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시간의 불빛”
(민 14:1-10, 히 3:7-14, 마 25:1-13)
한문덕 목사
[고통의 세 가지 뿌리(三毒) : 탐(貪)·진(瞋)·치(癡)]
우리 그리스도교가 죄악으로 인해 망가진 폭력적 세상으로부터의 구원을 꿈꾼다면, 불교는 고통의 바다에서 벗어나기 위한 해탈을 추구합니다. 흔히 팔고(八苦)라고 부르는 다양한 고통의 종류들을 헤아리고, 거기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여덟 가지 방법(八正道)들도 제시하지만, 치료를 위해서는 원인을 알아야 하기에 고통을 불러오는 가장 뿌리 깊은 세 가지를 말합니다. 그것을 삼독(三毒)이라 하는데, 탐욕(貪)과 분노(瞋), 그리고 어리석음(癡)입니다.
탐욕과 분노는 그리스도교에서도 익히 아는 죄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되려는 욕심에서 무너졌고, 카인은 비교에 의한 상대적 박탈감 때문에 생긴 분노를 참지 못해 살인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어리석음은 탐욕이나 분노와는 조금 결이 다른 것 같습니다. 이것은 좋고 나쁨의 문제, 선악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음은 인간이 지닌 유한성, 즉 우리는 누구나 완벽하지 못하고 전능하지 않은데, 바로 이러한 우리 존재의 한계 그 자체로부터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음이 때로 사납고 악한 마음보다도 더 무서울 때가 있습니다. 잘못 보거나, 부분만 보고도 온전히 본 것으로 착각하고, 또 상당수의 경우는 자기가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기 때문입니다. 눈이 눈을 보지 못하고, 불이 불을 태우지 않듯이, 어리석음의 경우는 스스로 알아채지 못한다는 치명적 약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서의 예수께서 바리새파를 꾸짖을 때 하셨던 말씀을 우리는 늘 기억하고 늘 조심해야 합니다.
“너희가 눈이 먼 사람들이라면, 도리어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지금 본다고 말하니, 너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요 9:41)
“보지 못하면서도 본다고 말하는 것이 죄”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정말 주의 깊이 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죄가 아니라고 하셨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면, 바로 그것이 고통을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는 우리 모두가 당면하고 있는 과제, 우리의 유한성으로 인한 “어리석음”에서 어떻게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을까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슬기로운 사람들과 어리석은 사람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마태복음의 비유는 읽는 우리로 하여금 고개를 갸우뚱하게 합니다. 모든 비유에는 하나의 초점이 있고 당시 상황을 알아야 하는데, 오늘 비유는 그것이 조금 헷갈립니다. 13절을 보면 “너희는 그날과 그 시각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깨어 있으라”는 결론 같은 권고문이 나옵니다. 그래서 비유의 초점이 “깨어 있으라는 것인가”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본문을 보면 슬기로운 처녀들이나 어리석은 처녀들은 모두 졸았습니다. 모두 잠든 것은 마찬가진데 한쪽은 잔치에 들어가고 한쪽은 들어가지 못합니다. 좀 더 생각해 보면 결혼식 당일 신랑이 오는 그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을 못 참고 모두가 졸았다는 것도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슬기롭다고 하는 처녀들은 매몰차게 기름을 빌려달라는 동료의 요구를 거절합니다. 매몰찬 것은 신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좀 냉정합니다. 그리고 오늘 비유는 결혼식과 연관되어 있는데, 신부는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정말 알쏭달쏭합니다.
우선 오늘 이야기를 충분히 이해하려면 유대의 결혼 풍습을 좀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에선 약혼으로 법적 혼인이 성립됩니다. 약혼 기간은 1년쯤 되는데, 그동안 약혼자들은 합법적 부부이기는 하지만 잠자리는 같이하지 않습니다. 그동안 신부는 여전히 친정집에 있습니다. 결혼식 당일이 되면, 저녁때에 신랑이 자기 친구들과 함께 신부집으로 행차합니다. 그러면 신부의 친구들이 등불을 들고 신랑을 마중 나갑니다. 오늘 등장하는 열 명의 여인은 신부의 친구로 들러리 역할을 합니다. 마중 나가서 신랑을 신부집으로 안내하는 것이지요. 신부집에서 혼인 예식을 치르고 이번에는 다시 하객들 모두가 신랑과 신부와 함께 신랑 집으로 갑니다. 이때에도 신부의 들러리들이 신랑의 집으로 신랑과 신부를 인도합니다.
신부집에서는 신부 들러리가 신랑을 맞이하는 역할을 하지만, 신랑집으로 갈 때는 신랑과 신부를 비롯해 축하 행렬을 호위하는 의전 담당이 됩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후자의 상황입니다. 그런데 결혼식을 마치고, 와야 할 신랑의 행렬이 늦어집니다. 어떤 학자들은 신랑과 신부의 아버지 즉 장인과 결혼지참금이나 혼인계약서에 따른 세부 사항을 두고 종종 실랑이가 벌어졌기 때문에 늦었을 것이라 추측하지만, 아무튼 처녀들은 기다리다 지쳐 졸고 있는데, 한밤중에 신랑이 왔다는 소식이 들렸고, 기름을 준비한 여인들은 잔치에 함께 할 수 있었는데,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여인들은 잔치에 들어갈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상황은 알겠는데 그래도 위에서 던진 질문들은 해소되지 않습니다. 동료에게 기름을 나눠주지 않은 것도 매몰차고, 신랑집에서 문을 열어주지 않는 것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푸는 열쇠는 바로 등불에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등불은 우리가 떠올리는 등불 즉 심지를 기름에 담가서 불을 켜는 등잔불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산상 설교에서 사람들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내려놓지 않고 등경 위에 둔다고 했을 때의 등불(λυχνος)과 여기서의 등불(λαμπάς)은 헬라어 원어가 다릅니다. 마태복음서는 둘을 구분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의 등불은 횃불(λαμπάς)이라고 번역하면 더 정확하게 다가옵니다. 예수님 당시 결혼식 행렬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은 자기 횃불을 들고 있어야 했습니다. 결혼 잔치가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일주일이나 계속되기 때문에 그 기간 동안 아무나 그 집에 들일 수는 없었기에, 횃불은 일종의 입장권과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횃불이 없으면 하객이 아니라 불청객이나 심지어 도둑으로 오인될 수 있었습니다(D. A. Carson, “Matthew,” in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vol. 8 (Grand Rapids: Zondervan, 1984), p. 513.). 그러니까 들러리들에게도 횃불은 단지 “밝히는 도구”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횃불이 없거나, 횃불이 꺼진 채로는 행렬에 낄 수 없고, 행렬에 끼지 못하면 문이 닫힌 뒤에 결혼식 손님으로 인정받을 수도 없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어리석다고 규정된 다섯 사람들은 정말 어리석습니다. 막대기에 솜이나 헝겊을 둘둘 말아 홰를 만들었다면 반드시 기름을 준비했어야 합니다. 기름이 없으면 횃불을 아예 켤 수 없고, 기름이 없으면 횃불을 지속해서 밝힐 수도 없습니다. 보통 횃불에 기름을 먹인 후 불을 붙이면 최대 2시간 정도 불이 지속되었습니다. 3절 말씀에 의하면 이들은 횃불은 준비하고 기름은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처음 말씀하셨을 때 전하고자 하셨던 뜻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고 기다린다면 그에 합당한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단지 기다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제 내용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의 원래 말씀입니다.
그런데 재림을 기다리던 초기 공동체는 신랑이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에 미리 준비해야지 나중에는 너무 늦다는 사실 또한 강조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깨어 있으라는 말을 덧붙인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지연될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절대 방심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예기치 않을 때 꼭 오신다. 그분이 오실 때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미 오신 다음에 준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언제나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13절에 “깨어 있으라”는 말의 뜻은 “언제든지 대처할 수 있도록 철저하게 준비하라”라고 읽어야 할 것입니다.
[어리석어(痴) 보지 못하는 자들의 밤]
오늘 제1성서의 출애굽 백성들이 통곡한 이유도 바로 이러한 어리석음에 기인합니다. 열두 지파의 정탐꾼들은 똑같이 사십 일 동안 가나안 땅을 살피고 돌아왔습니다. 그들이 가져온 과일은 그 땅이 정말 젖과 꿀이 흐르는 곳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열 지파의 대표들은 그 땅에 사는 백성이 강하고 성읍이 견고하다는 사실 앞에서 두려움에 사로잡혔고, 결국 좋은 땅에 대한 악평을 퍼뜨리기에 이릅니다(민 13:32). 갈렙과 여호수아와 보았던 같은 사실을 보고도 이들은 다른 결론에 이릅니다. 이것은 정보의 차이라기 보다 보는 방식의 차이입니다. 두려움이 사실의 한쪽을 가리고, 부분이 전체인 양 왜곡되어 사실이 더 이상 온전한 사실로 기능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온 회중은 그 왜곡된 보고에 휩쓸려 통곡하며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급기야 새로운 지도자를 세워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여호수아가 설득하려 했지만, 이미 공포에 사로잡힌 온 회중은 모세와 아론, 갈렙과 여호수아를 돌로 치려고 합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마음이 잘못된 판단을 불러오고, 공포에 휘둘린 마음이 불길 같은 감정을 일으켜서 계속 어리석은 판단과 행동을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이성을 가진 존재들이고 합리적으로 사유할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흔히 하는 말로 “뚜껑이 열리면”, 즉 분노에 사로잡히거나, 불안에 휩싸이거나, 공포와 두려움이 몰려오면 우리의 사유 능력은 온전히 작동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누구나 그렇습니다. 도망가거나 공격하려고 들거나 마치 없던 일처럼 외면하거나 하지, 차분히 풀어갈 생각을 잘 못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평소에도 이미 인지하고 있어야 하고, 또 그런 일이 벌어질 때, 바로 알아차리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어리석음으로 인해 발생하는 고통을 줄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어리석음 한 가운데서 고집을 부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깊은 수렁에 빠지고 맙니다. 오늘 히브리서 저자는 이 광야 세대의 실패를 소환하면서, 그것을 단지 한때의 무지가 아니라 “반역”과 “완고함”이라 부르고 있습니다(히 3:8, 15). 한 번의 어리석은 판단이 아니라, 훈련되지 않은 마음이 반복해서 굳어진 결과라는 것입니다.
어설픈 경험, 불충분한 이해에서 나온 잘못된 판단과 섣부른 행동이 반복되면 잘 고쳐지지 않는 습관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다른 외부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간에 스스로 제 무덤을 파고, 고통을 지속적으로 불러들이는 일이 생기고 맙니다. 특히 우리가 맹목이라고 부르는 지점에서 이런 일들이 많이 발생합니다. 볼 수 없는 지점에서 보지 못하고도 본 것으로 착각하고, 모르면서도 안다고 하는 어리석음으로 인한 고통입니다.
어떻게 이런 우리의 한계들을 넘어설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뒤틀린 생각과 굳어진 마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요? 히브리서 저자는 이 완고함에 대한 처방으로 “오늘”이라는 말을 거듭 반복합니다.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아라”(히 3:7-8, 15).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는 시편 95편 말씀을 인용하는 것이지만, 그에게 오늘은 매일 새로운 오늘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안다고 할 때, 보통 경험에 근거해서 말하는데, 경험은 이미 지난 것이라 매일 새로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제의 그가 오늘 똑같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지요. 어제 완고했던 마음도, 오늘 다시 부드러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 순간순간을 새롭게 보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슬기로운 이들이 준비한 횃불도 2시간이면 꺼지게 됩니다. 그러면 다시 새 기름을 먹여주어야 하지요. 그래서 그렇게 매 순간을 늘 새롭게 여기는 것이 어리석은 완고함에서 벗어나는 길이 됩니다.
매 순간 새로운 눈을 갖기로 마음먹을 때마다 떠오르는 일화가 있습니다. 평생 시인 동주를 부러워하셨던 문익환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문 목사님의 아내이신 박용길 장로님께 들었습니다. 시인은 익숙한 것에서 새로움을 발견하는 이들이지요. 그렇게 새로움의 눈을 키워가시던 문익환 목사님께서 하루는 아침에 일어나셔서 등교를 준비하고 있는 큰아들(문호근 선생)을 보시고는 박용길 장로님께 이렇게 물으셨다는 것입니다. “저기 저렇게 말끔하게 차려입고 서 있는 저 말쑥한 청년은 누구인가?” 자기 아들을 아들로만 보지 않는 힘, 자기 부모를 그저 엄마 아빠가 아니라 한 시대를 살아온 사람으로 보는 눈, 늘 보아왔고 익숙한 것에서 잠시 떠나 그동안 보지 못했던 낯설고 새로운 감각을 익히는 일, 그 일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이라고 하는 그날그날, 서로 권면하여, 아무도 죄의 유혹에 빠져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히 3:13). 히브리서 저자는 어리석음을 극복하는 일은 홀로 수행하는 개인기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말합니다. “날마다 서로” 권면하는 일, 즉 공동체적 훈련이라고 합니다. 슬기로운 처녀가 어리석은 처녀에게 기름을 나눠 줄 수 없었던 것은 인색해서가 아닙니다. 그 상황에서는 나눌 수 있는 여유의 기름이 없었기 때문이고, 또 우리가 준비해야 하는 것은 각자의 몫일 수밖에 없다는 뜻도 내포합니다. 그러나 각자가 저마다의 것을 준비할 수 있도록 서로를 일깨우는 일, 그것은 얼마든지 함께할 수 있습니다. 슬기로운 처녀가 조금 여유와 동료애와 관심이 있었다면 어리석은 처녀들이 기름을 준비했는지 하지 않았는지를 미리 챙겨주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향린 공동체가 서로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매일 다가오는 오늘의 세계는 어제를 이어가는 것도 있지만 어제와는 다른 내일이 다가오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매 순간 다가오는 이 새로운 오늘을 감당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요? 그리고 그 준비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저는 여호수아에게서 그 가능성을 발견합니다. 여호수아는 열 지파의 대표들과 똑같은 정탐 보고를 들었지만 전혀 다른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어떻게 그는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고 담대할 수 있었을까요? 원래부터 타고난 두둑한 배짱을 지닌 것일까요?
[실전 경험의 중요성과 기도하는 사람]
여호수아가 열 명의 정탐꾼과도 다르고 일반 백성과 달리 이런 지도력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실전 경험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시종이었습니다. 그래서 늘 모세와 함께 합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배우게 됩니다. 여호수아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을 때도 함께 했습니다. 즉 여호수아는 일상에서부터 매우 중요한 결정의 순간에도 늘 함께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출애굽기 17장에 보면 하나님의 백성이 르비딤 광야에서 물이 없어 고난을 겪는 데다가 아말렉 족속의 공격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설상가상이고, 엎친 데 덮친 격인데, 그때 여호수아가 나아가 아말렉을 물리칩니다. 이렇듯 여호수아는 실전에서 계속 훈련을 통해 실력을 쌓았던 것입니다.
이런 실전의 경험을 통해서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어떻게 대하시는지, 자기 백성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몸에 익혔습니다. 그래서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바라볼 때도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분석과 판단을 하였고, 열지파 대표 정탐꾼들의 부정적 생각과 백성들의 공포감을 극복하여 약속의 땅으로 신앙의 백성들을 인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후 제자들이 예수님의 뒤를 이어 활약할 수 있었던 것도 예수와 함께한 숱한 시간들 속에서 실전 경험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향린교회의 모든 교우들도 그런 실전 경험을 골고루 쌓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는 아홉 개의 부서와 다양한 위원회 소모임이 있습니다. 향린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하여 어느 신도회나 한 부서, 소모임 참여하여 향린의 일부를 알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향린의 전부는 아닙니다.
향린의 새교우로 왔다면 제 생각에는 각 부서를 한 3년씩 경험해보고 나서야 향린의 전모가 어느 정도 보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도 2002년에 향린의 새교우로 왔었습니다. 그때부터 부목사로 사역하기까지 12년 동안 향린에서 느낀 것은 까고 까도 늘 새로운 것이 등장하는 양파와 같은 교회라는 생각이었습니다. 늘 새롭고 배울 것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버나드 로너간 신부님은 우리가 날마다 진보하는 성숙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늘 네 가지를 하라고 요청합니다. 그것은 ‘주의 집중하라’, ‘지성적으로 행동하라’, ‘합리적인 사람이 되라’, ‘책임감을 가져라’입니다. 무엇인가를 경험할 때, 집중하여서 핵심이 되는 알맹이를 건져냈는가? 아니면 대충 그냥 건성 건성으로 넘겼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경험한 다음에 그것을 이해할 때는 “그런가?” “정말 그런가?”라고 되물으며 우리의 지성과 이성을 십분 활용해야 합니다. 내가 이해한 부분이 정말 맞는가를 물으라는 것입니다. 합리적인 사람이 되라는 것은 개연성과 연결됩니다. 내게 옳다고 여겨지는 것이 남에게도 옳은가, 공동체 전체에게 합당한가, 누가 생각해도 그렇다고 할 수 있는가를 점검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열린 귀가 필요하지요. 남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민주주의는 그래서 다수결이라는 차선책을 어쩔 수 없이 선택합니다. 내가 옳다고 여기는 것을 다수가 아니라고 할 때는 우선 나를 돌아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향린교회는 정말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고 많은 부서와 소모임이 있습니다. 이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저것이 없으면 이것도 영향을 받습니다. 해야 할 당위가 있고, 하기 어려운 현실도 있습니다. 이런 복잡함을 이해해야 합니다. 어려운 것을 쉽게 풀려고 하고, 장기적인 것을 단기적으로 해결하려고 할 때, 무리가 되고 생각지 못한 어려움을 또 겪게 됩니다. 집중해서 경험하고 제대로 이해하여 타자와 공동체에게도 개연성이 있다고 판단되었다면 이제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합니다. 나의 행위가 나뿐만 아니라 공동체 전체를 선하게 나아가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로만 하고 책임지지 않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그것은 위선이니까요.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실제로 내 행위를 통하여 새로운 가능성들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또 부족한 부분들은 내가 채울 수 있도록 책임 있게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향린교회의 진보성을 말할 때, 어떤 입장에 서는가,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는가 하는 물음 못지않게 우리의 폭과 깊이가 얼마나 넓고 깊은가를 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생명, 평화, 정의의 가치를 전면에 내세우는 분이시지만, 놀랍게도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시는 분”(마 5:45)이시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능력과 여호수아와 갈렙의 전투력이었다면, 돌을 들어 치려는 백성들에 맞서 혼찌검을 내 줄 수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 백성의 자세가 아닙니다. 기독교의 이상은 원수마저 사랑하고, 나를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같은 신앙공동체 내부에서 어느 한 부서의 주장이나 강조가 다른 부서나 소모임을 내치거나 제외하는 방식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우리는 어떤 방향이나 입장만큼이나 수용의 폭, 사랑의 넓이를 키워야 하고, 상처받는 마음으로부터 상처를 받을 각오를 하는 마음으로 변화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받은 상처, 즉 피해를 가지고 전능성을 발휘하려면 바로 그 피해를 극복하고 용서하는 것에서 드러나야 하는 것이지, 누군가를 향한 혐오와 적대와 무시와 비난을 통해서 그 피해가 회복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참된 가치가 흔들리고, 세상의 온갖 주장들이 난무하는데, 그리스도인들마저도 생각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습니다. 애굽에서 빠져나와 광야의 길을 걷는 동안 백성들은 늘 지도자에게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았습니다. 그것은 백성들이 긴 안목과 장기적인 포석을 놓을 만한 실력이 없고, 전체를 보는 안목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앎과 믿음이 적기 때문에 작은 곤경에서도 견디지 못하고 흔들립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다릅니다. 지도자는 이런 여호수아의 안목을 지녀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파악하여 그 길을 가고자 정했다면 끝까지 지속시킬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평신도 교회의 정신을 이어서 목회와 선교에 주체적으로 참여할 때, 여호수아의 이런 지도력을 우리 모두가 지녀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각 부서와 신도회에서 요청되는 자리와 역할에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책임 있게 감당하는 이들이 많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이 안목과 실력을 또 어디에서 얻은 것일까요? 왜곡된 정보 속에서 공포에 쌓인 백성들이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했을 때, 가나안에 갈 수 있다고 말하는 갈렙과 여호수아에게 돌을 들어 치려고 했을 때에도 여호수아는 하나님을 거역하지 말라고 담대하게 말합니다. 여호수아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실전 경험 못지않게, 그가 늘 하나님과 함께 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27장 1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평가하시기를 “여호수아는 영감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옛날 번역에는 “여호수아는 신에 감동된 자”라고 나옵니다. 이것은 여호수아가 평소에 늘 기도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고 늘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물었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가라 하면 가고 멈추라 하면 멈춥니다. 절대 내 마음대로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안목에서는 전혀 새로운 것이 보입니다.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보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영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여호수아는 자신의 영을 가장 잘 받아들이고 이해하였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 속에서]
여호수아와 같은 신앙에 이른 사람은 어떤 사람이 될까요? 제가 생각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도마복음서에는 이런 말씀이 전해집니다. “예수가 말씀하셨다. ‘나는 모든 것들 위에 있는 빛이다. 나로부터 모든 것이 나왔고, 모든 것이 나에게로 돌아온다. 나무 한 조각을 쪼개어 보아라, 내가 거기 있다. 돌 하나를 들어 보아라, 너희는 거기서 나를 발견하리라.”(77장) 여러분이 신앙의 진보를 이룬다면 평범한 일상, 존재하는 모든 것에서 주님 예수와 거룩한 하나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위대함도 실은 광야 사십 년, 모세 곁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킨 그 평범한 시간 속에서 준비된 것이었습니다. 전투에서의 화려한 승리가 그를 만든 것이 아니라,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자리에서의 훈련이 그를 만들었습니다.
노자 『도덕경』 2장은 세상을 움직이시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특징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것을 만들어내면서도 말을 하지 않고, 만든 것을 제 것이라 하지 않으며, 한 일에 기대지 않으며, 공을 이루고서도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머물지 않기 때문에 바로 사라지지 않는다.(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弗居. 夫唯弗居, 是以不去.) 여호수아는 가나안을 정복한 뒤에도 자신을 왕으로 세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함께한 그는 자기가 세운 공적을 소유하지 않았기에, 그 뒤를 사사(士師)들의 시대가 자연스럽게 이을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횃불을 밝힙시다. 두 시간만 해 봅시다. 그리고 계속 이어갈 수 있도록 기름도 준비합시다. 그렇게 하다가 주님이 오시면 함께 잔치를 벌입시다. 그러나 주님이 오시지 않아도, 쪼갠 나무 한 조각, 발길에 차인 돌멩이 하나에서도 우리는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늘 주님과 동행하시는 여러분 되시길 빕니다.
잠시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전국의 믿음의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횃불을 준비하십시오.
기름도 준비하십시오.
언제나 우리 곁으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