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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예수의 제자 | 김희헌 | 2023-06-25

by 김희헌 posted Jun 25, 2023 Views 197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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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3-06-25

예수의 제자 (21:8~21, 6:1b~11, 10:24~39)

230625. 성령강림절4, 남북화해주일

 

[소감과 인사]

오늘은 우리 교회에서 하는 저의 마지막 하늘뜻펴기일 것 같습니다. 지난 6년의 삶에 보람과 고통이 교차합니다만, 지금 심정은 잘 마쳤다는 홀가분함보다는 교회에 짐을 남겼다는 생각에 무겁습니다. 광화문 시대를 시작하는 때에 안식년을 떠나는 것도 그렇지만, 담임목사 중임 문제로 교회에 논란이 생겼고, 그 일로 인해 공동의회를 거치는 동안 결과가 어떻든 여파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상황이 오지 않기를 바랐지만, 교회 안의 중재 작업이 원활하지 못하여, 결과적으로 난감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교우들의 지혜가 필요한 때입니다.

되돌아보면 아쉬움이 남습니다. 6년 전 교회에 부임하였을 때, 첫 만남의 설렘이 지나기도 전에 교회 안에 흐르고 있는 갈등의 골을 경험했습니다. 목회를 시작하자마자 재개발대책위원회의 교회 매각 작업에서 생긴 문제로 시무장로 권고사직의 건을 다루어야 했고, 분열된 교회 상황에서 사려 깊은 조정이 어려운 시간이 많았습니다. 부임한 지 반년밖에 되지 않은 때에 저는 2주간 단식을 하며 교우들의 화합을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간의 교회 상황에 과문한 담임목사의 낭만적 행동은 결과를 얻지 못하고 끝났습니다.

그 후, 갈등의 지점에서 여러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는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도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의 부족과 부덕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은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 시간, 상처를 입은 교우들에게 용서를 구합니다. 또한, 함께 어려운 일을 헤쳐가며 보람을 느끼게 해주신 교우들, 과분한 사랑을 베풀어주신 교우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그 사랑을 앞으로 잘 간직하겠습니다.

저의 지난 목회에는 번민의 시간이 많았습니다. 진보적인 신앙공동체를 꿈꾸며 걸어가는 발걸음이 더디게 느껴지고, 에큐메니컬 운동을 드넓게 해보고자 했던 열망이 벽에 갇힌 자괴감으로 흐를 때도 있었으니 저의 부족함이 컸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 크고 작은 내홍도 많았는데, 다양한 목소리를 아우르지 못한 담임목사로서 져야 할 숙명이 있다고 봅니다. 더욱이, 광화문에 새로운 예배당을 짓고 재출발할 시점에 갈등으로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에, 담임목사가 먼저 결단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최근 몇 달간 저의 선택으로 인해 가슴 아픈 경험을 하신 분들에게는 양해를 구합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교회는 종종 갈등과 대립을 겪습니다. 하지만,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교회가 지닌 자정 능력을 저는 믿습니다. 예전에 신학생들이 교회에 회의를 느끼면서 상담을 요청하면, 제가 해주던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는 어머니의 품과 같은 곳이다라는 말입니다. 저의 그 믿음은 아직 변함없습니다. 사람들의 주장과 행동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 같지만, 그리스도를 머리로 둔 교회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살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동하는 하나님의 역사는 사람들의 계산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막막하게 느껴지는 미래도 우리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만들어가실 것입니다. 따라서, 공동체 안에서 갈등이 일어날 때는 자기 뜻을 관철하려고 조급해하기보다는, 자기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선한 계획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는 것이 신앙인으로서 바람직 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섭리와 경륜 / 창세기 218~21]

오늘 창세기 본문에는 아브라함의 가족사에 얽힌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라와 그의 여종 하갈, 그들의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을 둘러싼 갈등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의 계획을 다 알지 못한 사람들이 문제를 빚더라도, 하나님의 큰 섭리 속에서 생명의 풍성함을 더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는 점을 말해줍니다.

이야기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길을 나선 지 십 년이 흘렀는데, 많은 후손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사라는 궁리하게 됩니다. 자신은 자식을 갖기 힘든 70대 중반이 되었으니, 젊은 여종 하갈을 통해 아들을 낳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이스마엘을 얻게 되었는데, 여종이었던 하갈이 아들을 낳은 후에는 자신을 업신여기는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십오 년이 흘렀는데, 이번에는 나이 구십에 사라가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사라는 기뻐하면서 아들 이삭이 젖뗀 날을 기념하여 잔치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하갈과 이스마엘이 어린 이삭을 놀리는 것을 보고, 그 둘을 쫓아내야겠다고 마음먹고 남편 아브라함을 설득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괴로웠습니다. 하지만, 사라의 요청대로 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얼마의 양식과 물을 주어서 하갈과 이스마엘을 광야로 내보냅니다.

성서는 이런 사태의 전개가 불가피하고, 또 마땅한 것으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 기독교인도 사라의 분노에 동조하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계보를 중심으로 역사를 기록한 창세기의 해석을 따릅니다. 설혹, 하갈과 이스마엘이 불쌍하다 하더라도,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처지를 가부장주의 시대의 한계 탓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여성신학의 도움을 빌려서 약자인 하갈의 관점에서 다르게 해석하는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다만, 성서의 관대한 정신을 편협하게 이해하지 않도록, 그래서 실제 역사가 흘러간 방향과는 다르게 자기만의 기억에 갇히는 일이 없도록, 분문에 나온 내용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광야로 쫓겨난 하갈과 이스마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시고, 그들의 목마름을 해갈하도록 샘을 주시며, 아버지 아브라함조차 불가피하다고 여긴 선택마저 선하게 인도하셔서, 마침내 이스마엘이 큰 민족을 이루도록 축복하신 내용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시절의 한계와 사람들의 불가피한 선택이 굴절과 비극의 기운을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거대한 경륜 속에는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계획과 인도하심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실제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며, 새로운 이야기가 탄생합니다.

이슬람의 경전 <쿠란>에는 그 이야기를 더욱 과감한 방식으로 기억합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장자 이스마엘이 알라()의 축복을 받은 적자(嫡子)였다고 기록하고, 신이 아브라함을 시험하기 위해 제물로 바치라고 한 아들 역시 이삭이 아니라 이스마엘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광야의 샘도, 훗날 아브라함이 돌아와서 이스마엘과 함께 제단을 쌓았는데, 그것이 오늘날 메카의 신전이 되었다고 이해합니다.

일반적인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이슬람의 해석을 불편하게 여길 것입니다. 더 나아가, 기독교 제국주의자들은 미국 정치학자 사무엘 헌팅턴과 같이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의 문명의 충돌을 불가피한 것으로 보고 싶겠지만, 성서의 가르침도 쿠란의 가르침도 그런 편협하고 적대적 방식의 해석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삭의 후손도 이스마엘의 후손도 모두 역사의 도전과 응전을 거치며 자신들의 고유한 문명을 건설해왔습니다. 히브리인들은 고난의 역사를 살아내며 예언 전통이라는 숭고한 정신문화를 인류에 선물했고, 아랍인들은 척박한 땅에서 절대적 가치를 숭상하는 사상과 종교를 세웠고, 철학과 과학을 발전시켜 인류의 부흥에 이바지했습니다. 서양의 르네상스도 이슬람의 도움이 없었다면 열리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역사의 진화는 단선적이지 않으며, 인류는 다양한 방식으로 생명의 풍성함을 이룩해 갑니다. 다만 우리가 물을 것은, ‘거기 생명이 있는가? 진정한 생명력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두려워할 분을 두려워하라 / 마태복음 1024~39]

마태복음 10장은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그들에게 주신 교훈의 말씀입니다. 그 내용은 두 가지인데, 먼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라는 것이요, 그다음에는, 예수를 따르는 올바른 길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26절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여기서 말하는 그들이 누구인지 분명치 않으나, 뒤에 나오는 문맥을 보면, 그들은 덮어두면 벗겨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숨기면 알려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위선과 가면으로 정치를 하며, 질서와 권력으로 누르는 사람들입니다.

앞에 나오는 내용을 보면, 그들은 제자들을 법정에 넘기며, 회당에서 매질을 하는 사람들로서, 낡은 질서의 관리자들입니다. (10:17) 그들은 예수를 가리켜, 귀신의 두목 바알세불이라고 부르며 위협했습니다. (10:25) 그들은 자신의 힘으로 상대방의 몸을 죽일 수도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두려워할 분은 몸만이 아니라 영혼도 멸망시킬 수 있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예수의 역사의식이요, 인생관이기도 합니다. 그의 삶은 온전히 하나님을 향한 절대 신뢰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고통과 실패의 상징인 십자가의 길을 걸은 그의 선택에서 나타납니다. 그가 비록 아버지 나를 왜 버리셨습니까?’ 하고 외마디 비명 끝에 죽어갔지만, 그 뒤에는 거대한 믿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는 몸을 죽일 수 있다고 위협하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진실이 감추어지고 마는 것 아니냐며 초조해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자기 삶으로써, ‘진정으로 두려워할 분이 누구인가를 말해주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이 말씀에 대한 문자적인 해석은 오해를 일으킵니다. 중요한 것은 분별입니다. 삶의 현실에서는 평화를 선택할 때가 있고, 칼을 선택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무엇을 위한 평화인가, 누구를 향한 칼인가, 왜 휘두르는 칼인가?’를 분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떻게 그런 분별이 가능할까요?

예수는 그 기준을 십자가를 지는 삶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내게 적합하지 않다.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10:38~39) 십자가를 지지 않기 위해 평화를 말하는 것, 자기 목숨을 잃지 않기 위해 칼을 쥐는 것, 거기에서 위선과 죄악이 비롯됩니다.

 

[예수와 함께하는 삶 / 로마서 61b~11]

예수의 가르침을 진지하게 생각한 사람은 바울입니다. 그는 로마서 6장에서 이렇게 묻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러 있어야 하겠습니까?이 말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마음의 자세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이 죄의 사슬에 묶여 있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 죄 가운데 머물러 있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윤리 의식에 관한 문제라기보다는, 그리스도인의 존재 방식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이 이어지는 세례에 관한 설명입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모두 세례를 받을 때에 그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여기서 세례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그와 함께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죽음은 죄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는 죽음이요, 따라서 그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는 소생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에 관한 신비로운 삶의 역설을 의미합니다.

십자가를 지면 죄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될 것이지만, 십자가를 지지 않고 자신이 살려고 하면 죄의 노예로 죽어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 그것은 죽으면 산다삶의 역설을 말해줍니다. 바울은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요, 그리스도가 가르쳐 준 삶의 신비라고 말합니다.

예수의 제자로서 앞으로 우리가 세워갈 신앙공동체의 윤리는 바로 이 근본 목표를 이루는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이 살기 위해 남에게 죽음을 요구하는 것은 세상의 질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교회에 모인 이유는, ‘죽어서 사는예수의 신비를 배우고 훈련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공동체가 존립하는 이유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어리석은 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거기에 생명의 길이 있습니다. 교회의 근본 목표, 예수의 제자들이 이룰 근본 과제는 십자가를 지는 삶에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교회 민주주의를 이루고, 평신도를 중심으로 한 프로테스탄트 전통을 세운 것은, 새로운 역사를 열기 위해 필요한 기본 요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본 요건과 근본 목표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민주주의나 평신도라는 것 자체가 교회의 목표는 아닙니다. 교회의 근본 목표는 십자가를 지는 공동체가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기본이란 근본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기본이 근본을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교회 민주주의라는 기본 훈련을 하는 것은, 예수의 제자로서 살아가야 할 근본 과제를 이루기 위함입니다. 향린이 신앙공동체로서 근본적으로 추구할 것은, ‘진보적 교회라는 이름도 아니요, ‘평신도 교회의 전통도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는 교회여야 합니다.

우리가 부단히 진보하려는 것은 시대의 십자가를 지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향기로운 이웃이 되는 길은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는 사람이 세워질 때 열립니다.

바울은 기독교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항을 명료하게 밝혔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면 그와 함께 다시 살 것입니다. 바로 신앙생활의 이 근본 과제를 이루기 위한 믿음의 선한 경주가 오늘의 혼돈 속에서 다시 시작되기를 바랍니다.

침묵으로 기도합시다.

 

[파송사]

 

 

 

 

예수께서 우리의 길을 말씀해주십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내게 적합하지 않다.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이 말씀을 간직한 예수의 제자가 되어, 우리를 새로운 시대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깊이 누리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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