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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어두움 후에 빛이 오며 | 김희헌 | 2021-10-03

by 김희헌 posted Oct 03, 2021 Views 183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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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1-10-03

어두움 후에 빛이 오며 (1:1, 2:1-10, 1:1-4, 2:5-12, 10:2-16)

창조절 5. 세계성찬주일

 

새로운 달 10월이 시작되면서 완연한 가을 기운을 느끼게 됩니다. 첫 번째 주일인 오늘은 세계교회가 함께 성찬식을 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와 연대의 정신을 되새기는 날입니다. 코로나 상황이 아니었다면, 향린 공동체에 속한 자매 교회가 함께 모여서 그 의미를 살릴 수 있었을 텐데요. 아직은 각자 이 어둠의 터널을 견디며 지나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예배에서 우리는 성찬의 잔과 떡을 받고 나눌 수는 없지만, 우리가 해오던 성찬 예식을 함께 읽으면서, 이 감염병의 시대에 그리스도의 몸이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성서 말씀 묵상에 들어가기 전에 지난 주간에 열린 교단 총회 관련 이야기를 몇 가지 나누고 싶습니다. 언론을 통해서 소식을 접한 분도 있겠지만, 지난주 청주에서 열린 106회 기장 총회는 비교적 좋은 결정을 내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한국장로교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 총회장이 세워진 것입니다. 우리 교단에 여성 장로제도가 도입된 것이 1956년이고, 여성 목사제도가 총회에 헌의된 것은 그 이듬해였지만 실제로 통과되기까지는 17년이 걸렸습니다. 197459회 총회에서 여성 목사제도가 결정되고, 실제로 여성 목사가 배출된 것은 1979년입니다. 그로부터 42년 만에 여성총회장이 탄생한 것입니다. 같은 장로교 뿌리를 가진 교단 가운데에는 아직도 여성에게 목사 안수를 허용하지 않는 곳도 있는데, 그에 비하면 기장 총회의 결정은 상식적 세계를 향한 쾌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음으로, 성 소수자를 위한 목회 연구를 지속하자는 결정도 있었습니다. 이점 역시 같은 시기에 총회를 한 다른 장로교단의 경우, 신학대학의 총장 후보가 총회 대의원들 앞에서 동성애를 죄라고 고백하고서 인준받은 세태와 비교해 볼 때 의미 있는 결정이었다고 봅니다. 또한, 신체에 장애가 있는 학생이 목회가 어려운 현실에 절망하며 작년에 신학대학을 자퇴한 일이 있었는데, 이 점을 고려하여, 장애인에 대해 제약을 둔 교회 <헌법>목사 자격 조항을 개정했습니다.

/여 신도회와 청년회에 각 2명씩 정회원 자격을 부여하기로 한 것도 중요한 대목입니다. 물론 칠백여 명에 이르는 전체 총대 중에 여섯 명은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지만, 안건을 입안하기 위해서는 동의와 재청을 하는 두 명이면 충분하다는 점에서 이는 상징적인 숫자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앞으로 그 구성비율을 더 높여 가야겠지만, 일단 교단 총회의 정회원 제도를 청년과 신도회에 개방한 것은 의미 있는 시작이라고 봅니다.

그 외에 기후위기 시대, 창조세계 회복을 위한 탄소 중립 선언이 채택되었고, 남북의 화해와 희년 정신 실현을 위해 북녘에 두고 온 재산권 포기 선언문을 채택하기도 했습니다. 코로나로 단축된 일정 때문에 시간이 부족해서, 아쉽게도 중요한 몇 가지 결정은 한두 달 미뤄졌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전남지역 네 개 노회가 연합하여 광주항쟁과 5.18 신학이라는 <입장문>을 준비하여 광주항쟁의 정신을 교단의 신앙고백으로 삼자는 건이고, 다른 하나는 한반도 종전 평화 서명운동에 기장 교인들이 거국적으로 참여하자는 건입니다. 어려움 없이 결정될 것으로 예상합니다.

총회를 마치고 기자들의 반응을 보니, 기장이 진보적인 교단으로서 면모를 세웠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기장 106회 총회가 보여 준 신선한 결정에 그 구성원들이 자부심을 느껴도 될 것이라는 표현도 봤습니다. 그간 교단 총회가 대체로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 와서 이번 일로 자부심을 느낄만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가슴 뭉클하게 보낸 순간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은 수요일 오전 마지막 순서로 가진 류동운 열사의 순교자 추서의 시간이었습니다. 개신교단에서 어떤 인물을 순교자로 추서하는 일이 흔치 않은 상황에서, 그것도 민중항쟁의 역사를 교단의 공식 신앙으로 담아낸 일은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식을 진행하며 상영한 짧은 영상을 교우들과도 잠시 나누고자 합니다.)

기장 교단이 106회 총회의 주제로 삼고, 앞으로 1년 동안 교단에 속한 1,600개 교회가 함께 나아갈 방향으로 제시한 것은 오늘 하늘뜻펴기 제목입니다. ‘어두움 후에 빛이 오며.’ 이 말은 본래 라틴어 세 단어(post tenebras lux)를 번역한 것인데, 16세기 유럽 종교개혁가들이 좌우명으로 삼은 문구라고 합니다. 겹겹이 쌓인 당시의 어두움, 천 년을 지나온 중세 문명이 사상적 답보와 제도적 한계에 이르고, 흑사병의 창궐로 생활공간이 무너지면서 총체적 질곡이 드러났을 때,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어둠 후의 빛을 바라는 갈망이 솟아났을 것입니다. 그 갈망이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살아있는 정신이 되었습니다.

그때로부터 오백 년이 더 흐른 후 오늘 우리는 또 다른 전환의 필요성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사태와 기후위기 시대를 함께 맞으면서 지난 생활양식의 한계와 잘못을 뼈저리게 경험하고 있습니다. 온 인류가 이 시기를 어둡게 지나고 있지만, 빛은 약속되지 않았습니다. 어둠이 짙을수록 새벽이 가깝다는 자연의 섭리는 인간 세계에서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습니다. 믿음의 분별이 필요한 때입니다.

 

[어두움 속의 욥 / 욥기 11, 21~10]

성서의 인물 중에 끝 모를 어두움에 사로잡힌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제1성서 본문의 주인공 욥입니다. 그는 또한 인간 실존의 한없는 깊이를 보여준 신비와 저항의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의 이야기는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식의 편리한 교훈을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를 통해 어둠 속에서 빛을 갈망하는 사람의 정직한 고뇌의 모습을 볼 뿐입니다.

그의 이야기는 잘 알려졌습니다. 어느 날 그는 아무 잘못도 없이 사탄의 농간에 휘말려 가진 재산과 자녀를 모두 잃고 몸마저 병들게 되었습니다. 고통스러운 그 현실 자체가 신의 형벌이라며 있지도 않은 죄를 추궁하는 사람도 있었고, 차라리 신을 저주하고 믿음을 버리는 것이 낫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욥은 이들에 맞서 진리 투쟁을 해야 했습니다.

욥을 그런 자리로 내몬 자는 사탄(satan)입니다. 히브리어에서 생겨난 사탄(שָׂטָן)이라는 단어는 본래 악마를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사탄은 검사와 같이 남의 죄를 기소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사탄이 악을 대변하게 된 이유는 그 행위가 꼭 한국 정치검찰과 같기 때문입니다. 보통 검찰은 나쁜 사람을 단죄하고 정의로운 역할을 한다고 하지만, 한국 정치검찰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현실을 농간합니다. 탐욕과 비뚤어진 의도를 감추고, 자신이 원하는 구도에 짜 맞출 때까지 상대방을 파괴합니다.

그런데 더욱 깊은 차원에서, 사탄이 악으로 변하는 순간, 악 자체를 대변하게 되는 까닭은 다른 데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불신에서 비롯됩니다. 사탄은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가진 깊이를 가늠하지 못하고, 이기적인 겉모습만으로 판단합니다. 사탄은 욥이라는 인물이 가진 실존의 깊이를 알지 못한 채, 그가 착하고 선하게 사는 이유는 단지 그의 풍요로운 여건 때문이요, 만일 그것을 모두 빼앗으면 하나님을 저주하고 말 것으로 믿었습니다.

하지만, 욥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죠. 사탄의 공격을 받아 모든 것을 잃고도 하나님을 원망하기보다는 평정심을 잃지 않습니다. ‘주신 분도 주님이시요, 가져가신 분도 주님이라고 하며 찬양합니다.

사탄은 욥의 그런 모습을 가식으로 생각했습니다. 인간은 결코 그럴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다시 2차전을 벌입니다. 그는 욥이 자기 생명의 위기를 맞을 때 하나님을 저주하고 말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틀렸습니다.

사탄은 욥이 하나님을 저주하는 자리에 이를 때까지 그를 완전히 파멸시키려고 했지만, 아무리 욥을 어둠 속에 빠뜨려도 그렇게 만들지 못했습니다. 그럴 수 없었던 것은 어둠과 빛에 관한 감각이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두려워하는 것과 경외하는 것의 성격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욥이 누구인가요? 11절과 23절에 반복된 그의 품성에 관한 묘사는 네 가지입니다. 그는 흠이 없고, 정직하였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도 악의 시련이 닥칩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yare) 사람이었고 말하는데, 그것은 사탄이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두려움입니다. 사탄이 기대한 두려움은 공포에 뿌리를 두고 있다면, 욥이 가진 두려움은 흠모와 동경하는 마음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사탄은 욥을 공포에 빠뜨려서 조종하려고 하였지만, 욥은 어둠 속에 깊이 잠겨 있을 때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잃지 않습니다. 사탄의 농간으로 인해 모든 삶이 무너졌을 때, 그의 아내가 말합니다. “이래도 당신은 여전히 신실함을 지킬 겁니까?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서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2:9) 그것은 사탄이 기대하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욥은 자기를 잃지 않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복도 하나님에게 받았는데, 어찌 재앙이라고 해서 못 받는다 하겠소?” 욥의 이 대답을 보면, 어떤 상황도 그 영혼을 잠식할 수 없는 현자(賢者)의 모습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욥이 지금 낙관적 미래를 기다리며 현재의 괴로움을 초연하게 견디는 것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몸부림치는 가능성을 찾고 있다는 점이니다.

그의 현실은 어두움 후에 빛이 오는희망이 아니라, 어둠 자체입니다. 그래서 친구 엘리바스에게 말하기를, ‘모두 어둠이 지나고 빛이 온다고 하지만, 나는 이 어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네.’하고 말합니다. (17:12) 그는 어둠 후에 빛이 온다는 약속이 없는 상황에서 절망합니다. 하지만 욥의 이 정직한 절망이 사탄의 계략에 휘말리지 않는 거처가 되고, 낡은 세계관을 무너뜨린 후에 다시 세울 믿음의 씨앗이 됩니다.

욥기는 우리에게 손쉬운 낙관주의를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경외하며, 어둠의 시간을 정직하게 지나는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욥의 이야기를 읽다가 어둠과 빛에 관한 참된 감각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묻게 됩니다.

라틴어 성경 불가타는 욥기 1712절에서 탄식하는 욥의 목소리에 담아 어두움 후에 빛이 온다’(post tenebras properat lux)고 말하고 있는데, 종교개혁가들은 바로 이 욥의 고뇌에서 새 시대를 향한 꿈을 읽고, 그것을 자신들의 모토(motto)로 삼게 됩니다.

 

[어둠과 빛 사이에서 / 마가복음 102~16]

마가복음에서 우리는 한 시대를 살아가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삶을 봅니다. 율법의 시대를 사는 것과 은총의 시대를 사는 것, 어둠의 시대를 사는 것과 빛의 시대를 사는 것 사이의 선택을 보여줍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를 시험하여 묻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모세는 어떻게 하라고 하였느냐?’고 되묻습니다. 그들은 이혼증서를 써 주면 아내를 버리는 것도 허락되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그것은 마음이 완악한 사람들이 지켜야 할 계명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서로 존엄하게 대하며 사는 것이요, 율법을 구실삼아 타인을 도구화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어린이에 관한 태도입니다.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데리고 와서 예수께서 쓰다듬어 주시기를 바랐는데, 제자들이 막고 꾸짖었습니다. 아마 그것을 스승에 대한 배려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나무라며 말씀합니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아라. 하나님 나라는 이런 사람들의 것이다.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두 이야기는 어둠과 빛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해줍니다. 율법에 기대어 약자들을 억누르고 배제하는 어둠의 삶이 아니라, 은총과 포용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빛의 삶을 살 것을 요청합니다. 여전히 바리새적 율법주의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한국 교회가 깊이 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억압과 편견을 장려하는 율법주의 종교로는 예수의 길을 걸을 수 없습니다.

 

[고난 속의 속량과 구원 / 히브리서 11~4, 25~12]

예수의 말씀과 가르침도 시간이 흐르면 믿음의 대상이 되고, 그리스도를 향한 고백은 교리로 정착됩니다. 히브리서 본문을 보면, 복음서에서 듣던 예수의 생생한 목소리는 사라지고, 교리가 되어가는 신학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는 다섯 가지 언어로 묘사됩니다. 그는 만물의 상속자요, 온 세상이 창조되는 통로이며, 하나님을 드러내는 영광의 빛이요, 하나님의 본질적 모습이며, 만물을 보존시키는 분으로 고백됩니다. (1:2-3)

성서에서 이런 상징적인 표현을 읽을 때 주목할 점은 교리 안에 감추어진 본래의 고백을 풀어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리를 문자적으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 담긴 고백을 되살려내는 것입니다. 그 단서가 우리가 함께 읽은 26절의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시편 8편의 노래를 인용하여 예수에 대한 고백을 이어갑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생각하여 주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돌보아 주십니까?” 이것은 하나님과 나눈 깊은 교감의 표현입니다. 이 시인의 마음을 통해서 예수에 관한 고백을 합니다.

히브리서는 하나님의 은총과 돌봄이 나타난 지점을 그리스도의 고난에서 찾습니다. 고난 속에서 이루어지는 죄의 속량과 구원이 하나님과 생명의 진실을 드러낸다고 봅니다. 그래서, 어두움 속에서도 절대 사라지지 않는 역사와 우주의 생명적 진실에 관한 이해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관한 고백으로 이어집니다. 히브리서 기자에게 그리스도의 고난은 단지 어두움이 아니라 구원의 빛을 몰고 오는 지점입니다.

 

우리는 긴 어둠의 시간을 지나고 있습니다. 이 어둠 속에서 고난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고통이 의미 없는 것이 아니라, 내일의 생명을 잉태하는 빛의 씨앗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두움 후에 빛이 오기를 바라며, 빛의 씨앗을 보듬고 키워간 믿음의 사람들처럼, 우리도 삶과 교회를 가꾸어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침묵으로 기도합시다.

 

[파송사]

긴 어둠의 시간을 지날 때 빛을 갈망하는 믿음의 사람들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으로 어둠을 견딘 이들의 고백이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는 이렇게까지 생각하시며 돌보아 주십니까?” 어두움 속에서도 빛의 씨앗을 품고 사는 믿음의 행진을 우리 모두 이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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