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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주여, 우리를 도우소서! | 김희헌 | 2022-05-01

by 김희헌 posted May 01, 2022 Views 193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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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2-05-01

주여, 우리를 도우소서! (9:1~6, 5:11~14, 21:1~19)

2022.05.01. 부활절 3. 어린이/청소년주일

 

[빛이 마음에 비칠 때 / 사도행전 91~6]

오늘 사도행전 본문은 사울이라는 한 유대인 청년이 경험한 비범한 사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다마스쿠스에 있는 이단들을 처단하기 위해서 하루에 백릿길을 걸으며 일주일이나 진군하던 젊은이가 완전히 거꾸러지게 되었다는 이 이야기는, 신념에 찬 삶의 이면에 놓인 깊은 어둠에 대해 말해주며, 또한 그 어둠에서 다시 일어나는 젊은 영혼에 깃든 갈망을 보여줍니다.

성서의 대표적인 종교적 회심 체험 사건으로 알려진 이 이야기는 비단 청년 사울에게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다양하게 경험하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하늘에서 빛이 비치자 자기 내면의 깊은 어둠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고, 그 어둠의 바닥에 내동댕이쳐졌을 때 비로소 감추어졌던 간절한 소망이 무엇인지 드러나는 체험, 그것은 종교인만이 아니라 절실한 삶에 깃든 일반적인 체험입니다.

지금부터 30년 전, 바닥에 떨어져 어둠을 헤맨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목사가 되겠다고 19살에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런데, 배움이 깊어갈수록 어린 시절의 교리적 신앙을 점차 벗어났고, 그 빈 자리에는 80년대 중반 한국사회에 일어난 민중사상이 자리 잡았습니다. 그에게 예수는 정치 혁명가로 이해되었고, 제도교회보다는 사회주의 체제가 하나님 나라에 가깝다는 신념이 생겼습니다.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중의 세상을 만들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바칠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격정의 시간을 보낸 그가 길을 잃기 시작한 것은, 89년부터 일어난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였습니다. 그는 마치 역사의 미래가 사라지고, 가야 할 삶의 좌표를 잃은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군 복무를 마치고 방황하는 그를 지켜보던 아버지가 제안합니다. 교회 사찰 집사님이 퇴직하여 공백이 생겼는데, 잠시 예배당 청소를 해보는 것은 어떠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 창고 방에 머물며 예배당 강단과 의자를 닦고 또 닦으며, 바닥과 마당을 쓸고 또 쓸며 두 달여를 보냅니다. 밤에는 새벽종을 칠 때까지 대하소설을 읽으며 마음을 달랬습니다. 그즈음 완간된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을 읽다가 거기 등장한 한 사내의 삶을 보게 됩니다. 백두산에 올라 아내를 얻고, 천릿길을 걸어 동지를 찾는 거대한 모습이 그 맘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문득 작고 어두운 그의 방에 환한 빛줄기가 쏟아집니다. 손에 들린 책을 던지고 무릎을 꿇자 소란스럽던 맘이 일시에 고요해지고, 오래전 사랑이 다시 찾아옵니다. ‘, 예수!’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자 청년은 짐을 싸서 집에 돌아와 그해 신학대학원에 입학합니다. 실패와 시련은 늘 다시 찾아왔지만, 길을 잃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이 청년의 체험은 사울의 다마스쿠스 체험에 비하면 작은 것이지만, 그 성격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아마 이 자리에 계신 교우들 가운데도 비슷한 고백을 할 분들이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울의 회심 체험에 관한 이야기는 사도행전에 세 번이나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는 누가로 알려진 나레이터가 제삼자적 관점에서 해설하고, 22장과 26장에서는 바울 자신이 회상하며 진술하는 이야기로 나옵니다. 그 시작은 갑자기 하늘에서 비친 빛입니다. 그리고 하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그는 묻습니다. “주님,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이 체험이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되고 있으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허술한 내용입니다. 먼저 기록된 것으로 알려진 고린도전서에 나온 바울의 진술과는 사뭇 다릅니다. (고전 15:8) 논리적으로 보더라도, 맞지 않습니다. 진군하는 길을 막고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묻는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는 다른 항변이 적절할 것 같습니다. ‘내가 언제 본적도 없는 당신을 핍박했다고 합니까? 왜 생사람을 잡는가? 내가 문제시 한 것은 우리 조상들의 종교를 망치는 이단들입니다.’ 이런 변명이 이어져야 할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사울이 들은 소리는 심장을 뚫고 들려오는 소리였기 때문에, 본문에는 다른 항변이 전혀 없습니다. 그가 들은 것은 인간 양심에 쏟아지는 하늘의 소리요, 개념과 논리에 앞선 영혼의 울림이요, 아직 걸어본 적 없지만 이미 과제가 되어버린 새로운 삶을 향한 암시이기 때문입니다.

그 소리를 실은 빛이 사울의 마음에 비치자, 그의 모든 계획은 바뀌게 됩니다. 적개심으로 가득 찬 신념은 길 위에서 산산조각이 나버리고, 눈먼 몸뚱이는 땅바닥에 엎어지고 맙니다. 하지만 빛이 비쳤으니 길도 새롭게 제시됩니다. “일어나서, 성안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일러 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오늘 사도행전 본문은 여기서 끝납니다. 낡은 시대의 적대감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새 삶을 암시하며, 이전과는 다른 삶을 향해 나아가도록 부릅니다. 청년 사울은 그 부르심이 자신을 이끌도록 내맡깁니다.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 때도 빛을 가슴에 담고 사는 삶이 되기를 바라면서.

 

[누가 풀까? / 요한계시록 511~14]

요한계시록 본문은 자신의 이름을 요한으로 밝힌 사람이 들은 노랫소리입니다. 그는 자신이 밧모(Patmos)라는 섬에 갇혔다고 말합니다. (1:9) 밧모 섬은 그리스와 터키 사이 에게해에 있는 작은 섬인데, 로마 시대 유형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어떤 이유로 갇혔는지 알 수 없지만, ‘예수에 대한 증언 때문이라는 그의 주장으로 보아, 예수가 걸은 이 땅에서의 길이 그러했듯, 그의 운명도 밝지는 않아 보입니다.

어두운 감옥 생활, 밑바닥에 떨어진 요한에게 두 개의 노래가 들립니다. 하나는 수만의 천사들이 부른 노래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 만물이 함께 외친 소리입니다. 그 내용은 어린 양에 대한 찬양입니다.

이 찬양이 어떤 맥락에서 나온 것인지를 알려면 5장 처음부터 볼 필요가 있습니다. 네 개의 환상으로 구성된 요한계시록 가운데, 5장은 두 번째 환상을 다룹니다. 무대는 하늘궁전입니다. 중앙의 보좌에는 오른손에 두루마리를 들고 있는 어떤 분이 앉아 있고, 그 주위로 흰옷을 입은 스물네 명의 장로가 둘러싸고, 그 옆에 눈이 가득 박힌 날개를 여섯 개씩 가진 네 생물이 서 있습니다. 장엄한 장면입니다.

이 장면은 수수께끼 같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것은 중앙보좌에 앉은 분의 손에 들린 두루마리를 펴서 읽는 것입니다. 읽기 위해서는 두루마리를 감싼 일곱 개의 봉인을 풀어야 합니다. 문제는 그것을 풀 수 있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고뇌에 빠진 요한에게 한 장로가 말합니다. 그 문제를 해결할 사람이 있다고, 다윗의 뿌리에서 승리한 사자와 같은 존재가 나타나 봉인을 풀어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사자와 같은 영웅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로마제국의 냉혹한 질서를 뒤엎을 승리자가 나올 수 없는 현실의 암담함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곳에서 주목받지 못하고 있던 어떤 존재를 보게 됩니다. 그는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어린 양이었는데, 그가 봉인을 풀게 됩니다. 이 어린 양이 두루마리를 받아들자 장로들은 노래를 부릅니다. 이제껏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노래’(ᾠδν καινν, new song)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두 개의 노래, 하나는 하늘의 천사들이 부르고, 또 하나는 땅의 모든 피조물이 부른 노래가 오늘 본문입니다. 이 노래와 함께 어린 양은 일곱 개의 봉인을 하나씩 풀어갑니다.

의미가 알쏭달쏭한 이 이야기를 해석하는 것이 사실 어렵지 않습니다. 이야기의 핵심은 누가 역사의 수수께끼가 담긴 두루마리의 일곱 봉인을 풀 것인가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것은 결코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로마제국의 죽음의 질서, 그 난제를 풀어갈 비전에 관한 것입니다.

누가 봉인을 풀 수 있을까?

이 문제는 로마제국 시대의 사람들만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도 신자유주의가 만든 사회적 양극화와 갈등, 소비 문명에 잠식된 파괴와 생명의 위기, 제국의 논리에 묶인 전쟁과 힘의 대결, 진실을 외면한 확증편향의 갈등과 혐오 등 일곱 개의 봉인으로 묶인 역사의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의 환상이 여전히 가능하다면, 천사의 노래가 사라지고 피조물의 탄식만이 흐르는 어두운 시대에도 예수가 걸었던 길을 아멘으로 화답하고 그 빛을 따라 걷는 삶을 꿈꿀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부활이 가르쳐주는 의미입니다.

 

[예수가 묻는 사랑의 의미 / 요한복음 211~19]

요한복음 21장 본문은 부활의 예수를 만난 제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는 실의에 빠진 일곱 제자의 힘을 북돋운 다음, 베드로에게 부활의 삶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이 이야기는 부활한 예수가 세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난 사건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스승이 없는 현실에 낙심하고 자기 길로 돌아간 것 같습니다. 좌절한 제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듯 베드로가 말합니다.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다!’ 그것은 사람을 낚는 일이 아니라, 예수를 만나기 전의 삶으로의 회귀입니다.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를 따라갔습니다.

그들은 밤을 새워 일했지만,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하고 헛수고를 합니다. 보람을 잃은 삶에, 노동의 열매도 없으니 얼마나 허탈했을까요? 긴 어둠 속 그들의 몸부림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아침이 돌아왔습니다. 스승이 찾아와 말씀하시지요.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 말을 따라 그물을 던지자, 들어 올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어둠 속 잡히지 않던 고기가 그들의 배 바로 옆에 가득했던 것입니다.

그때 눈이 떠집니다. ‘저분은 주님이시다.’ 그 말을 들은 베드로는 바다로 뛰어들어 스승에게로 향합니다. 밤새 고생한 제자들을 위해 예수께서는 생선을 굽고 빵을 준비하여 만찬을 베풉니다. 제자들을 위로하고, 당신의 성찬으로 초대합니다.

함께 아침을 먹고 난 다음,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하지만, 세 번이나 같은 질문을 받고 그만 고민에 빠집니다. 불안한 마음을 추슬러 그가 고백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니,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이 대화는 베드로와 나눈 것처럼 기록되어 있지만, 어쩌면 요한복음의 배경이 되는 신앙공동체의 고민과 갈망을 담은 것만 같습니다. 예수의 거듭되는 물음 앞에서 자신들이 행한 사랑의 진실이 과연 무엇인지를 시험당한 사람들의 고뇌가 깊이 배어있는 듯합니다. 갈망하지만 좌절하고, 실패하지만 영원히 씨름하는 과제가 바로 이 물음입니다. 우리 고백을 담은 사랑은 과연 무엇인가?

베드로는 그 물음 앞에서 두려움을 무릅쓰고 세 번을 고백합니다. 마지막 고백을 들은 예수께서는 그의 험난한 운명을 암시하시고, 마지막 당부의 말씀을 남깁니다. ‘나를 따라라!’ 이 말씀은 베드로만이 아니라, 요한의 공동체 그리고 모든 믿음의 공동체를 향한 당부의 말씀일 것입니다.

나를 따라라! 이 말씀은 현실을 딛고 일어서라는 말씀입니다. 어두운 밤의 수고로 인해 좌절하지 말고 눈을 들어 아침을 맞으라는 말입니다. 보람을 잃은 암흑 속의 분투도 아침이 오면 또 다른 열매를 맺게 되나니, 눈을 들어 새벽이 오는 것을 보라는 것입니다. 무게를 지고 언덕을 오르는 얼룩진 사랑이 말끔한 주장에 조롱당할 때도, 피 흘리는 꿈을 절대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역사를 잃은 관념에 말을 빼앗겼을 때도, 사랑과 꿈을 안고 분투하는 인간을 절대로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실패만 남은 아침에도 주님이 손수 준비한 성찬에 겸손히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두운 현실을 지나고 있습니다. 거대한 촛불의 파도가 무덤에 묻힌 사회입니다. 역사를 잃은 시뻘건 얼굴이 정의의 이름으로 활보하는 시대, 권리가 된 주장과 욕망의 몸을 입은 자유가 고삐 풀린 현실 앞에서, 어둡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종교도 어두운 바다에서 길을 잃은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나를 따라라!’ 하신 예수의 말씀에는, 어두운 밤의 분투가 실패로 남았을지라도, 아침이 오면 다시 사랑의 언덕을 넘고 또 넘어야 한다는 믿음의 당부가 담겨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가는 길을 우리가 다 알 수 없습니다. 예배를 시작하면서 읽은 시인의 고백처럼, 다만 우리는 주여, 도우소서.’ 하는 믿음을 안고 갈 때입니다. 시대를 분별하는 신학의 샘을 다시 파고, 한반도 평화와 생명의 선교를 위한 우리 발걸음을 주님께서 인도해주시기를 빌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16:9, 20:24)

요한복음은 그분을 가리켜 이라 하였고, ‘어둠이 빛을 결코 이기지 못한다.’는 믿음을 전해줍니다. (1:5) 청년 사울을 거듭나게 하고, 역사의 매듭을 푸는 요한의 환상을 낳은 그 믿음이 우리 시대의 모든 삶과 우리 신앙공동체의 길을 인도해주시기를 빕니다.

침묵으로 기도합시다.

 

[파송사]

우리의 사랑과 믿음이 위태로울 때, 예수의 물음 앞에 다시 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어둔 밤의 분투가 길을 잃을 때, 하늘의 빛을 구하며 기도합시다. 주여, 우리를 도우소서! 어둠이 빛을 결코 이길 수 없다는 요한의 믿음이 우리 모두의 삶을 이끌어주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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