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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출 때 - 글리온에서 압록강까지 ㅣ 2026-09-13 ㅣ 한문덕

by phobbi posted Sep 13, 2026 Views 88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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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6-09-13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출 때

글리온에서 압록강까지

(미가 4:1-4, 고후 5:16-20, 17:20-23)

 

한문덕 목사

 

 

[끊어진 다리 위에서]

 

  지난 주일 우리 교회 남신도들이 특송을 불렀습니다.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출 때였습니다. 이 노래 제목은 시편 8510절에서 온 것입니다. “사랑과 진실이 만나고, 정의는 평화와 서로 입을 맞춘다.”(새번역 성경) 참으로 아름다운 구절입니다.

  이 노래를 들으면서 저는 지난 7, 어느 끊어진 다리 위에 서 있던 시간을 떠올렸습니다. 지난 77일부터 13일까지, 우리 교회와 강남향린교회 교우를 비롯해 서른세 명이 사회적협동조합 길목이 진행하는 조중 접경지역 탐방을 다녀왔습니다. 대련에서 연길까지 1,600킬로미터를 가로지른 여정이었습니다.

  여정의 둘째 날 아침, 우리는 압록강 단교에 올랐습니다. 1911년 일본이 대륙 침략을 위해 놓았고, 한국전쟁 때 미군의 폭격으로 북한 쪽 상판이 끊어진 채 지금까지 남아 있는 다리입니다. 다리 입구에는 항미원조’(抗美援朝), 곧 미국에 맞서 조선을 돕는다는 네 글자와 함께 진군하는 중공군의 거대한 청동상이 서 있었는데, 한 가운데는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관인 팽덕회가, 그의 오른쪽 옆에는 팽덕회의 러시아어 통역을 맡았던 모택동의 아들 모안영이 있었습니다. 다리 위는 여러 나라에서 온 관광객으로 북적였고, 옛 시절을 추억하며 우렁차게 군가 같은 노래를 부르고 지나가는 중국인 관광객들도 있었습니다. 그들 틈에서, 우리 일행 중 누군가로부터(아마 정선영 집사님께서 먼저 시작하신 것 같은데) 노랫소리 하나가 흘러나왔습니다. 김원중의 직녀에게였습니다.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선 채로 기다리기엔 세월이 너무 길다……

 

  같은 다리 위에서 두 개의 노래가 흘러나옵니다. 한쪽은 지나간 전쟁의 추억을 기리는 노래였고, 한쪽은 아직 오지 않은 평화의 만남을 기다리는 노래였습니다.

  오늘 저는 그 다리 위에서 떠올린 생각들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마침 올해는 19869, 스위스의 작은 마을 글리온에서 남과 북의 그리스도인들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인 지 40년이 되는 해입니다. 40년 전 그곳에서 있었던 일과, 두 달 전 압록강에서 제가 본 것들을 함께 겹쳐 놓고, 오늘 우리가 무슨 노래를 불러야 할 지를 생각해 보려 합니다.

 

[하나님이 그리시는 그림]

 

  먼저 미가서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그 날이 오면, …… 주님께서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원근 각처에 있는 열강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실 것이니,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이 본문은 흔히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든다라는 구절 때문에 평화를 외치는 구호로 자주 소환됩니다. 그런데 이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가 놓치기 쉬운 순서가 하나 있습니다. 칼이 보습이 되기 전에, 먼저 무엇이 일어납니까? 주님께서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열강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십니다. 정의로운 판결이 먼저 있고, 그 뒤에 칼이 보습이 되고, 창이 낫이 됩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성서는 정의 없는 평화를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갈등의 원인인 불의를 덮어두고 그저 이제 그만 싸우자고 하는 것은 평화가 아니라 휴전일 뿐이고, 일시적 봉합이고, 때로는 억압입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가 글리온 회의 40주년을 맞이하여 세계 에큐메니칼 평화대회를 열면서 세계교회가 오래전부터 사용해 온 신학적 언어를 다시 강조합니다. 바로 정의로운 평화(Just Peace)”라는 말입니다. 정의와 평화는 원래 하나입니다. 평화 없는 정의도 없고, 정의 없는 평화도 없습니다. 시편의 말씀처럼, 정의와 평화는 서로 입을 맞추는 계속되는 과정이며 노력입니다.

  그런데 압록강 단교 입구에 서 있던 그 청동상을 생각하면, 미가서의 아름다운 그림은 아직 한참 멀어 보입니다. 거기서 칼은 여전히 칼입니다. 칼이 보습이 된 것이 아니라 기념물이 되고, 전쟁 승리의 기억을 매일 새로 새기고 있었습니다. 예언자 미가가 오래전 그린 평화의 그림은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그림은 하나님이 한 번도 포기하신 적 없는 그림입니다. 그리고 이 그림을 향한 작은 걸음이, 40년 전 어느 가을, 스위스의 한 산골 마을에서 내디뎌졌습니다.

 

[하나님의 그림이 땅으로 내려오다]

 

  제주 4.3사건, 여순 항쟁, 1980년 광주민중항쟁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와 한국교회는 그 참혹한 사건들을 겪으면서 깊은 깨달음 하나를 얻었습니다. “평화와 통일 없이는 진정한 의미에서 민주화도 완성될 수 없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분단이라는 근본적인 폭력의 구조를 그대로 두고서는, 이 땅에서 어떤 정의도 온전히 세워질 수 없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뼈아프게 느꼈습니다.

  그리하여 1981,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통일문제연구위원회를 조직했고, 세계교회협의회(WCC)도 한반도의 평화통일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첫걸음이 198410, 일본 고텐바시 도잔소(東山莊)에서 열린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정의에 관한 협의회였습니다. 이 모임에는 초청받은 북측 교회 대표가 참석하지는 못했습니다만, 세계 교회는 매우 중요한 신학적 원칙을 세웠습니다. 한반도의 평화통일은 남한 교회 혼자 짊어질 일방적 선교의 과제가 아니라, 남과 북 교회가 함께 감당하고, 세계 교회 전체가 함께 책임져야 할 공동의 과제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흐름을 도잔소 프로세스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 흐름이 마침내 열매를 맺은 곳이, 바로 글리온이었습니다.

  19869, “평화에 관심하는 그리스도인의 성서적·신학적 기초”(Seminar on the biblical and theological foundation of christian concern for peace)라는 주제를 가지고 스위스 글리온에서 열린 제1차 회의에 해방 이후 처음으로 남과 북의 그리스도인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여러분, 상상해 보십시오. 1986년입니다. 전두환 정권의 서슬 퍼런 군사독재 시절이었고, 냉전은 절정에 달해 있었으며, 남과 북 사이의 민간 교류를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불가능한 만남이, 세계 교회의 중재를 통해 실제로 일어난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 조선그리스도교연맹(조그련)은 외국군 철수와 평화협정 체결, 비핵지대 수립 등 그들의 입장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자유와 정의와 화해에 입각한 평화 실현이라는 입장을 각각 밝히었습니다. 서로 다른 생각과 주장으로 남과 북의 대표들이 하나의 합의문을 만들어 내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서로 다른 그 다름을 그대로 안은 채, 함께 성만찬을 나누었습니다. 저는 이 장면이 이 사건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합의문을 만들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적대 관계에 놓여 있지만, 그 적대를 다 해소하지 못한 채로도 한 식탁에 앉아 그리스도의 몸을 함께 나눌 수 있었다는 것, 이것이 이 사건의 본질입니다.

  1986년에 이어 198811, 2차 글리온 회의가 열렸고, 여기에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구체적 원칙을 담은 글리온 선언을 채택합니다. 그리고 1995년을 통일 희년으로 선포하고, 매년 815일 직전 주일을 남북 공동기도주일로 지키기로 합의했습니다. 그리고 이 글리온의 흐름은 바로 그해, 1988년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발표한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 그 유명한 ‘88선언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이 선언은 이후 한반도 평화통일운동의 대헌장이라 불릴 만큼 중요한 문서가 되었고, 한국 사회 전체의 통일 논의를 공론화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잠시 멈추어,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했던 에큐메니칼 정신을 기억해야 합니다. 글리온 회의는 남과 북의 힘만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닙니다. 세계 곳곳의 형제자매 교회들이 함께 동참하여 만들어 낸 결과물이었습니다. 저는 이것이야말로 교회가 세상에서 감당해야 할 역할의 한 모범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국경 안에 갇힌 공동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국가와 이념의 경계를 넘어섭니다. 그렇기에 국내 정치가 도저히 풀 수 없던 매듭을, 국경을 넘어선 신앙 공동체의 연대가 풀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20267, 압록강에서]

 

  그런데 지난 7, 저와 우리 교우들은 신앙 공동체가 넘어서야 할 또 다른 국경 앞에 서 있었습니다. 단동의 숙소는 전망이 참 좋았습니다. 창밖으로 압록강 단교와 중조 우의교, 두 다리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방마다 망원경이 비치되어 있었고, 전기가 부족하다고 들었지만, 생각보다 많은 건물의 창가에 불이 켜져 있는 북쪽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망원경 없이 멀리서도 또렷하게 보일 만큼 붉게 빛나는 일심단결이라는 네온 글자가 있었습니다. 바깥의 어떤 유혹에도 넘어가지 말고 한마음으로 뭉치자는 뜻이겠지요.

  이튿날 우리는 수풍댐 쪽으로 올라가는 작은 탐방선에 올랐습니다. 배가 나아가자 왼편은 중국, 오른편은 북한이었습니다. 나무 하나 없이 헐벗은 산에 억척스럽게 일군 밭떼기, 낡은 건물에 걸린 인공기와 붉은 구호들, 강변을 따라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진 철조망이 보였습니다. 그러다 움직이는 사람이라도 발견하면 배 안에서 누군가 외쳤습니다. “사람이 보인다!” 그리고 그 배 위에서 작은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강변 초소에 서 있던 북한 군인들을 향해 누군가 팔을 크게 흔들었습니다. 그러자 그 군인들이 우리를 향해 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화답해 준 것입니다. 배 안에서 환호성이 터졌습니다. 살짝 감격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이런 작은 감격이 이내 슬픈 마음으로 바뀌었습니다. 북한 젊은이의 그 손짓은 우리에게 작은 감동이었지만 분단의 장벽은 여전하기 때문입니다. 미가서가 말한 하나님의 판결은 아직 내려지지 않았고, 칼은 여전히 칼입니다. 손 한 번 흔들었다고 분단 체제가 조금이라도 헐거워진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 손짓은 우리에게 왜 정의가 필요한지를 알려주었습니다. 이름도 모르는 그 젊은 군인은 누군가의 아들이고, 누군가의 아버지입니다. 저는 제 아들과 나란히 서서 그 강 건너를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아야만 했습니다. 군에 있다 방금 나온 제 아들이 기분이 묘하다고 제게 그러더군요. 초소에 있는 북한 젊은이, 그리고 반대편에 있는 우리 젊은이들은 서로를 모릅니다. 그러나 누군가 결정만 내리면, 그 둘은 서로에게 총을 겨누게 되어 있는 사이입니다. 기분이 묘하다고 말하는 아들 앞에서 아버지로서 저는 말을 잇지 못하고 깊은 상념에 잠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안시(집안, 集安)에 도착한 날 밤에는 압록강변을 걸었습니다. 낮에 본 강폭보다 훨씬 좁아진 물줄기였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헤엄쳐 건널 수 있겠다는 말이 절로 나왔습니다. 거기 서 있는 우리 일행은 모두 저 물을 건너 한번 가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작은 바람일 뿐이었습니다.

 

[길이 막혀 있습니다]

 

  이제 정직하게 40년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지난 40년간 우리는 평화통일 담론과 실천의 저변을 충분히 넓히지 못했습니다. 이 평화와 통일운동은 에큐메니칼 진영의 상층부에 머물렀을 뿐, 개교회와 풀뿌리 교인들의 삶과 신앙으로까지는 충분히 내려오지 못했습니다. 국제 캠페인을 함께해 온 해외 파트너 교회들은 늘 우리에게 묻습니다. “한국교회와 성도들의 참여는 왜 이렇게 저조한가?”

  조선그리스도교연맹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201912월 심양에서의 마지막 만남 이후, 팬데믹과 남북 관계의 극심한 경색이 겹치면서 지금까지 만남을 재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때 매년 함께 작성하던 부활절 남북 공동기도문도 이제는 반쪽짜리 기도문이 되어 버렸습니다. 답답한 세월이 지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접경지역 탐방에서도 이러한 답답함이 계속되었습니다. 원래 일정에는 윤동주 시인의 묘소 참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일 아침 공안으로부터 갈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여행 내내 공안은 따라다니며 감시했습니다. 여정의 마지막 무렵, ··러 삼국의 국경이 맞닿은 방천으로 향했는데 검문소 앞에서 버스를 되돌려야 해야 했습니다. 군사 훈련이 있어 외국인은 절대 출입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연변대학은 정문에서부터 외부인의 출입을 막았습니다.

  막힌 것은 길만이 아니었습니다. 윤동주 생가 입구 머릿돌에는 중국 조선족 유명 시인 윤동주 생가.”라고 새겨져 있었습니다. 정원의 비석에는 한문으로 번역된 서시가 한글 서시보다 윗자리에 있었습니다. 북간도의 대통령이라 불렸던 규암 김약연 선생 생가는 무너지기 직전이고, 명동촌에 분명히 있었던 문익환 목사의 생가 안내 표지도 지금은 깔끔히 사라졌습니다. 관광안내도에 표시된 송몽규 생가터에도 표지석 하나 없었습니다. 대신 명동학교 앞 넓은 공터에는 중국공산당의 사회주의 핵심 가치관이 적힌 대형 문구와 기념탑들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광장에는 커다란 석류 조형물이 서 있었습니다. 석류알들이 뭉쳐 하나가 되듯 모든 민족이 하나의 중국으로 뭉치자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2018년에 갔을 때는 그 자리에 3.13 독립운동 기념탑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게 바뀌어 있었습니다.

  세계로 눈을 돌려도 상황은 다르지 않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 가자지구에서, 이란에서까지 크고 작은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전임 교황 프란치스코는 우리가 이미 조각조각 치러지는 제3차 세계대전을 경험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는 말이 지도자들의 입에서 공공연히 나옵니다.

  이 흐름이 한반도에도 그대로 밀려옵니다. 최근 계속되는 호르무즈 해협 파병 압박이 그렇습니다. 우리 헌법 제51대한민국은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고 침략적 전쟁을 부인한다.”고 되어 있지만 2003년 이라크 파병 때처럼 명분 없는 전쟁에 휘말릴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을 외교·안보 전문가들의 판단에만 맡겨 두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정의로운 평화 신학은 정당한 전쟁 이론이라는 것 자체를 근본에서부터 거부합니다. 아무리 방어적인 명분을 내세워도, 우리와 직접 관련 없는 강대국들의 세력 다툼에 발을 들이는 것은 전쟁 논리에 포섭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냉정한 사실이 있습니다. 최근 중동 전쟁에서, 다른 나라 분쟁에 발판을 제공한 군사기지들은 하나같이 가장 먼저 보복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전쟁에 연루된다면, 그 대가는 강대국이 아니라 이 땅에 사는 우리들이 짊어지게 됩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다시 글리온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40년 전 글리온에서 남과 북의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성만찬을 나눌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냉전이라는 거대한 진영 논리 바깥에 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어느 한쪽 진영의 대변인으로서가 아니라, 그 진영 논리 자체를 넘어서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부르심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편이냐 저 편이냐를 선택하도록 부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 어떤 진영의 논리도 넘어서는 그리스도의 평화 안에 서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물론 이런 세계 정세 속에서,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춘다는 말은 지금 매우 공허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40년 전 글리온에서 시작된 그 걸음이, 오늘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 것은 아닌가 하는 낙심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바로 이 지점에서, 오늘 우리는 다시 두 번째, 세 번째 성서 본문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 이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서, 우리를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화해가 우리의 업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화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이루신 일입니다. 우리가 화해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화해가 우리에게도 맡겨진 것입니다. “화해의 직분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보면 이미 완료된 사건을 우리가 전하고 살아 내는 사명을 가리킵니다.

  이것이 왜 중요할까요? 이것이 우리에게 계속 나아갈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 남북 교류가 막혀 있는 오늘의 현실 앞에서, 우리가 만약 화해를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면 쉽게 절망하고 포기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화해가 이미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우리는 오늘도 믿음 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그 화해를 증언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이야기를 더 해야겠습니다. 여행 중반, 우리는 백두산에 올랐습니다. 맑은 천지를 보려고 새벽 여섯 시에 식사를 마치고 일찍부터 서둘렀습니다.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마지막에는 작은 승합차로 갈아타며 해발 2,665미터까지 올라갔습니다. 삼대가 덕을 쌓아야 천지를 본다지만, 다들 마음이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상이 가까워질수록 거짓말처럼 안개가 사방을 집어삼켰습니다. 차에서 내렸을 때는 20미터 앞도 분간할 수 없었습니다. 살을 에는 비바람에 체감온도가 순식간에 떨어졌고, 얇은 우비 하나에 의지해 떨면서 앞사람의 실루엣만 간신히 보면서 엉금엉금 올라갔습니다. 안개로 둘러싸인 거대한 흰 벽을 향해 마음의 눈으로 짐작하며 한 분이 말을 꺼냈습니다. “아마, 저기가 천지겠지.” 우리는 끝내 천지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천지가 거기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안개가 걷히지 않았을 뿐입니다. 우리가 보지 못했다고 해서 천지가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요한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은,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기도가 드려진 지 이천 년이 지났습니다. 글리온의 성만찬으로부터도 40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이 기도는 아직도 응답되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나뉘어 있고, 우리 민족은 여전히 갈라져 있으며, 우리 사회 안에도 무수한 분단선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을 절망의 근거로 생각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아직 응답되지 않았다는 것은, 이 기도가 틀렸다는 뜻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 살아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이 기도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안개 속에서 흰 벽을 향해 저기가 천지겠지하고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던 그 자리에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

 

  그렇다면 우리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첫째, 평화 담론을 삶의 자리로 가져오는 일입니다. 지난 40년의 가장 뼈아픈 반성은, 평화통일의 언어가 소수 지도자들의 것으로만 머물렀다는 것이었습니다. 문익환 목사님과 이해동 목사님께서 시무하셨던 서울북노회의 한빛교회는 2017년부터 해마다 민족화해주일과 평화통일주일에, 북쪽 지역의 곡물가루와 남쪽 지역의 곡물가루를 섞어 만든 빵으로, 백두산의 물과 한라산의 물을 섞어 만든 포도주로 성찬을 합니다. 우리도 우리 나름의 방식으로 이 기억을 몸으로 살아 낼 수 있습니다.

  둘째, ‘민족이라는 언어를 넘어서는 상상력입니다. 민족 동질성에 대한 의식이 약해지는 오늘의 현실을 낙심의 이유로만 볼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평화를 새롭게 상상할 계기로 삼을 수 있습니다. 정의로운 평화는 특정한 민족적 정체성에만 근거한 것이 아니라, 가장 취약한 자들, 전쟁으로 고통받는 이들, 이 땅에 함께 사는 이주민들, 다음 세대의 경험에 뿌리내린 평화입니다. 실제로 용정의 항일 유적지를 돌아보던 한 젊은 교우는, 민족 말살의 기록 앞에서 지금 이 순간 같은 일을 겪고 있을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떠올렸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기도와 관심의 폭을 그렇게 넓혀갈 수 있습니다.

  셋째, 끊임없이 기억하는 일입니다. 성찬은 본래 기억의 식사입니다. 영어로 기억한다는 것은 다시(Re) 회원(Member)이 된다는 것이고, 헬라어의 기억인 아남네시스는 다시 떠올려서 그것을 행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명동촌에 갔을 때. 많은 것이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기억을 떠올려야 했습니다. 기억하는 일은 감상이 아니라 싸움입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글리온을 기억하고, 분단의 아픔을 기억하고, 이 땅의 상처받은 이들의 이름을 부르는 한, 그 기억 자체가 이미 화해를 향한 발걸음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넷째, 세계 교회와의 연대를 놓지 않는 것입니다. 글리온이 가능했던 것은 우리 힘만이 아니라 세계 교회의 연대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시아와 태평양의 교회들, 전쟁으로 신음하는 세계 각지의 교회들과 연결된 기도와 연대 속에서,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섯째, 이 사회가 내리는 결정 앞에서 우리는 신앙의 목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호르무즈 해협 파병과 같은 문제는 더 이상 우리와 상관없는 전문가들만의 논의가 아닙니다. 정의로운 평화를 믿는 신앙인이라면, 우리가 몸담은 이 사회를 향해 진영 논리에 편승한 군사적 연루가 아니라 대화와 외교를 통한 해법을 요구할 책임이 있습니다. 글리온의 그리스도인들이 진영의 논리를 넘어 한 식탁에 앉았듯이, 우리도 오늘의 진영 논리를 넘어 평화의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자리]

 

  탐방의 마지막 즈음 두만강 물에 손을 씻던 한 분이 강가에 뒹굴던 작은 돌멩이 하나를 주머니에 넣고 강아지풀 한 줄기를 꺾어 안경집에 담았습니다. 먼 훗날 오늘이 과거가 되었을 때, 집 어딘가에서 문득 그것을 발견하게 될 날을 생각하면서였습니다. 마지막 밤, 연길의 강변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누군가 나직하게 말했습니다. “이야기가 남으면 추억이 되고, 기록하면 역사가 된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살펴본 이 모든 이야기, 미가를 통해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원대한 그림, 글리온의 성만찬, 화해의 직분, 아직 응답 되지 않은 예수님의 기도, 압록강 배 위에서 마주 흔든 손, 그리고 안개에 가려 끝내 보지 못한 천지. 이 모든 것은 결국 하나의 사실을 가리킵니다.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만들어 낸 이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품으신 계획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이미 시작하신 일이며, 우리에게 그 완성을 맡기신 사명입니다.

  그렇기에 오늘의 답답함 앞에서도 우리는 절망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정치적 상황에 따라 있다가도 없어지는 유행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40년 전,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만남이 글리온에서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계획이 만들어 낸 성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람들의 순종을 통해 여신 길이었습니다.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는 날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안개는 아직 걷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정의와 평화, 우리의 사명은 여전히 거기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그날을 기다리는 자가 아니라, 그날을 오늘 여기서 살아 내는 자로 부름받았습니다. 글리온에서 압록강까지, 그리고 압록강에서 다시 그날까지, 우리가 이 기도와 이 걸음을 멈추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잠시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전국의 믿음의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평화로 가는 길은 없습니다.

평화가 곧 길입니다.

이 마을 끝에서 저 마을 끝까지

평화의 일군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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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16 주일예배 바다 저쪽으로 건너가자 ㅣ 2026-08-16 ㅣ 한문덕
2026-08-09 주일예배 평화로 이끄시는 그리스도 ㅣ2026-08-09ㅣ 허석헌
2026-08-05 거리기도회 수요평화 "생존을 넘어 생명으로" | 2026-08-05 | 이원혁
2026-08-02 주일예배 의인의 길과 하늘의 복 ㅣ2026-08-02ㅣ 한문덕
2026-07-26 주일예배 예수의 웃음 ㅣ 2026-07-26 ㅣ 정승우 file
2026-07-26 기타 함께 기뻐할 것이다(들녘교회 강단교류)
2026-07-19 주일예배 요나의 하나님 ㅣ 2026-07-19 ㅣ 한문덕
2026-07-18 기타 길 위의 신앙 | 희년남신도회수련회 예배 | 정승우 목사
2026-07-12 주일예배 살갗처럼 부드러운 마음 | 2026-07-12 | 이원혁 목사
2026-07-05 주일예배 들을 귀가 있는 사람 ㅣ 2026-07-05 ㅣ 한문덕
2026-06-30 거리기도회 한 므나의 살림 | 2026-06-30 | 유영상
2026-06-28 주일예배 자유를 찾아가는 여정 ㅣ 2026-06-28 ㅣ 이세우
2026-06-21 주일예배 삶을 예배로, 예배를 삶으로 ㅣ 2026-06-21 ㅣ 한문덕
2026-06-14 주일예배 바알의 이름으로 ㅣ 2026-06-14 ㅣ 한문덕
2026-06-10 거리기도회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ㅣ2026-06-10 ㅣ 한문덕
2026-06-07 주일예배 조건 없는 구원 | 2026-06-07 | 유영상
2026-06-04 거리기도회 명동2지구 "유산으로 받은 땅" ㅣ김지목 ㅣ2026-06-04
2026-05-31 주일예배 사회 선교와 연대의 힘 ㅣ 2026-05-31 ㅣ 한문덕
2026-05-24 주일예배 통하여 깨닫고, 깨달아 세운다 ㅣ 2026-05-24ㅣ한문덕
2026-05-17 주일예배 향린의 십자가 ㅣ 2025-05-17 ㅣ 한문덕
2026-05-10 주일예배 민중신학과 향린 ㅣ 2026-05-10 ㅣ 김지목
2026-05-03 주일예배 안녕히 계세요 하나님 ㅣ 2026-05-03ㅣ 한문덕
2026-04-26 주일예배 너는 무엇을 보고 있느냐 ㅣ 2026-04-26 ㅣ 한문덕
2026-04-19 기타 AI 시대의 기독교 신앙(강단교류) ㅣ 2026-04-19 ㅣ 한문덕
2026-04-19 주일예배 상상을 일으키는 경청 공동체 ㅣ 2026-04-19 ㅣ 강선구 file
2026-04-12 주일예배 슬픈 사월과 한의 사제 ㅣ 2026-04-12 ㅣ 한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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