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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조금 더 의롭기 위하여 l 정혜진 l 2021-12-5

by 김지목 posted Dec 07, 2021 Views 144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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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1-12-05

 

조금 더 의롭기 위하여

사무엘기하 11:27~12:10, 야고보서 2:20-26, 마태복음서 1:16-25

대림절2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복음서의 말씀은 대림절 기간이면 으레 생각나는 본문이지요. 예수가 어떻게 마리아에게 잉태되어서 마리아와 그녀의 정혼자였던 요셉의 아들로 자라게 되는지에 대한 그 사연이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잉태는 마태복음 118절과 20절에 두 번 언급된 것처럼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정혼자였던 요셉은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지요. 요셉의 입장에서는 약혼녀가 자신이 아닌 남의 아이를 임신한 상황이었을 뿐입니다. 요셉은 그 사실을 알고 조용히 파혼하려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결국 꿈에 천사의 계시를 받고, 그것에 따라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고 아이가 태어나자 아이의 이름도 천사의 말대로 예수라 짓습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는 마리아를 어머니로, 요셉을 아버지로 하는 가족의 일원이 된다는 것이 이야기의 골자입니다.

 

예수가 어떻게 태어나는가?’ 라는 질문, 어떻게에 주목할 때 이 본문에서 눈에 띄는 것은 성령으로라는 구절입니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이 구절을 이해할 때 우리는 동정녀 탄생과 같은 그리스도교 해석 전통에 영향을 받아 왔습니다. 마리아는 한 번도 남자와 성관계를 해보지 않는 동정녀의 몸으로 예수를 임신했다는 것이지요. 얼마 전 대학생 몇 명과 성경공부를 하면서 이 본문으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요. 함께 한 모든 학생이 이 본문을 소위 동정녀 탄생교리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본문이 뭔가 성령의 신비로운 작용에 의해서 생물학적 원칙을 뛰어넘는 임신이 일어났음을 말한다고 파악은 하면서도, 실제로 그게 가능하다고 믿는 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 본문에서 학생들은 무슨 의미를 읽어낼 수 있는지 막막해 하고 있었습니다. 저 같은 성서학자에게 중요한 질문은 이천 년 전 마태가 이 이야기를 쓸 때에 청중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었을까? 과연 흔히 생각하듯 동정녀 탄생이었을까, 혹 그것이 아니라면 다른 무엇이었겠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이 학생들의 막막함을 나누면서 이 본문을 오늘 우리 삶과 소통이 되도록 읽는 방법은 무엇일까도 중요한 질문이구나, 생각을 했습니다.

 

마태복음 본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16절은 아브라함에서 시작해서 다윗을 거쳐 예수의 아버지 요셉에게 이어지는 족보의 끝부분입니다. 16절 상반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다[(begot).]. /

 

이 구절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40명의 남자 이름을 듣게 됩니다. 마태는 11절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표현하더니 그것을 오직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부자(父子) 관계가 연속되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다 보니 남성들의 혈연관계로 가문의 존속을 서술하는 족보라는 틀 자체가 무척이나 가부장적으로, 또 남성중심적으로 느껴집니다(1:1-17).

 

그런데 놀라운 것은 AB를 낳고, BC를 낳고, CD를 낳고의 이 연속성이 16절 하반절에 와서, 무엇보다 족보의 정점으로 보이는 예수에게 와서 갑자기 깨진다는 사실입니다.

 

/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가 태어나셨다[(was begotten)].

 

이 구절이 16절 상반절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려면 요셉은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낳았다고 해야 할 것 같죠. 그런데 이야기는 아버지들의 이름으로 이어가던 족보를 중단시키면서 어머니 마리아로 문장을 시작합니다. 낳았다라는 능동태 동사를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다라는 수동태로 바꿉니다. 이렇게 이야기는 대체 아버지는 누구인가?’를 신비로 남겨놓습니다.

 

제인 샤버그(Jane Schaberg)라는 가톨릭 여성신학자가 있는데요. 그녀는 30년 전쯤 <사생아 예수(The Illegitimacy of Jesus)>라는 아주 도발적인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읽어보면 아주 진지한 역사비평 성서해석서입니다.이 책에서 샤버그는 마태가 말하는 성령으로는 어떤 방식으로든, 자의에 의해서든 폭력과 같은 타의에 의해서든, 마리아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을 가능성과 배치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깊이 동감하고, 이런 해석이 전복적이면서도 의미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마리아가 임신한 그 모든 과정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 스캔들이나 추문으로 보일 만한 것이라 해도 그 자체로 성령께서 일하시는 구원의 경험이 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고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마태는 족보라는 가부장적인 틀을 가져다 쓰면서도 그것을 비틀고 있습니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남성들만으로 이루어지는 부자관계의 연속성이 아니라 오히려 불연속성입니다. 그런데 마태는 이 불연속성을 그대로 놔두지 않고 요셉 이야기로 돌아가 다시 연속성을 만들어 냅니다. 118절부터 25절까지에서 볼 수 있듯, 요셉이 마리아와 태중의 아이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족보 속 어떤 인물도 보여주지 않은 전혀 새로운 차원의 연속성입니다.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여인이지만 그녀를 아내로 맞아 태어날 아이의 보호자가 되기로 결심함으로써 예수가 요셉이 속한 다윗 가문의 일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119절을 보면 마태는 이 새로운 연속성을 만들어낸 요셉의 의로움에 주목하게 합니다. ‘의로움은 무엇일까요? 워낙 다양하고 폭넓게 논의될 수 있겠습니다만, 성서적 맥락에서는 관계 안에서의 신실함이나 충실성과 뗄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 삶의 모든 관계는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약속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그 안에서 각자가 책임과 의무를 제대로 이행해야 합니다. 요셉과 마리아의 관계에서 의로움은 어떻게 실현될 수 있었을까요? 일차적으로 요셉의 입장에서 보면 정혼녀 마리아의 혼외임신은 정의로움에 대한 그의 감각을 심각하게 거스르는 것일 수 있었습니다. 구약 율법에 따르면, 약혼도 엄연히 결혼에 준하는 계약이어서,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것은 간음으로 여겨져 사형에 처할 만한 중죄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요셉은 마리아의 책임 방기를 탓해 당시 관습에 호소에 일종의 사법적 정의를 요구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는 이런 방식을 의로운 사람의 행위라고 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요셉은 어쩌면 한때 정혼자였던 여인과 태중의 아이를 자기가 직접 죽음에 내몰 수는 없어서 조용히 파혼하기로 결정한 것 같습니다. 마태는 큰 곤경에 처한 사람에게 나마저 차마 그럴 수는 없지, 하는 마음을 의로움이라 말하는 듯 보입니다. 거기다 마태에 따르면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 요셉에게 한 단계 더 높은 의로움을 요구합니다. 조용히 물러날 것이 아니라 곤경에 처한 한 여인과 태중의 생명을 위해 더 적극적인 책임을 다하기를 요구한 것입니다. 세간의 도덕적 잣대에 의해 죽음에 내몰릴 수도 있는 두 생명을 기꺼이 품기로 한 결정은 의로움을 넘어서는 의로움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의 상황을 세간의 비난을 받을 만한 임신으로 주목하고 보니 예수의 조상으로 특별히 언급된 네 명의 여성이 참 다르게 보입니다. 룻을 제외한 세 명의 여성을 살펴보려 하는데요. 마태 13절에 언급된 다말은 창세기 38장에 나오는 인물이지요. 다말은 아들 셋을 둔 유다의 큰 며느리였습니다. 그러나 유다의 장남이 죽고 형사취수라는 당시 관습에 따라 둘째 아들이 형을 대신해 형수에게 가족을 만들어줘야 하는데 그 의무를 피하려다 죽게 됩니다. 유다는 하나 남은 아들까지 죽이기 싫어 다말을 친정으로 돌려보냅니다. 다말의 입장에서 보면 시아버지인 유다가 가족으로서 며느리에게 해야 하는 의무를 방기한 것이죠.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그것은 또 아버지로서 아들을 아끼는 지극한 마음의 소산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 시아버지가 의무를 다할 생각이 없다고 판단한 다말은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직접 나섭니다. 시아버지가 친정 근처에 오는 기회를 틈타 거리의 여자 행색을 하여 유다와 성관계를 한 것이죠.

 

이후의 해석자들이 다말의 행위를 여러 가지로 비판했을지 모르지만, 놀랍게도 창세기 저자는 다말의 행동 방식을 비난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성서 저자는 여기서 또 하나의 의로움을 발견합니다. 다말의 임신을 알고 유다가 그녀를 끌어내 화형에 처하려는 순간, 다말은 태중의 아이가 시아버지의 소생임을 증명할 징표들을 꺼내놓습니다. 그 징표 앞에서 유다는 다말의 잘못이 아니라, 다말을 그렇게까지 하게 만든 자신의 잘못을 직면하고 시인합니다. “그 아이가 나보다 옳다! 나의 아들 셀라를 그 아이와 결혼시켰어야 했는데!”(창세기 38:26) “그 아이가 나보다 옳다!”는 유다의 말을 통해 창세기 저자는 무결점의 절대적 의로움이 아닌 상대적 의로움을 제시합니다. 이 본문은 후대에 율법으로 금지된 근친상간과 같은 도덕적 원칙에 비추어 윤리적 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마치 우리가 살면서 맺는 관계 속에는 백프로의 순수한 의로움도, 백프로의 순수한 악함도 없다는 듯, 조금 과하게 표현하면 오십보 백보아니냐고 말하는 듯 합니다. 그러나 이 안에 지금 우리에게도 유의미한 윤리적 관점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힘이 있고 책임을 맡은 사람이 그 책임을 다하지 않는 잘못은 생존을 위해 약자들이 쓰는 부도덕한 속임수보다 그 죄가 더 무겁다, 라는 관점입니다.

 

예수의 족보에 두 번째로 언급된 라합은 여호수아 2장과 6장에 나오는 인물입니다. 라합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가나안에 있는 여리고라는 도시국가의 백성이었습니다. 그녀는 외부와의 경계인 성벽에서 여인숙을 운영하면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번역에 따라 창녀’, 혹은 기생이라고도 하는데요. 그녀는 기댈 만한 보호자 없이 자신의 노동으로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여리고 안에서 약자이고, 주변인이었을 라합이 성을 정탐하러 온 이스라엘 남자 둘을 만납니다. 그리고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다가 탈출해서 떠돌고 떠돌다 이제 여리고 바깥에 유숙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협조하기로 결심합니다. 늘상 보면서 신뢰관계를 쌓아오지도 않은 처음 만난 이방인인데 자신과 한 약조를 지켜서 자신과 가족의 생명을 보존해 주리라 확신할 만한 근거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라합의 선택은 무모하다고 할 수밖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라합은 스스로 약자의 처지에서 성 밖의 땅없는 떠돌이들과 한 편이 되기로 선택하는 모험을 감행합니다.

 

이러한 라합의 선택을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야고보서는 실천을 동반한 믿음이라 높이 평가합니다. 뿐만 아니라 야고보서는 라합을 믿음의 조상아브라함과 나란히 놓습니다. 자신이 살았던 익숙한 삶의 터전인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나님의 약속만을 붙잡고 낯선 땅으로 이주를 결심했던 아브라함의 모험과 비견하는 것이지요. 사실 라합의 행동은 이스라엘 민족 중심으로 쓰여진 성서니까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것이지, 여리고 민족의 입장에서 보면 매국노라 손가락질 받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여리고 성의 이웃들의 생명보다 앞세운 것이기에 어쩌면 사사로움이지, 의로움이라고 하기도 어려워 보입니다. 그럼에도 성서기자는 사회의 변두리에서 살아가는 삶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또 다른 약자들과 연대하여 새로운 삶의 전환을 꾀한 라합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5절은 구약성서에서 이야기하지 않고 있는 이후 라합의 삶에까지 관심을 보여줍니다. 그녀가 이스라엘 안에 정착하여 가족을 꾸리고 아들까지 낳았다고 전해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절은 또 한 명의 여성 조상을 언급합니다. 그녀에게는 엄연히 밧세바라는 이름이 있는데도 마태는 우리야의 아내라고 소개합니다. 이렇게 마태는 다윗과 밧세바의 관계가 어떻게 시작했는지를 가감없이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뿐만 아니라 마태는 다윗이 남의 아내를 취하여 임신을 시킨 일이 그가 최상위 권력인 왕일 때임을 꼬집듯 다윗 왕으로 소개합니다. 목욕하는 여인을 보고 다윗의 마음 속에 일어난 욕망 자체를 비난하기는 어려울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후 다윗이 벌인 일은 악함에 악함을 쌓아가는 과정이라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 아랫사람을 통해 그 여인이 지금 전장에 나가 있는 자신의 부하 우리야의 아내인 것을 들었음에도 다윗은 멈출 줄 모릅니다.

 

거기다 이 일로 밧세바가 임신한 것을 알았을 때 다윗이 한 일은 설상가상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저지른 행위를 감추고, 그 결과로 생긴 아이에 대한 책임을 부정하기 위해 갖은 애를 씁니다. 사무엘하 11장에서 태중의 아이를 우리야의 아이로 둔갑시키기 위해서 전장에 있는 우리야를 불러 어떻게든 밧세바와 한 번 동침하게 하려고 애쓰는 다윗을 보고 있으면 애처로울 지경입니다. 속으로는 우리야가 얼른 집으로 돌아가서 밧세바와 동침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면서, 겉으로는 전장에서 얼마나 노고가 많은지 위로하고, 크게 한 상 차려 베풀고 돌아갈 때는 음식까지 싸주는 너그러운 왕의 모습을 하는 다윗을 보고 있으면 위선이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그런데 이 위선자 다윗과는 정반대로 우직하기 그지없는 우리야는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지요. 결국 다윗은 우리야를 죽이기로 결심합니다. 우리야를 전장으로 돌려보내면서 우리야를 죽이라는 편지를 다름 아닌 당사자 손에 들려보내는 다윗의 모습은 악랄함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안녕을 책임져야 할 왕이 암몬과의 전쟁에서 무리한 진격을 명령해서 우리야를 죽게 하려고, 이 작전에 참여한 아까운 백성들의 목숨까지 무의미하게 희생시키지요.

 

바로 이 모든 과정을 가감없이 기록하면서 사무엘하의 저자는 한 마디로 다윗의 행위를 요약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시기에 다윗이 한 이번 일은 아주 악하였다.”(사무엘하 11:27) 그리고 이어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나단의 비유와 심판 선고가 이어집니다. 나단은 다윗의 잘못을 직설적으로 지적하지 않고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다윗은 이것이 자신을 빗댄 이야기라고 생각조차 못합니다. 사실 오늘날 여성 독자들이 들을 때 불쾌감이 들 법한 비유이기도 합니다. 자유로운 성적 결정권을 가진 여성을 주체로 보지 않고 겨우 암양새끼 한 마리라는 소유물에 빗대어 대상화하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이 비유에는 어떤 신랄함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성이 대상화되는 삼천 년 전 시대의 한계 안에서이긴 하지만 적게 가진 자와 많이 가진 자의 힘의 격차, 그 안에서 책임과 의무는 또 어떻게 달라지는지에 대한, 상대적인 인식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많이 가진 자가 그것 하나밖에 없는 사람에게서 그 하나마저 빼앗아 버리는 짓을 극악한 것으로 보는 관점, 양 한 마리는 그저 양 한 마리일 뿐이라고 수량적으로 똑같은 하나라 생각하지 않는 관점, 이런 관점들이 주는 통찰은 무척 큽니다. 거기다 나단의 비유가 비유인 줄 모르고 다윗이 보인 반응는 꼬집는 바가 있습니다. 밧세바와 우리야에게 이 악을 저지를 때 다윗은 무슨 심신미약 상태에서 도덕적 판단을 못하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사무엘하 125-6절에서 보시듯이 다윗에게는 후안무치한 부자의 심정 상태도 고려하고, 그의 죄질을 평가하며, 그에 따른 처벌과 보상의 수준까지 명확히 정할 수 있는, 그런 정도의 정의감각과 판단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타인을 향해서는 최상위 권력자의 자리에서 내려다 보이는 백성들을 향해서는그토록도 날카롭게 벼려졌던 그 정의감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너무도 무디다는 데 있었습니다. 남을 향한 윤리적 잣대를 나 자신을 향해서는 돌릴 줄 모르는 그 전도된 자기중심성을 사무엘하의 저자는 이렇듯 담담하게 풍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마태복음 본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마태복음 16절을 언뜻 보면 마태는 다윗과 밧세바가 정식으로 혼인하고 낳은 솔로몬 왕을 언급하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야의 아내라는 말을 통해서 마태는 이 왕위계승 뒤에 숨겨진 어두운 비화를 우리에게 떠오르게 합니다. 다윗이 저지른 죄악을, 그 악의 결과 이유없이 희생된 우리야와 이스라엘의 이름없는 군사들, 무엇보다 아비의 죄로 인해 생명을 피워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한 어린 생명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마태는 이렇게 누리고 있는 힘과 권력만큼 자신을 돌아볼 줄은 몰랐던 한 권력자가 내던져버린 정의를 안타깝게 여기는 것입니다.

 

존경하는 향린교우 여러분! 그 어느 때보다 일상의 권력에 대한 예민한 인식이 요구되는 요즘입니다. 또한 페미니즘과 같이 소수자들과 약자들의 편을 드는 담론이 일상화되어간다고 평가되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반발하는 경향들도 만만치 않은 상황이고 이런 현실에 편승해 젠더 갈등이라는 이름으로 왜곡하거나 부추기는 정치권의 행태들도 드러납니다. 소위 젠더갈등이라고 이름 붙여지는 현상들 속에서 우리가 어떤 정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발견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중점적으로 살펴본 마태복음 1장은 전반적으로 남성본위적인 텍스트로 평가됩니다. 그럼에도 함께 살펴본 것처럼 거기에는 시대가 요구하는 최소한의 도덕적 원칙에 머물지 않으려는 더 높은 정의에 대한 요구가 있습니다. 또한 타인에게 돌리는 정의의 기준을 자신에게도 돌려야 한다고 말하는 공평함에 대한 감각도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본위적 정의감 너머 곤경에 처한 약자들을 배려하는 일을 나의 책임으로 기꺼이 끌어안는 더 높은 정의의 요구가 있습니다. 이 요구 앞에 우리 시대와 각자의 삶을 비추어보는 대림절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잠시 침묵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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