 탄식이 멈추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 탄식을 멈추게 하는 사람이 됩시다.

      다함께: 우리는 외면하지 않겠습니다. 침묵하지 않겠습니다.

      인도자: 생명을 희생시키는 폭주와 불의한 질서를 멈추고,

      다함께: 하나님의 정의를 우리의 삶으로 행하겠습니다.

      인도자: 이제 우리는 예배의 자리에서 거리로 나아갑니다. 땅의 탄식을 들었으니, 

      하나님의 정의를 행합시다.

      다함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오늘 우리의 걸음으로 그 뜻을 살아내겠습니다.

      인도자: 주께서 우리의 걸음 가운데 함께하시며

      다함께: 정의와 평화의 길을 열어 주시기를 빕니다. 아멘

 
 
 

[파송사]

평안히 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상처 입은 세계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시선을 피하지 말고, 우리에게 닿는 요청에 응답하십시오.

무엇을 가질지가 아니라, 무엇을 살릴지를 물으십시오.

생명이 흘러야 할 자리를 내어주고, 죽어가는 것을 살리는 곳으로 삶을 전환하십시오.

주님이 흐르시는 자리를 따라, 정의와 평화가 입 맞추는 세상으로 힘차게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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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28 주일예배 자유를 찾아가는 여정 ㅣ 2026-06-28 ㅣ 이세우
2026-06-21 주일예배 삶을 예배로, 예배를 삶으로 ㅣ 2026-06-21 ㅣ 한문덕
2026-06-14 주일예배 바알의 이름으로 ㅣ 2026-06-14 ㅣ 한문덕
2026-06-10 거리기도회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ㅣ2026-06-10 ㅣ 한문덕
2026-06-07 주일예배 조건 없는 구원 | 2026-06-07 | 유영상
2026-06-04 거리기도회 명동2지구 "유산으로 받은 땅" ㅣ김지목 ㅣ2026-06-04
2026-05-31 주일예배 사회 선교와 연대의 힘 ㅣ 2026-05-31 ㅣ 한문덕
2026-05-24 주일예배 통하여 깨닫고, 깨달아 세운다 ㅣ 2026-05-24ㅣ한문덕
2026-05-17 주일예배 향린의 십자가 ㅣ 2025-05-17 ㅣ 한문덕
2026-05-10 주일예배 민중신학과 향린 ㅣ 2026-05-10 ㅣ 김지목
2026-05-03 주일예배 안녕히 계세요 하나님 ㅣ 2026-05-03ㅣ 한문덕
2026-04-26 주일예배 너는 무엇을 보고 있느냐 ㅣ 2026-04-26 ㅣ 한문덕
2026-04-19 기타 AI 시대의 기독교 신앙(강단교류) ㅣ 2026-04-19 ㅣ 한문덕
2026-04-19 주일예배 상상을 일으키는 경청 공동체 ㅣ 2026-04-19 ㅣ 강선구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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