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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예수 승천 이후에 | 이병일 | 2018-05-13

by 이성환 posted May 20, 2018 Views 451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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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8-05-13

예수 승천 이후에

(사도 1:1-11, 에베 1:15-23, 요한 17:6-19)

 

이병일 목사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번 주일은 기억할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님을 비롯하여 나를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하는 모든 생명들에게 감사하는 어버이주일이고, 남한의 현대사에 있어서 민중이 살아 있음을 군부독재에 저항함으로써 보여준 민중항쟁기념주일입니다. 특히 향린교회가 예수님의 길을 진지하고 정직하게 따르는 공동체로서 첫발을 내딛은 것을 되새기며 오늘의 신앙을 헤아려 보는 주일이기도 합니다. 이런 뜻깊은 날에 하나님 말씀으로 여러분과 함께 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오늘은 교회력으로는 부활절 일곱째주일입니다. 또한 지난 10()이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간 일을 기억하는 승천일이기에 오늘을 승천주일이라고도 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한 지 40일 후에 승천하였고, 이를 기념하는 교회력절기를 예수 승천일이라고 합니다. 요즘 개신교에서는 교회절기로 중요하게 여기지는 않지만, 북유럽에서는 아직도 그날을 공휴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또한 안상홍의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성서에 나와 있기 때문에 잘 지킨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신 후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40일 동안 제자들을 만나서 부활의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주시고 소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감람산 위에서 500명이 보는 가운데 승천하셨습니다.

 

해발 800m가 되는 감람산 꼭대기에는 예수님의 승천을 기념하는 교회가 있는데 그 안에 팔각형의 건물이 있습니다. 팔각건물은 예수님의 승천을 상징하여 지붕을 씌우지 않았었는데, 이슬람교도들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에 모스크를 상징하는 돔으로 지붕을 만들어 덮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 승천의 상징을 없애고 재림을 막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팔각 건물 안에는 예수님이 승천할 때에 밟았다고 하는 바위가 있는데, 희미하게 발자국이 움푹 패여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승천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개신교에서 부활절과 성령강림절은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잘 지키고 있지만, 그 사이에 있는 승천일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승천의 상징적 의미를 통해서 우리는 신앙적으로 성숙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늘에서 왔다가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상징입니다. 상징은 삶의 정황에 맞게 해석을 해야지 그 의미가 생생하게 살아있게 됩니다. 예수님이 올라갔다고 하는 하늘은 어떤 하늘입니까? 하늘의 의미를 생각할 때에 예수님의 승천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늘의 경계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합니까? <어디부터 하늘입니까? 우리의 키 이상이면 하늘인가요? 땅으로부터 몇 Km이상이 떨어지면 하늘이라고 할 수 있나요? 아니면 대기권 밖을 하늘이라고 할까요?> 하늘은 시작되는 점이 없습니다. 내가 숨 쉬고 활동하는 이곳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내가 숨을 쉴 때에 단순한 공기를 마시는 것을 넘어서 하늘을 마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바로 나로부터 시작됩니다. 따라서 내가 인지하고 있는 모든 공간이 하늘입니다. 예수님이 하늘에 오르셨다는 상징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존재양식의 전환입니다.

 

유한하고 한계로 둘러싼 육체적 존재의 굴레를 벗어나서 하늘처럼 어디에나 있을 수 있는 존재로 전환되었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라 모든 곳에 언제든지 계시는 분으로 전환되었다는 상징입니다. 하늘은 저 멀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를 둘러싸고 있으며, 내 속에도 있는 것입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 다른 생명들 속에도 있습니다. 무소부재(無所不在)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늘의 상징은 나와 남을 하나 되게 하는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나의 숨과 남의 숨을 연결하는 것은 보이지 않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하늘입니다. 숨을 쉬는 것은 바로 그 하늘을 받아들이고 내 놓는 것이고, 밥을 먹는 것은 하늘로부터 온 생명의 양식인 예수님의 몸을 먹는 일입니다. 따라서 우리 몸의 가장 중요한 생명활동인 먹고 숨 쉴 때마다 우리는 예수님을 먹고 하나님을 마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시다가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성서에서 40이라는 숫자는 변화를 위해 필요한 기간, 새로운 소명을 받는데 필요한 기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 후 사십 일 만에 하늘로 오르셨다는 말씀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사건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새로운 사명을 받기 위해 필요한 시간을 보냈다는 것을 말합니다. “제자들은 나가서 곳곳에서 선포하였다. 주께서 그들과 함께 일하고, 여러 가지 표징을 따르게 함으로써 그 말씀을 확증하였다.”(마가 16:20)

 

승천은 예수님이 우리를 떠나버린 것이 아니라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계시고 함께 일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신 이후에 땅에 남겨진 제자들, 우리들에게 예수님이 이 땅에서 받았던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습니다. 삶과 가르침을 통하여 함께 하신 예수님의 일을 이제 그의 제자들인 우리가 계속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에게 기쁜 소식을 전할 때,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님은 하늘과 같이 여전히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의 길을 따라 살려 하는 우리와 함께 일하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은 구체적인 정황에 따라서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17장에 의하면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교회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최대의 찬사는 영광(榮光, glory)을 드린다는 말입니다. 성서와 찬송에도 영광이라는 단어는 많이 나옵니다. 우리 일상에서도 자주 사용하기도 합니다. 쉽게 만날 수 없는 사람을 만나거나 분에 넘치는 찬사를 들었을 때에 영광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영광이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인간의 가장 큰 목적은 하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하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일까요? 영광은 사람에게는 빛나는 영예란 뜻으로 사용하고, 님에게는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초월한 빛이라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임재나 긍휼, 완전성을 찬양하며 높이 드러내는 행위 등을 나타내며, 사람이나 사물과 관련해서는 아름다움, 뛰어남, 명성 등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요한복음에서 영광은 때가 되면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것이며, 그 영광을 받은 아들이 아버지께 다시 돌려드리는 것입니다(17:1).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영광은 또한 아들이 아버지께서 맡기신 일을 완성하여 땅에서 아버지께 드리면,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내려주시는 것이기도 합니다(17:4).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것을 영광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즉 하님의 영광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요, 그 십자가를 통해서 하님 자신의 본질이 가장 잘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하님이 서로에게 영광을 주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님과 예수님의 영광이 요한공동체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제자들을 위하여) “우리가 하나인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17:11) (요한공동체를 위하여)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17:21) 또한 아버지가 아들인 예수님에게 주신 영광을 요한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주는 이유가 바로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것과 같이, 요한공동체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17:22). ‘영광은 요한공동체가 하나되게 하는데 꼭 필요한 요소라고 합니다.

 

요한공동체에게 하나된다는 의미는 예수님의 살을 먹고, 예수님의 피를 마시며 예수님 때문에 사는 것입니다. 자신의 목적이 아버지의 뜻을 세상에서 완성하는 것이라고 했던(17:4) 예수님의 말처럼, 요한공동체 구성원들은 이제 예수님의 뜻을 세상에서 완성하기 위한 목표로 뭉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된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구성원들이 예수님의 뜻을 세상에서 완성하기 위하여 같은 목표로 뭉치는 것이 하나되는 것이고 이렇게 하나되게 하는데 필요한 것이 영광입니다. 영광은 예수님 때문에 살도록 공동체를 뭉치게 하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에 여러분과 하나님 말씀으로 함께 하게 되어 영광입니다라고 인사한 의미도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과 말씀을 나눔으로써 하나가 될 수 있기에 영광입니다.

 

일반적인 의미로 자기에게 과분한 찬사를 받거나 뛰어난 명성으로 빛나는 영예를 얻는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루기 위해 하나 되기 위한 영광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이듯이 우리 향린공동체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목적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나의 영광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것이어야 하고, 내가 주장하는 말이 나의 자존심이 아니라 공동체가 하나 되기 위한 것이어야 하고, 내가 하는 행동이 내 생각을 남에게 관철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님과 하나 되는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영광과 함께 예수님의 제자로 지켜야 할 것으로 서로 사랑을 강조합니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 이웃이나 혹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사랑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굉장히 새로운 것이며, 예수님의 제자됨의 증거라고 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행동으로 보여주고 난 뒤에야 비로소 자신이 그들을 사랑한 것처럼 그들도 서로 사랑해야 된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 행동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겸손하게 섬기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추방(9:22; 12:42; 16:2; aposynagogos; 출교, 회당에서 쫓겨난)이라는 사건이 세 번에 걸쳐 일어납니다. 추방이나 출교가 공동체 정체감의 위기에 대한 반응으로 읽힐 때, 그것이 권하는 공동체 내의 상호간의 사랑은 상대적으로 덜 배타주의로 들리며, 오히려 압제를 당하는 소수 공동체 내의 일치와 단결을 위한 긴급한 호소처럼 들립니다. 이런 상황에서 공동체 내의 서로 사랑에 대한 독특한 요한공동체의 호소는 외우내환에 싸인 공동체 내에서의 단합을 부르짖는 통렬한 외침이 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공동체 내의 서로 사랑은 자기 가족만을 사랑하거나, 자기네 교인들만을 사랑하는 확대된 이기주의와는 전혀 다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은 공동체의 출교와 퇴출의 위기 상황에서 공동체의 정체성을 찾고 결속을 다지기 위한 방편입니다. 공동체 내의 서로 사랑은 이웃뿐만 아니라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넓은 품을 만들기 위한 단초가 됩니다. 그것은 가족에서 진정한 사랑을 배우고 경험할 때에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공동체 내의 서로 사랑과 그 사랑을 새로운 계명이라고 하는 이유를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은 사랑 자체에 대한 설명을 하기보다는 행동으로 먼저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스스로 종이 되어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본을 보인 행동에서 공동체 내에서 사랑하는 방법을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긴 후에 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알겠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님 또는 주님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옳은 말이다. 내가 사실로 그러하다. 주이며 선생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겨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남의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과 같이, 너희도 이렇게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이 주인보다 높지 않으며, 보냄을 받은 사람이 보낸 사람보다 높지 않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그대로 하면, 복이 있다.”(요한복음 13:12-17)

 

분명히 예수님은 선생님이자 주님이고, 그 제자들은 종이라고 합니다. 상급자나 스승으로서의 권위보다는 서로 사랑을 강조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공동체의 정체성을 규율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것보다는 서로 섬기며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찾으려는 새로운 계명인 것입니다. 자리나 위치에 의한 권위로 결속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섬김과 사랑에 의한 공동체 구성원의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사랑의 계명이 새롭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삶은 주인과 종, 선생과 제자의 관계뿐만이 아니라 부모와 자녀, 형과 동생, 선배와 후배, 선임과 후임, 상사와 후임자 등의 관계망으로 얽혀 있습니다. 분명히 각자의 위치에 따라서 해야 할 일과 역할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특히 가족과 교회 공동체에서 어떻게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할 것인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 권위를 행사하는 방법에서 서로 충돌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말뿐이 아니라 먼저 섬김과 사랑의 행동이 우선인 것을 새삼 생각하게 됩니다.

 

저는 향린공동체에서 본격적으로 목회활동을 시작했고 오늘까지 이곳에 있습니다. 이제 강남향린교회 시무를 마치고 7월부터는 광주에서 목회하게 되었습니다. 향린교회에서는3년 동안 부목회자로서 여러분과 함께 했었습니다. 참 행복했습니다. 아마도 강남향린교회나 향린공동체가 아니었으면 저는 목회활동을 계속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굴하고 아쉽고 안타까운 부분도 많습니다. 21년 동안의 향린공동체 목회를 돌아보면 15년 전 홍근수 목사님이 고별설교를 하시면서 하셨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16년 반 동안 향린교회에서 목회하면서 수 없이 가르치고 설교했지만 사람들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변화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변화 되어서 그런지 신앙을 받아들인 그 이후에는 점점 더 머리와 마음이 굳어져 단단해집니다. 이러한 상태를 우리는 꼰대라고 합니다. 꼰대는 단지 나이가 많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2010대에도 꼰대가 있습니다. 자신의 경험 또는 생각을 일반화하여 아랫사람에게 강요하는 어른을 비꼬아 꼰대라고 합니다. 또한 신입생의 옷차림을 단속하고 말투까지 훈계하는 20대 초반의 대학 선배나, 신입사원에게 텃세 부리는 고작 한두 기수 위의 사원은 젊은 꼰대라고 합니다. 수직적인 서열 문화가 깊게 뿌리 내린 이 사회에 적응해버린 사람은 쉽게 꼰대의 속성을 드러내게 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부활신앙은 언제나 역동적이고 변혁적이어야 하는데, 그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사랑을 잃어버리고 자기의 욕구를 믿음으로 포장하여 굳어져 버린 것을 신앙의 꼰대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다른 말로 하면 신앙의 꼰대가 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신앙의 꼰대가 되지 말자!” 우리는 이 말에 얼마나 자유롭습니까? “신앙의 꼰대가 되지 말자!” 복음의 역동성과 변혁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서 새겨들을 말이 있습니다. “내가 틀렸을지도 모른다. / 내가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없다. /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 말하지 말고 들어라, 답하지 말고 물어라. / 존경은 권리가 아니라 성취이다.” 다섯 가지를 요약하면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서로 사랑하라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는 것과 예수님을 섬긴다고 하는 것은 바로 서로 사랑에서 드러납니다. 우리가 서로 더 많이 섬기고 더 많이 사랑함으로써 예수님의 확실한 제자가 되고 진정한 하님 나라의 모습이 드러날 수 있기를 빕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공동체를 이루고 그 정체성을 지키기 위하여 쓴맛도 감당하면서 서로 사랑하면 좋겠습니다. 제자들끼리 서로 사랑하는 일은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첫걸음이기 때문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예수님이 본을 보여주신 섬김과 사랑의 길을 따르는 일은 온 누리를 사랑으로 채우기 위한 행동의 시작입니다. 어려운 공동체일수록 구성원들 간의 서로 사랑은 공동체의 결속력과 새로운 힘을 모으기 위한 방편입니다. 내부적으로든 외부적으로든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공동체에서 필요한 것은 서로 사랑입니다. 그것은 자기들 끼리만의 확대된 이기주의가 아니라, 더 넓은 세상을 향해 하나님 나라의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사랑의 쓴맛도 서로 나눌 수 있고, 기쁨도 슬픔도 함께 나눌 수 있는 끈끈한 공동체가 되기 위한 과정입니다.

 

우리가 종교생활을 하면서 가장 자주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영광이라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말해야 하겠습니다. 영광은 공동체를 하나되게 하는 힘을 의미합니다. 하나됨의 의미는 하나님과 아들은 하나라는 사실을 믿는 것, 그리고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예수님이 먼저 보여준 것과 같이 하나님에 대한 전적신뢰를 바탕으로 죽기까지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승천 이후에 어디나 언제나 우리와 함께 일하시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남긴 사명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은

님의 본성인 사랑 정의 평화가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며,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와 목적을 이루는 것입니다.

마음과 입으로만 영광을 드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몸과 행동으로 우리가 하나 되어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절대라고 주장한 가치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자기만의 우물에서 더 넓은 바다로 푸른 창공으로 눈을 돌립시다.

자기의 가치가 옳은지 숙고합시다.

자칫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자기만의 아상을 벗어납시다.

새로운 출발, 전환은 나로부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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