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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라 | 김희헌 | 2023-04-09

by 김희헌 posted Apr 10, 2023 Views 119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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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3-04-09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라 (31:1~6, 3:1~4, 28:1~10)

2023.04.09. 부활주일, 씨뿌림주일

 

[부활 신앙이란 무엇일까? 부활 신앙의 두 가지 왜곡]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 모두의 기쁨과 소망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독교의 부활절은 예수의 부활 사건에 관한 성서의 전통을 따르고 있지만, 교회의 절기로 정해지는 과정에는 다른 두 가지 영향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이집트에서 탈출한 사건을 기념하는 유대교의 유월절이고, 또 하나는 봄의 시작을 기념하던 서구 민간신앙의 영향입니다. 그래서, 기독교회가 기념하는 부활절에는 해방의 사건이라는 의미와 생명의 소생이라는 의미가 함께 담겨있다 하겠습니다.

성서에서 부활을 가리키는 단어는 두 가지입니다. ‘에게이로’(ἐγείρω)라는 동사와, ‘아나스타시스’(ἀνάστασις)라는 명사입니다. 마태복음 28장을 보면, 무덤을 찾은 사람들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예수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셨다(egeiro).”라고 말하고(28:7),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나는 부활(anástasis)이요 생명(zoe)이다.”라고 말합니다. (11:25) ‘에게이로일어나다’(arise, awake)라는 뜻이요, ‘아나스타시스다시 서다’(aná+hístēmi, stand again, stand up)는 뜻입니다. 이 평범한 말에 신학적 의미가 붙으면서, ‘부활이라는 거대한 종교사상이 되었지요.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토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대인에게 기독교의 부활 신앙은 잘 믿기지 않는 신학적 스캔들(scandal)이 되곤 합니다. 그 책임은 일차적으로는 기독교 신학을 편협하게 이해한 교회에 있다고 봅니다. 기독교 교인에게도 때로는 부활 신앙이 걸림돌이 되고 마는데, 그 이유는 크게 보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의 부활을 사체가 소생하는 기적으로 국한해서 이해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부활을 저세상에서 이루어질 타계적인 사건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근대 이성의 시대를 지나오면서, 사람들은 이성의 검열을 통과하지 못한 사상은 거짓이라고 여겼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기독교 신학은 이성으로 모두 해명할 수 없는 부활을 단지 믿어야 할 교리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부활을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 기적으로 말하고, 그런 기적이 일어났기 때문에 예수가 특별한 분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교리적 믿음을 강조하는 것은 이미 이성의 시대를 지나온 사람들에게는 취약한 주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만 하더라도 중학교 때부터 부활한 예수를 만나고 싶었습니다. 만일 만난다면, 그가 바로 2천 년 전 갈릴리에서 활동한 그 유대인일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예수를 아직 만나지 못했습니다. 때로는 이런 발칙한 가정을 해보았습니다. 만일 부활하신 예수를 직접 자기 눈으로 봤다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본 얼굴을 그려서 비교해보면, 그 몽타주가 서로 같을까? 그걸 실행해보지는 못했지만, 그렇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런 생각조차도 불경하다고 여기는 교회의 분위기가 있는데요. 그건 아마도 그런 생각에 기초한 믿음이 허물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서 대담하고 솔직한 대화를 나눈 두 신학자의 이야기를 예전에 한 적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루터교 전통에서 성장하여 미국 오레곤 주립대 종교학 교수로 일한 Marcus Borg라는 신학자이고, 다른 한 사람은 영국 성공회를 상징하는 런던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의 주임신부였던 Tom Wright입니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동문수학한 이 두 사람은 신앙의 우정 속에서 신학 대화를 하고, 예수의 의미(The Meaning of Jesus : Two Versions)라는 책으로 냈습니다.

두 사람은 부활한 그리스도의 몸이 영적인 몸’(고전 15:44/46)이라는 점에는 동의했지만, 한 가지 점에서 의견을 달리했습니다. 그것은 예수의 부활이 죽은 몸(사체)의 소생하는 것까지 포함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들은 이런 가정을 해보았습니다. 만일 예수의 무덤에 비디오카메라를 설치하고 3일간 관찰한다면, 예수님의 시체가 다시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을까? ‘역사적 예수연구를 이끈 마커스 보그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고, 복음주의 신학에 영감을 준 톰 라이트는 그 일을 배제할 수 없다고 답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래전 신학교 세미나에서 저는 학생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서 이 문제에 대해서 논쟁을 하도록 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장의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 정도의 상식은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부활이란 단지 사체소생’resuscitation)의 신화가 아니요, 또한 과학적 이성에 거슬리는 부분을 모두 제거한 상태로 받아들이는 합리성만도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부활에 관한 성서의 진리는 기록된 문자의 역사적 사실성에 있지 않습니다. 성서의 부활절 이야기는 종말론적인 은유로 가득 차 있기에, 그 의미는 영적인 물음을 깊이 던질수록 진지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이점을 잘 이해한 사람이 계몽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입니다. 그는 이성에 대한 신뢰가 절정에 이른 시대에 이성의 자기모순과 한계를 말했지요. 이성이 분석과 판단을 종합한 끝에 만들어낸 산물이 결국 이율배반’(antinomy)에 이른다는 점을 발견하고, 진리는 이성의 추론만으로는 얻을 수 없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책 [순수이성비판] 서문에 고백하기를, “나는 믿음의 공간을 만들기 위하여 지식을 부정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라고 말합니다. 그 후의 기독교 신학은 부활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상징’(symbol)이 어떻게 우리 안에 살아있을 수 있는가에 주목해왔습니다.

부활에 관한 또 다른 문제는 부활을 이 세상의 죽음 이후에 저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반의 진실입니다. 죽음 이후의 삶에 관한 종교의 약속은 함부로 평가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일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미국 근본주의 신학의 영향을 크게 받은 한국교회가 기독교 신앙을 역사와 분리하여 관념적 종교로 변질시킨 데 있습니다. “예수 믿고 천당 간다.”라는 말로 단순화된 이 믿음은 사회가 암울할수록 어두운 현실을 견디는 힘이 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 신앙의 생동감과 책임의식을 약화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그런 타계적인 믿음을 미래에 얻을 보상으로 보면서, 현재의 삶을 호도하고, 예수의 가르침을 왜곡하는 문제를 낳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남기신 기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당신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옵시고,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는 기도를 공허한 것으로 만든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부활의 의미를 생각할 때 두 가지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부활의 진정한 의미는 사체가 소생하는 기적에 있지 않으며, ‘저세상에서의 영생에도 있지 않습니다. 대신, 톰 라이트는 하나님의 정의가 궁극적인 승리를 이룰 것이라는 믿음이라고 말하며, 마커스 보그는 현재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창조미래를 향한 새로운 삶의 방식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오늘 읽은 세 개의 성서 본문은 부활을 찾는 사람들에게 주는 말씀으로 그 내용은 다르지만, 가리키는 바는 같습니다.

 

[부활은 생명의 회복 / 예레미야 311~6]

먼저 예레미야는 생명의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부활의 의미를 말합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죽음 너머의 영생에 관한 가르침을 갖고 있습니다. 강조점은 서로 다른데, 기독교가 주목하는 점은 죽임의 질서를 이기는 데 있습니다. 성서는 주검을 둘러싼 사회적 관습이나 죽음에 관한 철학적 사색보다는 죽임의 질서에 관한 도전에 관심합니다. 죽음을 인간의 숙명으로 여기기보다는 당돌하게도 극복할 대상으로 묘사합니다.

바울은 호세아의 예언(13:14)을 인용하여,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라고 외칩니다. 요한계시록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는 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니,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라고 그려냅니다. (21:4)

이런 성서의 증언은 생물학적 불멸에 관한 신념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 필요한 신뢰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죽음의 힘이 지배하지 못하는 은총의 세계, 그것을 구성하는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믿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어떠한 죽음의 위협도, 환난도, 곤경도, 박해도, 굶주림도, 헐벗음도, 위협이나 칼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8:35)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펼쳐가시는 구원의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죽음의 질서로부터 회복된 삶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성서의 역사에서 부활 사상이 뚜렷하게 등장한 것은 기원전 2세기경이지만, 성서의 증언은 훨씬 이전부터 등장합니다.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이 생명을 회복하리라는 약속입니다. 그것이 예레미야서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일으켜 세우겠으니, 네가 다시 일어날 것이다.” (31:4)

예레미야가 말하는 부활은 삶의 회복입니다. 회복이란 과거 상태로의 복귀가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시작입니다. 그가 꿈꾼 삶의 회복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어서 시온으로 올라가 주 우리의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자!’ 하고 외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6) 부활이란 회복이요, 회복된 삶이란 하나님과의 동행을 의미합니다.

 

[부활 신앙, 위에 있는 것을 바라보라 / 골로새서 31~4]

부활이 영원한 생명에 관한 것이라면, 그 삶은 자기 몸의 불멸이 아니라 영원하신 분과 동행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오늘 골로새서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심을 받았으면,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여러분은 땅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지 말고, 위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십시오.” (3:1~2)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라라는 말은 현실을 떠나라는 말도 아니요,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삶의 책임감을 내던지라는 말도 아닙니다. 그것을 오해한 신학은 부활 신앙을 저세상의 것으로 만들고, 이 땅의 삶을 탐욕스러운 이전투구의 전쟁터로 만듭니다. 우리는 여기서 함석헌의 가르침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육체의 죽음 이후의 부활은 창조주의 몫이지만, 죽기 전에 있는 부활의 삶은 우리들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는 죽고 나서야 부활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죽기 전에 살아야 할 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씨이라야 산다” [저작집], 8:78)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라!’라는 골로새서의 이 명령을 함석헌의 시에서 발견합니다. “사람의 사는 길이 발끝에 있지 않고 저 먼 앞에 있다. 땅이 아니고 하늘에 있다. 지금 있는 것에 있지 않고 장차 올 것에 있다. 뵈는 것에 있지 않고 이치에 있다. 힘에 있지 않고 정신에 있다.”

 

[부활의 삶, 갈릴리로 가라! / 마태복음 281~10]

역사적으로 보면, 기독교 공동체는 부활 신앙을 생생하게 살아가는 방식으로 성숙해 왔습니다. 이 땅의 삶을 살면서 위의 것을 추구하는 부활의 삶이란 무엇일까요? 과거에는 부활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이란 교회에 소속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중세시대 천 년이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타락해가고 새로운 전환이 일어납니다.

종교개혁 이후 근대의 교회는 이성이 만들어낸 교리에 주목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믿음으로써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부활이란 마치 믿기지 않은 기적을 믿기만 하면 주어지는 보상처럼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런 지적 변질이 생겨나면서 부활 신앙은 다른 자리로 옮겨갔습니다. 오늘날 부활 신앙은 생명과 정의와 평화의 사건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마태복음은 그것을 갈릴리로 가라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부활절 아침 빈 무덤을 찾은 두 마리아에게 나타난 천사는 갈릴리로 가면 부활 예수를 만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께서도 무서워하지 말아라. 가서, 나의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러면, 거기에서 그들이 나를 만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갈릴리는 고난의 땅이자 생명의 땅입니다. 예수는 광야시험을 마치고, 갈릴리로 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할 제자들을 길러내었습니다. 부활의 그리스도는, 자신을 만나려면 갈릴리로 가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부활의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서는 오늘의 갈릴리로 가야 합니다. 오늘의 갈릴리는 위의 것을 추구하는 삶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펼쳐지는 생명의 현장입니다. 자신을 얽어맨 죽음의 사슬을 풀어버리고, 고난 속에서 생명을 건질 오늘의 갈릴리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부활절 아침 우리 마음에 예수의 말씀이 담기기를 바랍니다. 갈릴리로 가라! 위의 것을 추구하라! 생명의 씨를 뿌리며 삶을 회복하는 발걸음을 시작하라! 이 말씀이 우리 마음에 내려앉기를 바랍니다.

침묵으로 기도합시다.

 

[파송사]

위의 것을 추구하십시오. 하늘을 품을수록 낮은 곳을 향하는 부활의 신비를 바라보십시오. 오늘의 갈릴리로 가십시오. 생명과 정의, 평화를 위해 일하면서, 부활의 주님과 동행하십시오. 삶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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