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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마지막에 꾸는 꿈 ㅣ김정원ㅣ2022-04-24

by 나비정원 posted Apr 25, 2022 Views 221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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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2-04-24

마지막에 꾸는 꿈

요한계시록 1:4-8, 요한복음서 20:19-31

 

김정원

 

여러분에게 향린은 어떤 곳입니까? 2017년 가을부터 지금까지, 근 5년을 향린의 일원으로 살면서, 교우들께 가장 많이 묻고, 들었던 스토리 중 하나가 “내가 향린에 온 이유”였습니다. 저마다의 신앙배경은 달랐지만, 비슷한 말씀들을 하셨는데, “이 교회가 제 인생의 마지막 교회가 되지 않을까요?”였습니다. 향린은 교회와 신앙으로 인해 방황했던 사람들, 그리고 비판적 성찰의 끈을 놓지 않았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한 공간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저에게 향린은, 제 목회 여정에서 꼭 한 번은 머물러야 할 공간이었습니다. 죽기 전에 꼭 해 보아야 할 리스트, 일명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습니다. 대학시절, 집회 때마다 나부끼는 향린의 붉은 깃발을 볼때면 제 마음도 청년예수 깃발과 함께 일렁거렸습니다. 저무는 기장의 정신을 밝혀주는 빛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유학 중 한국에 들어올 때면, 조용히 주일 예배를 보고 가거나, 우리 교우들도 잘 참여하지 않는 송구영신예배에 참여하곤 했답니다. 그렇게 그리던 향린에서 좋은 분들을 만났고, 많은 지지와 응원을 받았으며, 전혀 다른 목회의 방식도 배웠습니다. 아시다시피, 좋은 일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한 장로님께서 “향린이 참 재밌었는데, 좋은 시절 다 가고, 가장 힘든 시기에 오셨네요. 때를 잘 못 맞춰 오셨습니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서로 웃기는 하였으나 퍽 슬픈 농이었습니다. 우리 교우들도 힘든 시절을 지나고 있고, 저 역시 지난 시간 참 많이 아팠던 것 같습니다. 지금 이 순간 역시 상처로 얼룩진 마음을 가지고 이 자리에 섰지만, 감히 한 구도자가 말한 ‘상처입은 치유자’가 되어 향린에서의 마지막 하늘뜻을 펼쳐보려 합니다. 

 

여러분들에게 가장 힘겨웠던 시간은 언제였습니까? 이제 정말 끝이구나, 더 이상은 가망이 없구나.. 하는 순간들 말이지요. 정치적으로는 이명박근혜 시절일 수도 있을 것이고, 바로 얼마 전 윤석열이 당선된 날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오랜 시간 정다웠던 교우들을 떠나보내던 시간이었을 수도 있고, 개인적으로는 누군가의 죽음을 봐야했거나, 경제적 어려움에 맞닥뜨렸던 순간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판데믹 상황을 지켜보며, 인간의 종말이 예견되는 요즘일 수도 있을 것인데, 보통 우리는 이러한 때를 암흑과 같다고도 말하고, 더 자주는 ‘절망’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인 계시록야말로 절망과 암흑의 때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읽어야 하는 메시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묵시로도 불리는 계시록은 난해한 예언들이 많아 해석의 틀이 다양한 것도 사실이나, 오늘 저는 ‘곧 휴거가 있을 것이다, 지금의 여려 재앙의 모습을 보니 곧 예수가 올 것이다, 심판이 있을 것이다’와 같은 이야기를 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물론, 아무리 들여다봐도 의미를 알 수 없는 비유와 상징들로 가득한 계시록을 읽는 일은 신학자들에게도 쉽지 않습니다만, 한 가지를 기억한다면 이 종말론적 메시지에 조금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늘 저의 계시록 해석은 2017년 우리 교회에 방문하기도 했던 미국의 여성 신학자 케서린 켈러에 기대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기원후 1세기에 새로 생겨난 일곱 개 회중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요한복음서를 쓴 요한과, 계시록을 쓴 요한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슬쩍 밝히며, 1세기 당시 회중들 모두가 로마제국 백성들이었기에, 밧모 섬의 요한은 로마제국에 대한 비판이 쉽게 노출되지 않기 위해 이해하기 어려운 고대의 상징으로 암호화하여 글을 썼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현재를 고대 묵시록의 요상한 초현실주의에 연결시켜야 할까요? 그것은 묵시록이 이미 우리의 현재 역사 속에서 작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연결을 읽어 내는 것을 통해 절망 속에서도 희망의 가능성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가능성은 집단적 긴박감이 급격히 증가하게 될 때의 가능성입니다. 켈러는 큰 위기 속에서 가능성은 점점 더 줄어들어 마치 어떤 기회 조차 없는 것 같지만, 아직 진짜 마지막은 아니라고 말하며 이 난해한 묵시읽기를 독촉합니다. 즉 계시록이 쓰여질 시기의 사람들은 팍스로마나 속에서, 개인과 집단의 희망이 사라졌던 당시를 ‘끝’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당시에 있던 감염병을 보면서, 자연의 이상 징후들을 보며 ‘정말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바로 이 끝이라고 하는, 암흑이라고 하는 그것이 지금시대의 우리와 연결고리를 갖게 해줍니다. 자본주의의 횡포와 판데믹 현상 속에서 지금 우리 시대의 다수의 사람들이 느끼는 이 절망감, 혹은 어떤 집단적 실패나 어떤 연유로든 개인의 실패로 ‘끝’이라고 하는 체념이 계시록과 우리를 연결짓게 합니다. 계시록의 시대와 지금의 시대 속에서 어두움의 패턴, 절망의 패턴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어로 계시록은 the book of the apocalypse, 혹은 the book of the revelations입니다. 아포칼립시스를 세계의 종말로 해석하곤하는데, 계시(revelation)를 뜻하는 그리스어 ‘아포칼립시스’는 베일을 벗긴다는 뜻입니다. 즉, 문자적으로는 사실 이 세계를 폐쇄한다는 뜻이 아닌, 그와는 반대로 닫혀있던 것을 드러낸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계시록은 닫힘이 아닌 열림의 책, 무언가를 노출시키고 있는 책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드러나고 있습니까? 바로 우리가 정상상태라고 믿고 있었던 것들의 진짜 속내, 즉 새 하늘과 새땅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종말론적 상황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밧모 섬의 요한이 보았던 절망의 상태와 그 양상은 다르지만, 반복되고 있는 절망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판데믹으로 인해 재택근무를 할 수 없었던 배달 노동자들이 드러났고, 혐오로 인해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트렌스젠더가 드러났고, 진보정치의 위기 속에서 목소리를 잃어버린 여성들이 드러났고, 성장주의를 지향하는 사람들로 인해 한국인들의 탐욕이 드러났고, 전염병으로 인해 억눌린 피조세계가 드러났습니다. 

 이러한 렌즈를 우리 공동체 향린으로 가져와 봅시다. 우리가 머무는 이곳 향린은 무엇이 드러나고 있을까요? 정상상태라고 믿고 있었던 것들 속에서 아프게, 고통스럽게, 마주하고 싶지 않은 채로 드러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교회의 중직들 사이에서도 이제 더는 조심스럽지도 않은 말, ‘향린이 계속 향린일 수 있을까?’, ‘우리에게 과연 이 상황을 극복할 역량이 있을까?’ 그만큼 우리 공동체는 분열로, 광야생활로, 코로나로, 불신, 청년들의 떠남 등으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 힘든 때를 지나고 있습니다. 

 

자, 이러한 절망의 시간, 마지막의 때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밧모섬의 요한은 구름, 용, 여신, 땅, 물, 어린 양 등을 통해 종말과 끝을 말하는듯 하지만, 사실은 시작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드러나고 있는 것은 종말적 상황만이 아니라, 마지막 기회가 긴급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뜻입니다. 마지막 때라는 것은, 곧 마지막 기회이지 않겠습니까. 돌아보면, 우리는 작년에도, 그 작년에도 가장 큰 위기 상황을 경험했습니다. 그때마다 마지막 기회들이 있었고, 아마 우리는 그 기회를 놓쳤을 것입니다. 올해의 더 큰 위기 상황에서도 우리는 마지막 기회를 얻게 될 것입니다. 정리하면, 집단적 위기가 왔을 때, 은폐되어 있던 것들이 폭로됨으로써, 우리는 마지막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고, 마지막이기에 긴박해지게 됩니다. 긴박할수록 그 기회는 간절해질 수밖에 없겠지요, 이 간절함은 결국 우리의 실천을 이끌어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곧, 계시록은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위기를 폭로하면서도 동시에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를 설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알파요 오메가의 신을 처음과 끝으로만 읽을 것이 아니라, 오메가와 알파의 신으로 고백할 수 있게 됩니다. 즉, 창조에서 종말이 아닌, 종말에서 창조로, 끝에서 시작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은 맞지만, 끝은 아니라는 말로 표현하면 좀 더 묵시의 의미가 다가갈까요? 끝은 끝이지만, 진짜 끝은 아니다, 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나을까요? 

 

시대도, 향린도, 그리고 혹은 여기 계신 분들 중 누군가에게, 그리고 오늘 마지막 하늘뜻을 전하는 저에게도 어둠이 지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이 절망과 마지막과 어둠의 때를 지나시겠습니까? 이 긴박한 시간 속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는 기회를, 그러니까 진짜 마지막 기회를 잡겠습니까, 아니면 다음에 닥칠 더 악화된 마지막을 맞이하겠습니까? 물론, 내일은 또 내일의 더 극한 어둠이 찾아오겠고, 이어 더더욱 긴박한 마지막 기회가 우리에게 주어질 수도 있겠지만, 오늘의 어둠이 내일의 어둠보다 밝듯,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를 잡는 것이 내일의 기회를 잡는 것 보다 한결 수월할 것입니다. 종말론적 폭로가 우리에게 주는 이 긴박함이 우리의 심장을 아프게 하겠지만, 우리가 정상이라고 믿어왔던 것들을 흔들어제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전도사님들이 자주 저에게 하는 말이 있는데요. “아, 제발 오늘은 교회 이야기 하지 마세요. 교회 이야기 금지”가 그것입니다. 퇴근 후에도, 쉬는 날에 재밌게 수다를 떨다가도, 기승전 교회이야기로 빠지다보니 지쳤던 모양입니다. 그만큼 저는 지난 시간 향린에 몰두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 향린을 떠나는 목회자로서, 우리 향린이 나아갔으면 하는 방향을 고심해 보았습니다. 지금 우리 향린이 겪고 있는 분열, 광야생활, 코로나, 건축, 갈등, 떠남 등은 분명 묵시적이지만, 이 묵시가 건네고 있는 것은 앞서 밝혔듯 기회입니다. 이 기회를 함께 포착하고자 하는 저의 소망일 것이며, 향린을 지켜 갈 교우들께 던지는 제언이 될 것 같습니다. 

 

제 제언 속 대안적 모델은 도마입니다. 흔히 도마는 의심 많고 믿음이 적은 제자로 일컬어지지만, 사실 순종과 복종을 강조하는 교회 분위기 속에서 도마의 진정이 곡해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도마는 다른 제자들과는 달랐습니다. 그는 부활한 예수를 듣는 것을 넘어, 보고, 다가가고, 만지고, 공감하고, 느끼고 싶었습니다. 그가 경험하고 싶었던 것은 거리두기나 언택트의 관계가 아닌, 보다 깊이 연관지어 질 수 있는 inter-connection 상호연결의 친밀한 관계를 요청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이러한 도마의 요청에 예수는 반기며 응답합니다. “응 그래 도마야. 이리 와서 나의 고난과 생명의 자리를 만지고 느끼고, 감응하렴.” 그렇다면 “도마야, 왜 꼭 보고 믿으려고 해~ 보지 않고 믿어야지~”라는 예수의 응답은 꾸짖음이라기보다는, “도마야, 나를 이제 감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로 가서, 나 예수를 친밀하고 생생하게 경험한 너 도마가, 이제 그들에게 또 다른 예수가 되어주렴, 나를 보지는 못하였지만, 이제 너를 통해 예수를 볼 수 있게 말이야!”라는 당부로 읽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제가 도마에게서 얻은 위기 극복의 힌트는, 바로 상호연결, 관계, 감응, 친밀감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서로가 연결되고, 관계하고, 느끼고, 감응하기 위해서는 이미 결정된 상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중요한 전제조건이 됩니다. 시쳇말로 ‘답정너’- (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대답만 해)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또한, 똑같은 것끼리 관계 맺는 것은 동질성의 반복일 뿐, 창조나 역동을 만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빨강에 빨강을 섞으면 다시 빨간색이 되지만, 빨강과 파랑의 만나면 전혀 새로운 보라를 만들어 냅니다. 이처럼 변화와 역동, 창조는 나와는 차이가 있는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을 때 발생됩니다. 그 관계는 “너는 왜 의심을 하니? 넌 왜 믿음이 없니? 왜 꼭 만져보려고 하는거야?”와 같은 채근이나 따져 묻는 곳에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죽은 공간, 절망의 공간이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는 창조적 상상력이 필요한데, 그것은 다중적이고 역동적이고, 파악하기 힘들고, 불투명하고, 미결정 상태이고, 충분히 다 알려져 있지 않은 상태 속에서 일어납니다. 도마가 다른 제자들과 같은 태도를 취했다면, 이렇게 확장된 해석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서로 다름이 충돌하는 것을 창조적 긴장으로 바라보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아, 지금 이렇게 서로 다름이 충돌하는 것을 보니, 이제 서로가 연결되려고 하는구나!’ 라고 하는 기대감, 이때 잊지 말아야 할 것, 미리 결정하거나, 속단하지 않으려는 자기절제와 자기반성, 이 속에서 비로소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될 수 있을 것이라 저는 믿습니다. 

 

철학자 니체는 책 <선악의 저편>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철학자), “오늘날 가장 불편한 곳, 그곳으로 가야만 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덧붙여 얼마나 많고 다양한 것을 감당하고 받아들일 수 있느냐에 따라 인간의 가치와 순위가 결정된다고 말하였습니다. 여러분의 가치는 얼만큼입니까? 서로연결지어질 수 있는 능력이 여러분에게 얼만큼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창조와 생명은, 새하늘과 새땅은 가장 불편한 곳, 가장 낯선 곳, 가장 나와 멀리 있다고 생각하는 그곳과 연결지어질 때만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실 이미 알고 있습니다. 서로서로의 연결은 논리와 이성으로 되지 않는 다는 것을요. 마음이 닿아야합니다. 끄덕끄덕하며 수용하고, 상처입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판단 없이 듣고, 얼싸 안고, 하이파이브로 맞장구를 치는 것으로 우리의 마음은 연결됩니다. 위로의 말 한 마디가 언 마음을 녹이고, 신뢰를 만들어 갑니다. 거대한 종말론적 위기 앞에서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것 같지만, 이 위기를 극복해나갈 창조와 생명은 아주 작은 친밀감으로 만들어집니다. 공감하고 감응하는 도마가 되어보는 것입니다. “예수님, 부활하셨다니, 정말이었군요. 제가 너무 행복합니다. 제가 당신을 안아보고, 당신의 고통의 흔적이 녹아있는 그 손과 발을 어루만지고 싶습니다. 예수님, 정말 많이 고통스러우셨지요? 그렇지만 당신은 이제 우리에게 평화로 오셨군요. 제가 예수님의 고통과 부활에 지금, 여기에서 감응하고 공감하며, 응답합니다.” 

 

차이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여러분들 속에 여전히 있습니까? 그렇다면 아직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만일 여전히 나, 그저 나라는 한 개인으로서만 존재하고 싶다면, 이 시련의 시간은 계속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의 주체가 아닌, 복수의 주체, 여러 존재가 공존하는 다채로운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 주체는 멈추지 않습니다. 언제나 다른 관계와 연결지어지는 주체로, 끊임없이 다른 것을 마주하고 수용하고자 하는 ‘환승 중인 주체’(사카이 나오키)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꿀 수 있는 마지막 때의 꿈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향린에서 계속해서 차이를 만들어 나가고 싶었습니다. 단순한 공론장이 아닌, 감성 공론장이 형성되기를 긴히 바라며 눈에 띄게, 혹은 아무도 모르게 움직여 왔던 지난 5년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의 정동과 감수성이 너울대는 워크숍 형식의 성서학당을 진행하지 못한 것이 큰 아쉬움으로 남습니다만, 남는 문제들을 사랑하는 우리 교우들께 맡기고 떠납니다. 저에게도 지금의 시간은 위기이며, 묵시의 상황이지만- 저 역시 마지막 때 꿀 수 있는 꿈을 가슴에 품고 이 시기를 지나려합니다. 더욱 낯선 공간으로 저를 던져놓을 것이며, 그 안에서 만들어지는 창조와 생명의 힘을 ‘마지막 기회’로 삼고자 합니다. 계시록이 주는 은택인가 봅니다. 물론, 저 역시 친밀함, 공감, 경청, 감응, 어루만짐, 위로를 하는 사람으로 교회 밖 다른 낯선 공간에서 살아가려 노력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만,  그러기에 우리에게 믿음과 행동이 필요하다고 말한 캐서린 켈러의 말을 되새기게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 순간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여러분. 저의 고난과 부활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를 환대해주고, 어떻게 다시 살아났냐고 따져 묻지도 않고, 판단하지 않으며, 이 시간 기뻐하며 함께 있어주어 감사합니다. 생명과 평화의 기운이 우리를 덮습니다. 끝이 아닙니다, 다시 시작입니다. 오메가요, 알파인 하나님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파송사: 

 

우리는 마지막 때를 살아가지만, 마지막 꿈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로부터 가장 먼 곳에 나를 던질 때, 생명과 창조가 시작됩니다. 

자유인으로서 사십시오. 종말의 때를 지나는 우리는, 

공감하고, 경청하며, 친밀함으로 

더욱 새로운 시작을 만들어 나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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