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향린교회 소개

향린교회소개_표지.jpg

 

향린교회(담임목사: 김희헌)는 서울 종로구 경희궁2길에 위치하고 있는 도심지 교회이다. 비록 그 규모는 크지 않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한국을 대표할 만한 교회로 알려져 있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서울노회에 소속되어 있는 향린교회는 다른 교회와 달리 독특한 성격의 교회로 출발하였다. 따라서 오늘의 향린교회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출발부터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1) 향린교회의 창립정신

 

민족상잔의 비극인 6.25의 소용돌이가 채 가시기도 전인 1953년 5월 17일. 폐허로 변해 버린 서울 한복판에서 안병무, 홍창의 등 12명의 젊은 신앙인들이 한 교회를 창립하였다. 이들 창립자들은 모두 신학을 전공한 바 없는 평신도들로서 학창시절부터 신앙동지로 지내오던 중 민족과 교회가 직면한 위기를 뼈저리게 체험하면서 이를 극복하려면 새로운 신앙공동체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고 믿고, 이를 위해 교회를 창립하게 된 것이다. 이렇듯 향린교회의 창립에는 민족의 고난으로서의 6.25전쟁 체험과 그 고난 가운데서 철저하게 무능했던 교회에 대한 체험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들은 민족의 위기에 둔감하고, 민족의 고난을 외면한 채 교파분열과 교권싸움으로 영일(寧日)이 없었던 당시의 기성교회를 새롭게 갱신하려는 열정을 갖고, ① 생활공동체 ② 입체적 선교공동체 ③ 평신도교회 ④ 독립교회라는 네 가지 창립정신을 내세웠다. 또 저들은 자기들의 공동체를 "향린"이라 이름 붙여 스스로 "향기 나는 이웃"(香隣)이 되기로 결단했다.

 

(2) 일반교회로의 전환과 급속한 성장

 

서울 중구 남산 기슭에 자리를 잡은 향린교회는 초대교회처럼 공동체생활을 하면서 반(半)수도원적인 형태의 생활공동체로 시작되었다. 이 교회의 창립 동지들은 아무 교파에도 속하지 않은 초교파 교회였고 그런 의미에서 독립교회였다. 어떤 목회자도 모시지 않은 평신도교회였다. 목회자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기존형태의 교회가 아니라 모든 교인이 목회자처럼 주체적으로 선교에 직접 참여하는 평신도교회를 이상적인 교회의 형태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또 교인 모두가 각자의 직업을 통하여 입체적이고 유기적으로 선교해 나간다는 것이 저들의 처음 생각이었다. 이것이 입체선교 또는 입체적 선교 공동체였다.

 

하지만 창립 때 내세웠던 높은 이상과 꿈은 상황이 변화면서 하나씩 무너져갔다. 처음 출발했을 때 12명에 불과했던 교인이 같은 해 12월에는 약 50명이 되었고, 그 다음해에는 85명, 그리고 그 다음 해에는 135명, 교회 창립 후에는 150명에 이르게 되었다. 이렇게 교회가 알려지고 성장하게 되면서 공동체 교회는 일찍이 무너지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창립자들 중 여러 명이 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됨에 따라 교회의 처음 모습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변화될 수 밖에 없었고, 독립교회로 있은 지 6년만인 1959년 3월에 여러 가지 현실적인 이유로 한국기독교장로회에 가입하게 되었다. 더구나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회가 점차 다원화되고 전문화되어 더 이상 장로들만으로는 교회를 꾸려나가기가 힘들어졌다. 그래서 담임목사를 청빙하는 문제가 깊이 있게 논의되었고, 결국 1974년 10월 김호식 목사가 제1대 담임목사로 취임하게 되어 향린교회는 창립 후 21년 만에 목회자를 모시는 교회가 되었다. 이로써 향린교회는 일반교회 형태로 전환하였다. 김호식 목사는 당시 세로 시내 경동교회 부목사, 일본과 미국에서 유학한 경력의 소지자였다.

 

김호식 목사가 담임목사로 시무하는 동안 향린교회는 숫자와 재정 면에서 큰 발전을 이룩했다. 하지만 향린교회가 처음 지향했던 모습에서는 점점 멀어져갔고 오히려 대형교회를 지향하기에 이르렀다.

 

(3) 창립정신으로 되돌아간 향린교회와 시련

 

이에 1983년 창립 30주년을 맞아 청년들은 향린의 어제 오늘 내일을 조명하는 심포지엄을 개최하고, 향린이 창립 정신으로 돌아가기를 호소했다. 이때부터 교회의 방향성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기 시작했고, 이 와중에서 1986년에 김호식 목사가 사임하게 되었다.

 

이에 향린이 지향해야 할 교회상과 그런 교회를 목회하기에 적합한 목회자상에 대해 합의를 한 후 1987년 1월에 홍근수 목사를 모시게 되었다. 그러니까 교회 창립 후 34년만에 2대 담임목사를 모시게 된 것이다. 홍 목사는 유학과 목회로 13년 가량을 미국에 체재했던 철학박사 학위 소유자인 신학자요 목회자였다. 홍 목사는 취임 직후부터 한국사회의 구조적인 악을 비판했으며, 그것에 의해 시달리는 억울한 민중에 대한 관심을 강조했다. 특히 모든 구조악의 원천인 민족분단의 벽을 허물고 남북이 평화적으로 통일해야 함을 역설했다. 이런 홍 목사의 설교와 대사회적인 활동에 대해 찬반 양론이 갈렸고, 결국에는 교회가 내분에 휩싸여 홍 목사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향린을 떠나 새로운 교회를 창립하기에 이른다.(결국 이 교회는 후에 김호식 목사를 담임목사로 모시고 "예닮교회"를 설립하였고, 후에는 우리 교단의 서울북노회에 가입하였다.) 교회 내분 이후 향린교회는 1991년에 담임목사가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는 또 다른 시련을 맞게된다. 하지만 향린 교우들은 홍 목사가 1년 6개월의 형을 치르는 동안 일치 단결하여 더욱 열심히 교회를 섬겼고, 불의와 싸우며 이 고난의 시기를 극복하였다.

 

(4) 향린교회 40주년 기념사업

 

앞서 밝힌 것처럼 창립 때 내세웠던 높은 이상과 꿈은 세월이 흐르면서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무너졌다. 그러나 창립자들이 가졌던 민족구원과 교회변혁이라는 꿈은 그 형태가 달라지고 모습은 바뀌었어도 결코 포기되지 않고 오늘도 여전히 향린 속에 살아 숨쉬고 있다. 향린교회가 1993년에 창립 40주년을 맞이하면서 전개했던 여러 가지 기념사업들이 그 구체적 증거일 것이다. 향린교회는 1993년에 창립 40주년을 맞아 처음으로 향린교회의 역사인 [향린 40년]을 발간하였고, 분단된 민족 앞에 [통일공화국 헌법(초안)]을 제안하고, 한국교회 앞에 [교회갱신선언서]를 발표했으며, 스스로를 나누어 강남향린교회를 분가시켰다. 이것들은 창립자들이 가졌던 꿈을 40년이 지난 당시의 상황에서 되살려 내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민족사와 유리되지 않는 "민족교회"로서의 자기 위상을 재 다짐한 것에 다름 아니다.

 

[통일공화국 헌법(초안)](1국가 1체제의 단일 통일국가 헌법 초안으로 모두 7장 120조로 이루어져 있음)의 발표는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누구나 통일의 당위성을 이야기하면서도 그 통일이 쉽게 올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통일된 조국의 헌법을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향린교회가 마련한 [통일공화국 헌법(초안)]은 통일운동이 단순히 통일의 과정뿐만 아니라 통일이후까지를 준비하고 고려해야 한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즉 [통일공화국 헌법(초안)]은 7천만 겨레의 염원인 통일이 이루어진 이후 그 통일조국이 지향하는 국가와 사회상의 응축형태를 제시함으로써, 우리가 어떤 통일을 지향해야 하는가를 분명히 보여준 것이다. 이 발표는 당시까지 통일이후에 제기될 문제를 미리 점검하고 확인해 보지 못했던 통일운동단체와 학계에 적지 않은 파문과 충격을 주기에 족했는데, 이 초안이 발표되었을 때 보여준 언론의 관심이 이를 증명한다.

 

[교회갱신선언서]에서 향린교회는 새로운 신앙고백을 제정하고 이에 기초하여 한국교회의 문제와 병폐를 진단하고 이의 갱신을 호소하였다(자료① 참조). 향린교회는 이 선언을 발표한 이후 자신도 개혁의 대상임을 자인하며 교회 내에 교회갱신위원회를 설치하여 스스로 선언한 바를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를 연구하였고, 1995년 종교개혁주일에는 이를 구체화하여 [교회갱신실천결의]를 발표하였다. 이후 향린교회의 목회와 선교는 이때 제시한 방향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다.

 

강남향린교회는 향린교회가 40주년 기념교회로 1993년에 강남 송파지역에 "분가"시킨 교회이다. 이것은 민족 공동체를 섬기는 교회라는 정신을 갖고 출발한 향린교회가 자기와 같은 정신을 가진 교회를 한강이남 지역에 세운다는 목적에서 추진해온 선교적 모색의 결실이었다. 향린교회는 이 교회의 창립을 "개척"이 아니라 "분가"라고 부른다. 그것은 대형교회를 추구하기보다는 교인이 일정한 수에 이르면 분가하여 선교하자는 창립자들의 분가선교론을 40년 만에 비로소 실천한 것이어서 더욱 의미가 깊었다. 그래서 향린교회는 강남향린교회의 창립에 필요한 제 경비(건물대여, 차량구입 등) 일체를 지원해 주었고, 부목사였던 김경호 목사를 담임목사로 파견했으며, 목회자가 생계 걱정 없이 소신 있게 목회를 해 나갈 수 있도록 자립할 때까지 목회자 사례비를 5년간 지원하기도 했었다(1차년도 100%에서 매년 20%씩 삭감). 또 강동 송파지역에 사는 교인 중 원하는 사람들을 강남향린교회에 참여하게 하였다. 그 결과 강남향린교회는 3년 만에 완전히 자립했으며, 현재는 150여명이 출석하고 있고 또 다른 교회를 분가하는 계획을 추진 중에 있다.

 

(5) 향린교회의 목회와 선교

 

앞서 밝혔듯이 현재 향린교회는 창립 40주년에 발표한 [교회갱신선언]과 이를 구체화한 [교회갱신실천결의]가 제시한 세 가지 갱신 방향에 따라 목회와 선교를 수행하고 있다. 그 세 가지 방향이란 다음과 같다. 한국교회의 예배와 문화는 민족 정서를 담아 낼 수 있도록 갱신되어야 한다. 교회는 민주적 공동체로 갱신되어야 한다. 교회는 선교지향적 공동체로 갱신되어야 한다.

 

1) 민족 문화의 예배에의 수용

 

향린교회의 예배는 다른 한국교회의 예배와는 매우 다르다. 한마디로 그 특징을 말하라면 매우 한국적이라는 것이다. 우선 향린교회 주보를 보면 예배 용어가 모두 한글식 표현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열음찬송(개회찬송), 하늘말씀읽기(성서봉독), 하늘뜻펴기(설교), 정성드리기(봉헌), 다짐찬송(결단찬송), 세상으로보냄(파송) 등이 그것이다. 또 예배의 시작과 끝에 탁상종이 아닌 민족 고유의 악기인 징을 울리는 것도 색다르다. 회중 송영은 모두 "국악찬송"을 부르며, 회중 찬송 가운데 한 곡은 꼭 "국악찬송"을 부른다. 성가대도 적어도 한 달에 한번은 국악곡으로 찬양한다. 향린교회에서는 기존의 피아노와 오르간과 함께 국악실내악단 예향이 예배 음악을 반주하고 있다.

 

지난 1995년 9월에 창단된 예향(국악선교회, 국악반주단)은 외부에서 국악기 전문 연주자를 영입해 온 것이 아니라 교회 내부에서 국악에 관심 있는 교우들을 모집해서 조직한 것이다. 단원들은 창단 후 국립국악원 등에서 악기연주법을 배웠고, 처음에는 특별한 주일에만 연주하다가 1999년부터는 매주일예배 때마다 연주하고 있다. 교회는 예향을 위해 성가대와 버금가는 예산을 지원해 왔는데, 이제는 국악기 연주를 자신의 직업으로 삼는 사람이 나올 정도로 실력이 향상됐고, 또 전문 연주자도 단원에 동참할 정도로 유명해 졌다. 또 오랜 준비 끝에 2000년 초에는 예배 때 사용할 "향린 국악 찬송"을 발간했다. 여기 실린 150여 곡의 국악찬송들은 그동안 발표된 곡들 가운데 선별한 것도 있고, 또 특별히 작곡을 의뢰해 받은 것들도 있다.

 

향린의 한국적 예배는 상당히 유명해져서 교단총회는 외국에서 손님이 오면 향린교회를 방문하여 예배를 드리게 하고, 예향과 성가대는 여러 행사에 초청되어 국악찬양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 물론 성가대의 가운과 예향의 단복은 한복을 개량하여 만든 것이다.

 

또 향린교회는 주님의 만찬(성찬) 예식에 우리 고유의 음식인 떡을 사용하고 있고, 민족사적 기념일을 교회력에 반영하여 1994년부터 11월 셋째 주일에 지키던 추수감사절을 우리 민족 고유의 명절인 추석에 맞추어 추석 연휴가 끝난 뒤 첫 주일에 추석 감사절로 지키고 있다.

 

2) 교회 민주화

 

문민정부를 거쳐 국민의 정부에 이르면서 그동안 권위주의에 물들어있던 한국사회는 각 방면에 걸쳐 민주화가 급속히 진전되고 있다. 하지만 교회는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뒤쳐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최근 한국의 몇몇 대형교회에서 문제시되고 있는 담임목사세습 문제와 교회재산사유화 및 유용 문제는 이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평신도교회로 출발한 향린교회는 창립 때부터 교회 민주화 문제에 힘써 왔는데, 시련기를 거치면서 이의 제도화가 필요하다는데 공감하고 몇몇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였다. 첫째는 목회위원회의 설치요, 둘째는 목회자 및 장로 임기제의 실시가 그것이다.

 

향린교회가 소속한 한국기독교장로회는 다른 장로교회와 마찬가지로 목사와 소수의 장로로 구성된 당회에 모든 권한이 집중되어 있다. 이에 향린교회는 1994년 1월에 당회와는 별도로 목회위원회를 설치하여 교인 각계각층의 의견을 수렴하여 목회에 반영하고 있다(자료③ "목회위원회 규칙" 참조). 또 종신직인 목회자와 장로의 임기를 제한하고 그 신임을 직 간접적으로 물을 수 있게 제도화했다(자료④ "목회자 및 장로 임기제" 참조).

 

교회의 민주화는 제도적 장치만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훌륭한 제도를 갖고 있다 해도 교인들이 그 제도를 활용하지 못하거나 활용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래서 향린교회는 이를 활용할 수 있도록 모든 교인들에게 문호를 적극 개방하고 있다. 우선 향린교회에 새로 등록한 교인은 의무적으로 새교우 가입식을 거치게 한다(새교우 가입식에 앞서 3회에 걸쳐 열리는 새교우 신앙강좌의 수강은 자율에 맡기고 있다). 이 자리에서 향린교회의 목회와 선교에 대해 동의하는 새교우는 선서(별첨자료 ○○참조)를 하고 향린교회 정회원이 된다. 향린교회 정회원은 누구나 공동의회 회원이 되며, 제직회 산하의 각 부 위원회의 활동에 참여할 자격을 갖춘다. 향린교회 제직회 산하에는 8개의 부서와 8개 위원회가 있는데, 현재 여기에는 제직(장로, 권사, 집사)뿐만 아니라 일반 평신도들도 참여하여 활동하고 있다.

 

3) 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향린교회의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하라면 그것은 단연 "선교하는 교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모든 교회가 선교에 열심이지만 향린교회는 그 내용이 좀 색다르다. 향린교회가 가진 역량의 한계상 모든 선교에 치중할 수 없어, 향린교회만 할 수 있는 특정한 분야에 치중해 왔는데 그 초점은 "민중과의 연대"에 있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시대 상황에 따라 조금씩 변화되어 왔는데, 그것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① 민중교회의 지원과 개척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뜻 있는 신학도들 가운데 일부가 신학교를 졸업한 후 자신의 목회지로 한국사회의 가장 밑바닥이라고 할 수 있는 민중현장을 택했다. 저들은 노동현장과 빈민현장으로 들어가 그들과 동고동락하며 그들의 아픔을 치유하고 빼앗긴 권익을 찾아주는 일에 매달렸다. 향린교회는 당시 많은 교회들이 꺼려하던 민중교회 목회자들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87년부터 1999년까지의 통계를 보면 모두 27개 교회에 총 204,670,000원을 지원했다. 저들에 대한 지원은 단순한 재정지원에 그치지 않았고 정기적으로 선교부원들이 방문하여 격려하고, 또 민중교회 목회자들을 초청하여 설교를 듣는 등 민중현장과 유리되지 않기 위한 노력도 기울여 왔다. 그리고 1988년 9월에는 경기도 안산 지역에 민중교회인 배동교회를 직접 개척하고, 후원회를 결성하여 물적, 인적 지원을 하기도 했다.

 

② 외국인노동자를 위한 의료선교

1990년대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한국사회에서는 외국인노동자의 인권문제가 새로운 사회문제로 대두되기에 이르렀다. 한국 노동자들이 꺼려하는 3D 업종의 인력공백을 아시아의 여러 가난한 나라들에서 코리안 드림을 안고 찾아온 외국인노동자들이 메우고 있었는데, 저들은 불법체류자라는 신분 때문에 임금 체불, 산업재해 등 온갖 고초를 겪고 있었다. 특히 의료보험이 없는 관계로 크고 작은 병으로 고생하는 저들을 돕기 위해 향린교회는 1996년에 선교부 산하에 의사, 간호사, 약사, 자원봉사자들로 구성된 의료선교위원회를 신설하고, 지금까지 매주일마다 저들을 무료로 진료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③ 농촌교회와의 자매결연과 유기농산물 직거래 운동

우루과이 라운드(Urugway Round) 이후 한국농촌은 이제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값싼 외국농산물의 수입이 자유화되게 되면 겨우 명맥을 유지해오던 농촌경제가 삽시간에 무너질 것은 너무도 뻔한 이치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한국기독교장로회 전국농민선교목회자연합회에서는 도시교회와 농촌교회와의 자매결연을 통해 농촌살리기 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는데, 1995년 5월에 향린교회도 전북 김제에 위치한 들녘교회(구 금평교회)와 자매결연을 맺기에 이른다(자료⑤ "자매결연공동선언문" 참조). 자매결연을 통해 향린교회 생명 환경위원회는 들녘교회 교우들이 생산한 유기농산물을 공급받아 교인들에게 판매함으로써, 어려운 농촌경제를 돕고 또 저들에게 유기농법을 권유함으로써 생태계를 살리는 선교를 전개하고 있다. 또한 일년에 몇 차례 교우들이 직접 들녘교회를 방문하여 농촌 일손 돕기에 참여함으로써 저들의 유기농사를 돕고 있으며, 자매결연 기념주일에는 의료선교위원회가 전 마을 사람들을 무료로 진료해 주기도 한다. 자매교회 관계는 단순히 생산과 판매 관계에 머무르지 않고 교우들간의 교류로도 이어지는데, 격년마다 들녘교회 전교인이 서울을 방문하여 향린 교우들의 가정에서 민박하며 우애를 돈독히 하고, 주일에는 들녘 향린 연합예배도 드리고 여로 곳을 관광하기도 한다. 특히 향린교회 교우들 중 들녘교회 근방으로 이사를 간 교우들은 들녘교회를 출석하며 열심히 봉사하고 있기도 하다(현재 10여명이 출석하고 있음).

 

④ 통일선교와 인권선교

향린교회가 전개하고 있는 선교 가운데 통일선교와 인권선교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그것은 지금 한국사회가 겪고 있는 모든 모순의 근원에는 민족분단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향린교회는 선교부 산하에 통일선교위원회와 사회부를 두고 각종 강연회를 개최하여 통일운동의 방향에 대해 연구하고, 나아가 통일에 방해가 되는 제반 법률의 철폐와 이들 악법으로 인해 희생된 사람들을 돕기 위한 여러 가지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1999년과 2000년에 가장 중점을 두고 전개한 사업은 "국가보안법 철폐 운동"으로 서명 운동과 국회에 편지 보내기 운동 등을 벌였으며, 1999년 12월 12일 인권주일에는 국회 앞에서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한 기도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또한 2000년 6월 4일 주일에는 김대중 대통령의 방북을 앞두고 "국가보안법 철폐와 불평등한 SOFA(한미주둔군지위협정) 전면 개정을 위한 거리 행진과 기도회"를 명동 일대에서 벌이기도 하였다. 또한 2002년 6월 24일에는 MD반대 기도회를 열었으며 2002년 7월에는 여중생 압사사건에 대한 거리홍보전 및 서명운동을 벌였다.

 

⑤ 환경선교

생명환경위원회에서는 아나바다(아껴쓰고, 나눠쓰고, 바꿔쓰고, 다시쓰는) 운동과 자매교회인 들녘교회(전북 완주군 이서면에 소재)의 농산물을 향린교우들에게 보급하는 등 생명을 살리기 위한 환경선교 등 향린교회의 선교를 분담하고 있다.

 

⑥ 기타

앞에서 언급한 것들 외에도 향린교회는 여러 가지 선교에 매진하고 있다. 매년 전체 예산의 약 25%를 선교비로 할애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이를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2000년 들어서면서 향린교회는 선교 역량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선교부 조직을 재정비하여 선교부 산하에 문서선교위원회, 의료선교위원회, 정보통신선교위원회, 복지선교위원회, 통일선교위원회를 두고 이들 업무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 선교부 유급 간사를 두기에 이르렀다.

 

(6) 끊임없이 갱신하는 교회

 

이상에서 향린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그 목회와 선교를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이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끊임없이 갱신하는 교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오늘 한국 땅에 향린교회를 왜 세우셨을까를 묻고, 하느님의 "바른" 도구로 쓰임 받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 스스로를 갱신하는 교회가 바로 향린교회이다. 아니 그런 교회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교회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비록 부족하고 불완전하지만 한국 땅에 향린교회를 세우시고 역사의 중요한 매 순간마다 당신의 도구로 써주신 하느님께 감사 드리며, 앞으로 향린교회가 갱신하는 모습을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하기 바란다.

 

(7) 새로운 희년을 향한 교회

 

2013년 5월에 향린교회는 창립60주년을 맞이하여 희년을 선포하고 새로운 희년을 향한 발걸음을 내딛었다. 이에 즈음하여 지나온 60년을 돌아보고 새로운 60년을 시작하면서 교회개혁과 사회변혁을 위한 일에 더욱 노력할 것을 다짐한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