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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새로운 존재 ㅣ 김지목 ㅣ 2022-03-27

by 김지목 posted Mar 27, 2022 Views 162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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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2-03-27

 

 

새로운 존재 (수 5:9~12, 고후 5:16~21, 눅 15:1~3,11b~32)

2022.03.27. 사순절4

 

 

오늘 우리는 탕자의 비유로 알려진 예수의 비유 이야기를 복음서 말씀으로 읽었습니다. 아버지의 재산 일부를 당연하게 자신의 것으로 여긴 둘째 아들이 미리 그것을 끌어다가 이내 탕진하고, 고생하다가 뉘우쳐 다시 아버지에게로 돌아왔다는 줄거리입니다. 이 비유에 담긴 종교적인 의미에 대해서 통상적으로 이렇게 이해해왔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아버지의 재산을 제 것인 양 끌어다 탕진해버린 철없는 아들은,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총에 감사할 줄 모르고 하나님을 떠나 죄를 지은 인간에 비유되었습니다. 이와 반대로 그런 아들조차 너그럽게 다시 받아주고 상속자의 권리를 복권시켜준 아버지는 한없이 자비로우신 하나님으로 비유되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죄를 짓는 천덕꾸러기이지만 하나님은 그가 회개했을 때 너그럽게 받아주시는 분이시니, 인간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얼마나 우매한 죄인이며, 하나님은 그 얼마나 자비로우신 분인가,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인간은 태생적으로 우매한 죄인임을 인정하라, 신앙과 교회를 다시는 떠나지 말라 하는 해석이 통속적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결론의 해석은 교회중심적으로 그럴듯해 보이지만, 이야기의 앞뒤를 잘라먹고, 비유를 전하는 예수의 뜻을 뒤틀어버린 불완전한 해석입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가르치신 본뜻이 무엇이며, 이 비유를 어떤 정황에서 누구에게 전했는지를 파악할 때 이 비유의 의미를 올바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비유들은 하나님나라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나라를 논리적으로만 설명하지 않고 듣는 이들이 체험했을 법한 경험의 소재들을 활용하여 이야기를 완성하고, 그 비유를 통해 하나님나라를 이해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은유적으로, 비유를 사용하여 설명했을 때, 청중은 자신이 몸으로 각인했던 체험, 그때의 감동과 깨달음으로 하나님나라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논리적으로 아리송하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감동적으로 하나님나라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는 이성과 감성, 덕성으로 종교심을 가르친 탁월한 교육자였습니다. 삶의 동력으로 하나님나라를 역동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치셨습니다.

 

누가복음서 15장에는 세 개의 비유가 등장합니다. 세 비유 모두 잃어버린 것을 되찾을 때 만끽할 수 있는 기쁨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3절에서 7절까지는 잃어버린 양을 되찾는 비유입니다. “아흔아홉마리 양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한 마리를 잃어버리면 그 양을 찾을 때까지 찾으려고 애쓰고, 또 찾으면 얼마나 기쁘겠느냐, 아흔아홉마리를 갖고 있어도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으면 그렇게나 기쁜 것이다하는 내용입니다. 두 번째 비유는 8절에서 10절까지 잃어버린 드라크마 동전의 비유입니다. 속뜻은 첫 번째 비유와 같습니다. 아홉 닢의 동전을 가지고 있지만 한 닢의 동전을 잃어버렸을 때 등불을 켜고 집안을 샅샅이 뒤지고 또 그것을 찾으면 그 기쁨이 매우 크다는 내용입니다. 양을 돌본 경험이 있는 사람, 한 드라크마가 삶에 있어서 매우 긴요한 사람들이 이 비유를 들었을 때, 되찾음의 기쁨에 크게 공감할 것입니다. 그런 기쁨이 곧 하나님의 기쁨인데, 죄인이라고 간주된 사람이 의인으로 인정받고, 자유인으로 당당하게 살아갈 때, 하나님이 그렇게나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비유는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눈 말씀입니다. 앞선 두 개의 비유와 마찬가지로 이어지고 있는 세 번째 비유는, 역시 탕자의 비유가 아닌 잃어버린 아들을 되찾는 비유로 인식해야 합니다. 이 비유를 훓어보겠습니다. 둘째 아들의 요구에 따라 아버지는 재산을 분할하여 두 아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둘째는 작심하고 집을 떠나 재산을 탕진했는데 엎친 데 덮쳐서 흉년을 맞아 둘째는 바닥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로마의 가축인 돼지를 사육하는 가장 천한 일을 하다가 돌이켜 아버지 집의 품꾼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둘째를 품꾼이 아닌 상속자로 맞아줍니다. 가장 좋은 옷을 입혀서 상속자의 지위를 회복시켜주었고, 반지를 끼워주어 상속자의 권위를 회복시켜주었습니다. 또 신발을 신겨서 상속자로서 자유롭게 살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끝까지 사랑한다지만 이토록 사랑할까요? 이전의 두 비유를 연상하면서, 둘째를 되찾은 아버지의 큰 기쁨에 주목해 봅니다.

 

여기에다 앞선 두 개의 비유와 다르게 하나의 에피소드가 추가됩니다. 첫째 아들의 등장입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한 동생을 아버지는 상속자로 받아주었고 잔치를 벌이고 있다는 소식에 아버지에 대한 섭섭함을 강하게 내비칩니다. 나눠받은 아버지의 재산을 잘 지키고 성실하게 살아온 첫째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반응일진대 이야기의 결말은 성급하게 아버지의 한 마디로 정리됩니다. “내 재산은 너의 재산이나 다름없단다. 그런데 너의 아우는 죽었다가 살아난 셈이니 내가 기뻐하지 않을 수 있느냐?” 첫째 아들이 불만을 토로하는 장면에서 첫째는 아버지와 다른 태도로 동생을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재산을 두고 너와 나를 구분 짓는 첫째지만 아버지에게는 첫째나 둘째나 모두 한 가족입니다. 가족이 되게 하는 질료는 사랑이라는 아교(阿膠)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친족도 남이 되지만, 사랑의 힘은 누구라도 가족이 되게 합니다. 잃어버린 가족을 되찾은 기쁨에 아버지는 집중하면서 사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버지에게는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 차 있지만, 첫째의 주 관심사는 재산에 있습니다. “무엇이 너의 것이냐? 나의 지켜야 할 것은 이것이다.” 그의 마음에는 사랑이 머물 자리가 없어 보입니다. 여기에서 주목할 관건은 사랑입니다. 둘째를 맞아들인 아버지의 기쁨은 결국 사랑에서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사랑이 있다면 천국의 기쁨이 뒤따릅니다.

 

비유 말미에 등장한 첫째 아들은, 사랑 없이 율법을 해석하며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는 자들, 151절과 2절에서 등장하는 율법학자와 바리새인을 빗댄 인물로 보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비난했습니다. 율법해석에 따라 죄인으로 지목된 세리들과 식사의 친교를 나누며 어울리는 예수를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의 단죄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독사와도 같은 폭력을 거절했습니다. 율법을 거들먹거리며 세리를 죄인으로 규정하는 일은 당시 쉬운 일이었고 또 그들에게 퍽 이로운 조치였습니다. 율법은 민족주의적 영향력 아래 헤게모니를 획일화시키는 기능으로 오용되었습니다. 로마를 위하여 동족의 세금을 걷는 세리들은 민족의 적으로 간주되기 십상이었고, 민족의 적을 율법으로 쉽사리 죄인의 굴레를 씌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규정을 주장하는 그들, 율법학자와 바리새인은 권력을 용이하게 획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첫째 아들을 등장시켜서 그들의 사랑 없는 율법해석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랑 없이 자기 재산에 연연하며 제 아우를 못마땅해 하는 첫째 아들처럼 율법을 이용하여 힘없는 사람들을 죄인 취급하는 너희가 올바르냐?, 사랑 없는 율법해석은 거짓된 것이며 너희 율법학자와 바리새인은 권력을 탐하는 모리배에 지나지 않는다!”는 예수의 비판이 여기에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가복음서 15장의 비유들은 당시 천대받으며 양을 치던 목동들, 드라크마 한 닢이 삶에 요긴했던 가난한 사람들, 세리들과 같은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의 희생자들에게 천국의 기쁨을 나누어주는 이야기입니다. 동시에 사랑 없이 지배권력을 차지하면서 하나님의 율법을 오욕하는 거짓된 종교지도자, 권력 모리배들을 비판하는 것이었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새인에 의해 죄인으로 낙인찍혀 공동체에서 배제된 이들이 잃어버린 양들이었습니다. 권력이 집중됨에 따라 가난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힘없는 자들의 삶이 그토록 소중한 드라크마 한 닢이었습니다. 아버지에게로 돌아올 수 있는 가능성을 박탈당한 채 죄인으로밖에 살아갈 수 없었던 세리가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는 자리가 바로 예수의 식탁이었습니다. 그 자리는 하나님나라의 기쁨이 샘솟는 자리였고, 죄인으로 취급받던 그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예수의 사역은 이와같은 하나님나라의 자리를 펼쳐내고 그 안에 구원받은 새로운 존재를 탄생시키는 운동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율법학자이나 바리새인과 같은 거짓의 실체를 드러내는 예언자적 사건이 파생되었습니다.

 

예수의 구원사건은 구조적 죄악에 의해 죄인으로 낙인찍혀서 숨조차 쉴 수 없는 이들에게 숨통을 틔워 구원받은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게 하는 운동입니다. 이같은 예수의 구원사건을 준행하는 집단이 교회입니다. 교회의 선교활동의 목표는 새로운 존재를 잉태하는 것입니다. 교회생활과 선교활동 과정에서 나 자신이 새로워지고, 우리의 관계가 늘 새로워지며, 새로운 희망을 함께 꿈꾸면서, 새로운 사회,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나가는 것! 이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길입니다.

 

오늘의 제1성서 여호수아기 말씀에는 가나안 땅의 길갈이라는 지명이 나옵니다. 히브리어 (gil)’뒤엎다, 역전시키다는 의미를 가진다고 합니다. 59절의 말씀대로 길갈은,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받은 수치를 하나님께서 뒤엎으시고 역전시키신사건을 간직한 지명입니다. 이집트를 벗어나 40년의 광야생활을 마치고 가나안땅에 들어선 이스라엘에게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던 장소입니다. 출토된 예리한 돌조각들을 미루어 보아 길갈은 할례와 유월절 종교의식의 축제를 벌인 곳으로, 성서학자들은 추정하고 있습니다. 할례를 겸한 이와같은 종교의식은 일종의 성년의식으로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문화는 북동쪽 메소포타미아나 이스라엘 외 블레셋 문화권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야훼 족속의 유일한 흔적이라고 합니다.

 

할례는 세례나 성만찬과 같은 종교의례입니다. 야훼사상을 따르기로 결단하는 의례 중의 하나입니다. 그 결단을 몸에 새기고 평생토록 그것을 기억하도록 하는 의례입니다. 수치스러웠던 이집트에서의 노예생활과, 또 광야생활 동안 경험하고 훈련했던 야훼사상을 기억하는 것으로 이 의례가 거행되었을 것입니다. 특이한 점은 보통 이스라엘 민족은 태어날 때 할례를 하게 되는데, 길갈에서는 사춘기에 접어든 소년들이 할례의 대상이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진입한 후 가나안 원주민과 문화적으로 습합되는 과정에서, 가나안 사람이 이주민 이스라엘의 영향을 받아서 야훼사상을 수용했던 흔적으로 보입니다. 또 하나의 주목할 만한 문화적 현상이 있는데, 이스라엘이 길갈에서 유월절을 지내면서 그 땅의 소출을 먹었다(11)는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광야생활을 하던 유목민족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면서 농경사회로 전이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농경문화권으로 진입한 이스라엘이, 야훼사상을 훈련했던 유목문화의 경험을 잊지 않기 위하여 유월절을 지내면서, 할례로 야훼사상의 흔적을 새기려 했다는 점이 특별하게 발견됩니다.

 

가나안 땅의 길갈은 이스라엘에게 중요한 전환의 사건이 새겨진 지역입니다. 광야생활에서 훈련했던 야훼사상을 가나안 땅에서도 잊지 않고 전승하려고 노력한 장소였습니다. 이집트에서 노예였던 그들이 야훼사상으로 자유인이 된 것을 기억했고, 편안한 농경문화권으로 진입했지만 노예와 떠돌이를 돌보시는 유목문화권의 야훼사상을 기억했습니다. 기억들을 집단적으로 전승하기 위해 매해 유월절에 포피의 언덕이라는 길갈에서 할례의식과 축제를 벌였습니다. 이러한 문화적 노력은,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가나안 땅의 농경문화와, 거기에서 파생되는 바알종교의 맘모니즘에 저항한 흔적이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맘모니즘에 젖어들지 않고, 유월절 종교의식을 통해 야훼사상을 기억하는, ‘새로운 존재로 환원시키기 위한 문화적인 분투가, 바로 길갈에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야훼사상을 할례로써 몸에 새기면서 너희가 이집트에서 받은 수치를, 오늘 내가 없애 버렸다.” “이전의 수치를 없애고 너희를 새로운 존재로 만든 나를 기억하라는 야훼의 선언을 마음에 새겼던 것입니다.

 

길갈새로운 존재로 담금질하는 용광로와 같은 곳입니다. 우리에게는 신앙의 마음자리를 살피며 신앙을 지켜갈 수 있는 길갈의 용광로가 필요합니다. 길갈이라고 하는 이 중요한 종교적 상징어가 할례라는 남성중심문화의 잔재로 채색되어 있어 유감스럽습니다만, 길갈에 담긴 상징적 의미는 되새길 필요가 있겠습니다. 가나안 땅 원주민 사회에서 풍요의 신으로 추앙받던 바알을 따르지 않고, 노예의 편에서 이집트 제국에 대항했던 야훼사상이 길갈에서 찬양되었습니다. 광야 떠돌이 히브리의 편에서 정의로운 율법을 고안하고 예언자 신앙을 배태한 야훼사상을 지켜내기 위해 분투했던 이스라엘의 길갈은, 우리에게 신앙의 중요한 흔적으로 간직할 만합니다. 우리는 올해 사순절을 지내면서 새벽기도회로 모이고 있습니다. 짧은 시간 온라인으로 모이고 있습니다만, 이 시간이 우리에게 새로운 존재의 작은 길갈이 되기를 바랍니다. 길갈은 하나님의 선포가 들려오는 자리입니다. “너희가 이집트에서 받은 수치를, 오늘 내가 없애 버렸다!” “내가 너희를 새롭게 하였다!”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 속에서 그러한 길갈의 선포가 메아리치는, 날마다 새롭게 새로운 존재됨을 경험하는, 우리 삶이 되기를 또한 바라봅니다.

 

새로운 존재는 사도 바울의 언어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선언입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그리스도의 희생의 의미는 단도직입적으로 유대민족 중심주의를 배격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방 그리스도인에게 유대주의의 율법이 강요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유대주의가 설치해놓은 수많은 율법을 통과해야만 그리스도교 신앙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로 극명하게 드러난 예수 그리스도, 그의 말씀과 생애를 본받으며 신앙을 얻을 수 있는 것이지, 유대주의 율법의 거르개(필터)를 통과하여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관점에서 유대 율법주의는 이방인에게 걸림돌이 되는 것이고, 이방인이 유대인의 율법을 따라가는 사이에 율법주의의 노예가 되어 결국 그들 기득권의 양분(養分)이 되고 만다는 것을, 바울은 일찍이 간파했습니다.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니, 바울이 없는 틈에 고린도교회를 방문한 예루살렘 유대주의자들에게 더 이상 휘둘리지 말라는 권면입니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새로운 피조물은 하나님과 화해를 이룬 존재입니다. 화해는 현상적으로 하나가 된 것이며, 역동적으로 교감하는 것이며, 심미적으로 하나의 공감대를 형성한 상태를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먼저 화해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통해 우리도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었으니,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절이 되어 하나님과 세상이 화해할 수 있도록 선교해 나가자는 사도 바울의 권면이, 오늘 함께 나눈 서신서의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새로운 존재의 역할과 사명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세 성서본문을 관통하는 주제는 새로운 존재입니다. 잃어버린 것을 되찾은 기쁨의 자리, 그 하나님나라의 자리에서 변화된 사람, 죄인으로 취급받았지만 이제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사람, 그가 새로운 존재입니다. ‘새로운 존재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태동합니다. 둘째 아들이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있었던 데에는 아버지의 큰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선교활동에서 새로운 존재가 잉태되기를 바란다면 그보다 먼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 있으면 하나님나라의 기쁨이 뒤따르고 그 기쁨 속에서 새로운 존재가 솟아납니다. 길갈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는 곳입니다. “너는 새로운 존재!”라는 하나님의 선언을 들을 수 있는 곳으로 깊이 들어가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길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새로운 존재로 선언 받은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사절이라고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전합니다. 하나님과 이 세상이 화해하여 새로운 세상이 되도록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로, ‘새로운 존재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새로운 존재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와서, 깊은 곳에 길갈을 품어, 하나님과 화해하는 새로운 세상을 창조해 나가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존재의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꿈꾸는 모든 일들 속에서 새로운 존재됨을 경험하고, 우리의 사역 가운데 새로운 존재들이 솟아나고, 우리의 기도와 헌신으로 새로운 세상이 창조되기를 소망합니다. 사랑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 향린공동체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침묵으로 기도합시다.

...............

 

 

(파송사)

 

너희가 이집트에서 받은 수치를, 오늘 내가 없애 버렸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언을 들으십시오.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 사랑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건축하는 교회당에서

뜻을 품은 모든 선교활동에서

우리의 친교와 봉사 가운데

새로운 존재가 잉태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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