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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무엇을 보는가 | 김희헌 | 2022-06-26

by 김희헌 posted Jun 26, 2022 Views 204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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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2-06-26

무엇을 보는가! (왕하 2:1~2, 6~14, 5:1, 13~25, 9:51~62)

2022.06.26 성령강림절 셋째 주일

 

[안병무 유산의 계승]

지난 목요일 623일은 안병무 선생이 탄생한 지 백 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올해 그분의 사상적 유산을 되돌아보는 일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교우들에게도 올 초에 안병무 읽기를 제안하였는데 관심은 있으신지요? 교회 사무실에 <안병무 평전>이 여러 권 비치되어 있는데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역사를 들여다보면 파편적으로 보이던 사건들이 서로 신비롭게 이어지는 것을 보기도 합니다. 작년에 출간된 <전태일 실록>을 읽고, 1970년 청년 전태일이 넉 달간 노동하면서 마지막 결심을 했다는 임마누엘수도원이 승가사 입구에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안병무 평전>을 보면, 그보다 꼭 20년 전인 19506월 안병무와 홍창희를 비롯한 일신회 회원들이 함께 모여 기도회를 하던 도중 한국전쟁의 발발 소식을 듣고 흩어진 기도원의 위치가 승가사 근처라고 합니다.

홍창희 장로님에게 여쭤보고 싶은데요. 만일 그 수도원이 같은 곳이라면, 그것은 신비로운 역사의 흐름이 이어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 하고자 했던 20대 청년들의 기도 장소가 20년 후 23살 청년 전태일의 마지막 고뇌와 땀방울이 어린 곳이요, 그의 죽음 이후 한국 기독교 신학의 거대한 변화를 주도한 사람이 바로 20년 전 그 자리에서 기도했던 사람이라면, 그것은 안병무가 말한 화산맥과 같은 역사적 계시의 흐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무튼, 하염없이 흐르는 것 같은 역사는 실상 우리에게 교훈과 과제를 던져줍니다. 다만 그것을 보는 눈이 있느냐는 것이 문제이겠지요. 안병무 선생이 떠나신 지도 오랜 세월이 흘렀으니, 그사이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를 기억하고자 하는 흐름이 이어지는 것은 단순한 회고가 아니라, 그의 삶에 미래를 위한 씨앗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안병무 아키브라는 사이트에 들어가면, 안병무가 서른 살부터 약 45년간 쓴 글 팔백여 편의 글이 연대순으로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그 시기는 발간한 잡지를 기준으로 4단계로 구분할 수도 있습니다. 첫 단계는 1951년부터 독일 유학을 가기 전인 56년까지로, <야성>(野聲)이라는 잡지를 통해서 순수한 기독교 신앙을 추구하는 젊은 신앙의 목소리를 낸 시기입니다.

둘째 단계는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1969년에 창간한 월간지 <현존>(現存)의 시기입니다. 제목이 암시하듯이, 실존주의에서 출발한 그의 사상은 점차 구체적인 역사 속으로 확장됩니다. 전두환 정권에 의해 808월에 강제 폐간될 때까지 11년간 삼백여 편의 글로 성서연구와 시대 증언을 펼칩니다.

세 번째 단계는 1973년 한국신학연구소를 창립하고 발간한 계간지 <신학사상>의 시기입니다. 이때는 한국사회와 교회의 중심 화두를 특집으로 다루면서 진보적인 담론을 활발히 전개합니다. 한국사회 민중운동이 피어나던 이 시기에 안병무는 민중신학을 정립하고 세계와 소통하면서 50대 전성기를 살아갑니다.

마지막 그의 사상이 무르익은 알곡이 되어 나온 것은, 88년 말에 창간된 월간 <살림>지입니다. 이 잡지는 8년 전에 폐간된 <현존>의 뒤를 이은 것이었는데, <현존>이라는 이름 대신 <살림>을 택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시기의 안병무는 개인의 실존적인 결단보다는 생명의 공동체적 삶에 관한 이야기에 관심합니다. 화두가 변한 것이지요. 7/80년대 군사독재 시대에 펼친 저항의 목소리에 다 담기지 않은 생명 살림의 실질적 운동에 관심을 가진 것입니다. 안병무 선생이 남긴 이 생명과 평화의 화두는 여러 갈래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고, 이제는 그의 정신 유산을 이어갈 길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탄생 백 주년을 기념하는 학술대회가 올 10월에 있을 예정입니다. 진보적인 활동을 하는 이십여 단체가 함께 모여서 민중신학의 새로운 목소리를 가다듬고자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보다 먼저, 우리 교회에서는 안 선생님을 추모하는 자리를 만들 예정입니다. 이런 행사가 단지 과거를 기억하는 것만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향한 전환기의 지혜가 모색되는 자리가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지금 변화와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성장중심의 산업 문명은 기후위기와 코로나 팬데믹으로 귀결되었고, 4차 혁명으로 일컬어지는 기술발전은 전통적인 노동의 문제에서 새로운 해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진실을 왜곡하는 욕망이 빚어낸 -진리의 시대는 길을 잃은 것처럼 보이며, 평등과 해방을 향한 운동은 갈등과 대립을 넘어선 통합적인 해결 방식을 절실히 요청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87년 체제를 지나온 <명동 시대>를 보내고, 광화문에서 열어갈 새로운 시기를 구상하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전환의 시기입니다. 거대구상도 필요하고, 체질개선도 필요합니다. 발목을 잡는 것은 단호하게 끊어내고, 생명의 온기를 모아가는 분별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오늘의 성서 본문을 읽어가겠습니다.

 

[시대 계승의 조건, “네가 보면” / 열왕기하 21~2, 6~14]

열왕기에 나온 이야기는 예언운동이 엘리야로부터 엘리사에게 승계되는 전환의 시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열왕기하 2장은 아주 정교하게 예언전통이 계승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제자 엘리사와 함께 길을 떠납니다. 자신이 활동하던 도시 길갈에서 베델로, 그리고 여리고를 거쳐 요단강으로 이동합니다. 거기서 엘리야는 승천하고, 혼자 남은 엘리사는 경로를 거꾸로 해서 다시 되돌아옵니다. 스승과 함께 걸었던 길을 거꾸로 순례한 엘리사는 돌아와서 예언운동을 이어갑니다.

이 이야기는 전환의 시기를 말하는데, 성서는 그 시작을 덤덤하게 증언합니다. “주께서 엘리야를 하늘로 데리고 올라가실 때가 되었다.” 이 말에 다 담긴 당시 위기 상황을 모두 느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베델과 여리고에 살던 수련생들이 초조한 마음으로 엘리사에게 묻습니다. “선생님의 스승을 주께서 오늘 하늘로 데려가려고 하시는데 알고 계십니까?” 전환의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위태로운 심정이 담겨 있습니다.

이들은 엘리야와 동행하여 요단강까지 따라갔지만, 분위기를 보면, 그들은 엘리야가 없는 상황을 예견하며 절망한 것 같습니다. ‘엘리야 선생이 가신다니! , 함께했던 예언의 시대도 이렇게 끝나는구나!’ 하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엘리사 역시 스승이 없는 시대를 맞는다는 것이 충격이었던 것 같습니다.

엘리야가 승천하는 기적적인 일이 왜 그들에게는 충격을 주었을까요? 기적을 파는 이들에게는 적절한 종교상품이 되겠지만, 역사를 깊이 있게 사는 사람들에게 예언자의 소멸이란 하나님과 이어지는 역사의 연결점을 상실하는 위기였기 때문입니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명료하게 나타나는 지점은 바로 예언자의 말과 행동입니다. 신학적으로 말해서, 역사의 시간에 하나님의 영원함이 머문 증거가 바로 예언입니다. 그 예언자가 떠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엘리사는 이 상황을 신중하게 대합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아직 무르익지 않는 결론을 섣부르게 내리기보다는 차라리 침묵을 택합니다. 스승이 없는 시대, 그 시대는 과연 어떻게 될까? 엘리야는 아직 답을 알 수 없는 시간의 고민을 안고, 길이 보일 때까지 다만 스승과 함께 걸을 뿐입니다.

두 사람은 걷다가 요단강 너머에 이르렀을 때 결정적인 대화를 합니다. 엘리야가 묻습니다. “주께서 나를 데려가시기 전에 너에게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느냐?” 엘리사가 대답합니다. “스승님이 가지고 계신 능력을 제가 두 배로 받기를 바랍니다.” 이 당돌한 대답은 무리한 요구라기보다는 다부진 결단에 가깝습니다. 신명기 법전(21:17)을 보면, 고대 사회에서 적법한 계승자는 두 배의 몫을 갖게 된다고 했는데, 엘리사는 자신이 예언전통을 계승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 선언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엘리사가 그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한 가지가 필요했습니다. 예언이 사라질 위험에 처한 시대, 스승이 존재하지 않는 시대에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시대를 꿰뚫어 보는 것입니다.

두 배의 능력을 구한 엘리사에게 스승 엘리야가 대답합니다. “너는 참으로 어려운 것을 요구하는구나. 주께서 나를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네 소원이 이루어지겠지만, 네가 보지 못한다면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엘리야가 던진 이 숙제, “네가 보면(if you see), 네 소원이 이뤄질 것이다.”라는 말은 새로운 시대를 위해 필요한 시험과 같습니다.

엘리사는 과연 보게 될까요? 이런 긴장감을 안고 길을 가는 동안, 엘리사는 보게 됩니다. 갑자기 불 말과 불 병거가 나타나 스승을 태우고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을 본 것입니다. 그가 본 기적과 같은 이 승천 장면을 신학적으로 설명하면, 역사가 하나님 나라 속으로 편입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역사와 하늘나라가 이어진 통로를 본 엘리사는 이로써 예언전통을 이을 자격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스승의 승천을 보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은 더 본질적인 문제가 하나 더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스승을 데려간 분과 직접 맺어야 할 관계입니다. 엘리사는 그것으로 인해 탄식합니다. “엘리야의 주 하나님, 주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이것은 몸을 입고 이 땅을 사는 사람들의 목소리이기도 합니다.

이 절규는 불완전한 자기 삶에서 생긴 탄식이지만, 또한 절망스러운 상황이 주는 도전 속으로 자신을 이끌고 들어갑니다. 그래서 엘리사는 이 절규와 함께 남겨진 스승의 겉옷으로 요단강을 내리칩니다. 그러자 강이 갈라지고, 엘리사는 그곳을 건너 새로운 예언의 시대를 열어갑니다.

이 이야기는 엘리야와 엘리사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삶과 신앙공동체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전환의 시대는 절망과 믿음이 교차하는 시대입니다. 진정한 예언은 절망의 자리에서 탄생합니다. 시대의 절망을 본 자리, 그 절망을 대면하는 자리에서 새로운 예언이 솟아납니다. 거기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직관적인 믿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이다!’라는 역설적인 믿음이 거기 있습니다.

 

[제자의 길, 위기의 시대 인식 / 누가복음 951~62]

이런 믿음의 전통이 역사의 여정을 따라 흘러갑니다. 누가복음은 이 믿음을 따라 살아간 예수 공동체의 증언입니다. 누가복음은 크게 세 토막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갈릴리에서 시작된 예수 운동의 특징을 다루고, 마지막에는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진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다룹니다. 그 사이에 예수와 제자들의 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넣어서 전체 복음서를 역동적으로 구성합니다.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 전체 내용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긴 여행기사(9:51~19:28)의 시작 부분입니다. 이 여행은 결정적 전환의 시기를 암시하며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하늘에 올라가실 날이 다 되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가시기로 마음을 굳히셨다.” (9:51)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길에서, 오늘 본문은 예수와 함께하는 삶의 마음가짐에 관한 것으로 두 가지 이야기를 전합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예수 일행을 반대하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향한 제자들의 태도에 관한 것입니다. 불같은 성격의 두 제자가 예수께 묻습니다. ‘주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 버리라고 명령하면 어떻겠습니까?’ ‘천둥의 아들이라는 별명(3:17)답게, 야고보와 요한의 제안은 거칠었습니다.

예수는 이들을 꾸짖습니다. 사실 과격하기로 따지면, 청년 예수도 한 가닥 하는 분입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은 여기서 예수의 입술에서 그런 과격함을 뺍니다. 어쩌면 그것은, 자신들에 관한 성찰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릅니다.

하늘에서 불을 내려 태워 버리자라고 제안한 제자들은 두려움에 빠져있던 먼 옛날 엘리야의 모습을 닮았습니다. 엘리야는 아합과 이세벨의 위협을 피해 도망하여 동굴 속에서 떨면서 나만 홀로 남았다라고 탄식했습니다. (왕상 19:10) 세월이 흘러서 아합이 죽고 새로운 왕이 등장하여 평화로운 사절단을 보냈는데도, 그는 여전히 두려움에 싸여 하늘에서 불을 내려 오십 명이나 되는 그들을 죽이는 일을 합니다. (왕하 1:10, 12) 그러자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을 맞으라고 말한 뒤, 그의 예언을 엘리사에게 승계합니다.

그렇다면, 대적하는 사람들을 불로 쓸어버리는 행위는 용기라기보다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그런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를 보겠습니다. 길을 걷는 예수 일행에게 세 사람이 다가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따르겠다고 하는데, 다만 그전에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거나 식구들에게 작별인사를 드리겠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분명히 사람의 도리이기도 하고, 길을 떠나기 전에 할 수 있는 당연한 절차였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예수께서 매우 단호하게 반대합니다. 죽은 사람의 장례는 죽은 사람들에게 맡겨두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 이야기와는 다른 모습입니다.

안병무는 이 이야기를 해석하는 실마리를 시대 인식에서 찾습니다. 그것은 위기의 시대, 전환의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우선순위, 지금 먼저 해야 할 것에 관한 분별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안병무, <생명을 살리는 신앙>, 270) 예수와 함께하는 삶은 평화롭지만, 또한 위기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예수와 동행하는 길은 성찰과 선택의 연속입니다. 자신이 무엇을 향해야 하는지, 자신의 자유가 무엇을 위해 바쳐지고 있는지를 봐야 합니다.

 

[참된 해방과 자유, 살림의 길 / 갈라디아서 51, 13~25]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그리스도가 주는 자유에 대해 말합니다. 그가 말한 자유는 종살이의 멍에를 벗어나는 자유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5:9)

그것이 성령이 인도하는 삶이요,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사는 15가지 행실을 나열한 다음, 그 삶을 피하고 성령과 동행할 때 맺어지는 9가지 삶의 열매를 말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 화평과 인내, 친절과 선함, 신실함, 온유와 절제입니다. (5:22~23) 바울은 이런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위해서 자신의 자유를 펼치라고 말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생명을 살리는 삶입니다. 안병무는 1988년 말, 67세의 나이에 마지막으로 창간한 잡지 <살림>의 창간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의 복음은 살림이다!” 이 말에 예수의 길을 걷는 사람들의 꿈과 긍지가 담겨 있다고 봅니다.

안병무가 꿈꾼 민중의 시대는 사람들이 저마다 스스로 일어나서 거룩한 삶의 열매를 맺어가는 살림의 시대입니다. 또한, 함께 힘을 합해서 절망과 위기의 시대를 평화의 힘으로 열어가는 시대입니다. 광화문 시대를 헤쳐가는 우리 신앙공동체의 삶이 살림의 길이 되기를 바라며, 그 길을 걷는 우리 모두의 삶을 주께서 지켜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침묵으로 기도합시다.

 

[파송사] 전환의 시대, 예언전통을 이어갈 엘리사에게 필요한 것은 시대의 뜻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네가 보면, 네 소원을 이룰 것이다.’라는 엘리야의 말은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합니다. 예수를 모신 우리 마음이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환히 열리고, 살림의 길을 걷는 우리 삶에 성령의 열매가 맺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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