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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고통스럽게,또는 아릅답게ㅣ김정원 ㅣ 2022-02-27

by 나비정원 posted Feb 27, 2022 Views 216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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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2-02-27

고통스럽게, 또는 아름답게

 

출애굽기 34:29~35, 고린도후서 3:12~4:2, 누가복음서 9:28~36

 

매 주 화요일이면 생일을 맞은 교우들께 카드를 작성하곤 합니다. 적은 여백에 짧은 문장으로 그리움과 애틋함을 담으려 늘 노력하고 있는데요. 그러나 이토록 시끄러운 시국에, 교우들의 건강과 안녕을 묻는 일은 늘 망설이게 됩니다. ‘건강하시길 기도한다. 평안을 빈다라는 말이 절망의 시간 앞에서 무색해 지곤 합니다.

 

교우 여러분, 안녕들하십니까?

 

재작년, 청년들과 함께 현재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로 뽑히는 슬라보예 지젝의 책을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책은 2017년에 출판된 책이었습니다. <자본주의에 희망은 있는가?>에서 지젝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와의 관계에 대해 이미 짚어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시위대의 싸움은 늘 강대국에 속을 수밖에 없다. 우크라이나의 광장의 시위는 멋지지만, 새로운 우크라이나를 위한 싸움은 푸틴의 개입을 반대하는 싸움이어야 한다. 오늘날 필요한 것은 서로 다른 분쟁의 조건을 버리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에서 유대를 강화하는 것이다. 해방적인 우크라이나 정치세력과 푸틴의 정권에 반대하는 러시아 반대 세력 사이에서 공통의 조직 네트워크를 구성해야 한다. 유토피아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미친 행동이 진정한 해방을 가져온다. 국가라는 지정학적 위치에서 벗어나, 집권층이 조작하는 국수주의적 분쟁 속에서 벗어나, 국경을 넘는 미친 짓을 벌여야 한다.”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는 친러시아와 친서방간의 분쟁에 대한 논쟁에서 벗어나, 민중들 간의, 평화를 열망하는 사람들 간의 연대를 강조하였는데, 이러한 그의 지적이 전쟁이 벌어진 작금의 상황에서, 그리고 민중을 혼란케하는 대선 정국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변화산 사건혹은 산상변모사건이라고 불리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기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한 뒤, 베드로, 요한, 야고보와 함께 산에 오르셨습니다. 예수께서 한참을 기도하고 계시는데, 갑자기 그의 모습이 변하였습니다. 하얗게, 아니 하얀 것을 넘어, 눈이 부시고 빛이 날정도로 예수의 형상이 변한 것입니다. 그러더니 불현듯 예수의 옆에 두 사람이 나타났는데, 엘리야와 모세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엘리야는 어떤 존재였습니까? 그는 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전해지는 메시아적 인물이었습니다. 모세 역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구원자적 인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의 큰 인물 두 사람이 예수 옆에 나타났고, 셋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두 사람의 등장으로 이야기는 보다 성스러워지게 됩니다.

 

그런데 고백하자면, 한 주 내내 이 본문을 묵상하였지만, 아무리 곱씹어도 이 성스러운 본문이 소화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 하필, 하고 많은 본문 중에, 이토록 거룩하고 계시적인 사건이 제 하늘뜻펴기의 본문이 된 것인지에 대해 볼멘소리를 한 적도 있었습니다. 저의 메마른 영성으로 이 거룩한 변화산 사건을 해석해 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한 가지 에피소드가 떠올랐습니다. 대학원 첫 학기, 시대의 스승이신 김경재 선생님의 수업을 들을 때의 일입니다. 과목명은 신비주의 연구였습니다. 저는 당시 마이스터 에카르트의 신비주의와 신비체험을 한 수녀들의 이야기를 함께 엮어 발제를 해야만 했습니다. 역사적 예수와 민중교육이 당시 제 신학 이해의 전반이었기에, 저는 발제를 마친 후 선생님께 이러한 질문을 하였습니다. “교수님, 이러한 신비체험은 결국 해석의 자리마다 달라지는 것 아닌가요? 그리고 겨우 종교적인 틀 안에서만 인정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자 그 인자한 선생님께서 불같이 화를 내시며, “지금은 그런 시시껍절한 질문을 하는 시간이 아니올시다! 신학을 한다는 사람이 사회학적이거나 철학적인 질문을 하려거든 앞으로 이 시간에 참여하지 말길 바랍니다.” 지금까지도 그분의 음성이 귀에 쟁쟁한 것을 보면, 그때의 저는 상당히 쪽팔렸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매일 새로워지기를 기도합니다. 그 기도는 자기반성과 자기부정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신학자 루돌프 오토와 폴 틸리히는 우리가 신 앞에서 철저하게 자기부정을 하기 위해서는 합리주의의 탈을 벗고, 성스러움을 경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체험은 합리적 이성으로는 설명하기 어렵고, 인간의 도덕적 가치 규범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무섭고 떨리면서도 매혹적이고 황홀함의 신비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는 오순절 성령운동과 같이 열광주의적 체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예배는 지나친 감정주의가 지배하면서, 십자가의 보혈로 죄 씻음이 되었다, 라는 것만 자각될 뿐, 사회적 책임과 저항 의식은 약해지고 기복주의 신앙이 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참 종교체험이란, 어느 정도의 고양된 감정은 느끼게 되지만 이는 더욱더 우리의 몸과 마음을 또렷하게 하여, 은혜, 감사, 찬양, 사랑의 봉사가 나타나게 된다고 합니다(김경재).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신비 체험, 다시 말해 거룩을 체험한다는 것은 단순히 초자연적 사건이 아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그리고 사람의 본래성이 무엇인지, 역사의 삶과 죽음 등의 궁극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밝게 드러나는 사건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김경재). 이러한 계시 사건의 매개체는 자연이기도, 역사이기도, 그리고 우리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틸리히에 따르면, 이론상으로 우리 모두는 궁극적 계시의 매개체, 즉 신비를 드러내는 계시자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사람이 인간의 조건을 짊어진 채로, 이것이 중요합니다. 인간인 채로. 그러면서도 인간됨의 한계를 극복하고 부정하면서, 동시에 초월한다면 궁극적 계시자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제가 이 말을 전달하고 있으면서도, 이게 형이상학적으로만 가능하지 현실적일 수 있느냐? 라는 물음이 제 뇌리를 스칩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이겠지요. 우리의 육체와 지식과 욕망은 하나님의 뜻을 드러낼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지만, 동시에 우리의 육체와 지식과 욕망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가 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있는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할까요? 물론 꼭 고백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만, 여하튼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성찬식을 하며 예수를 기리는 이유는 그가 오직 하나님의 본성과 뜻,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진리와 생명만을 오롯이 드러내는 자기부정의 용기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그리스도성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위대성을 간직하면서도 비워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간적 유한성을 잃지 않은 채로 땅 위의 사람들을 만나고 사랑한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드러나고 있는 예수는 이 두 가지의 면모를 실로 다 드러내고 있습니다. 불현 듯 하얗게 변한 그의 모습은 참으로 신비로웠을 것이며, 신성을 뿜어내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엘리야와 모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장면은 그가 바로 구원자요, 메시야라는 것을 톡톡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황홀했는지 베드로는 예수님, 여기가 바로 하늘나라입니다. 이곳에 초막을 당장 짓겠습니다. 여기서 사십시다. 당신이랑, 엘리야랑 모세랑 이곳에서 이 경이로움 속에서 영원히 살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곧 음성이 들려옵니다. “~ 그게 아니다. 너희들이 보는 지금의 모습이 예수의 모습의 전부가 아니다. 그는 나 하나님이 택한 자이니, 그의 말을 듣고 그를 따라 가거라.”

 

아시다시피 하얗게 빛났던 예수는 다시 우리와 같은 육신의 모습을 하고, 어디로 가지요? , 산 밑으로 내려가 귀신들린 소년을 만나러 갑니다.

 

예수는 하나님과의 일치 속에서, 자기를 비우고 부정하면서 하나님의 뜻과 사랑을 투명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습니다. 인간의 실존적 조건들을 담지하면서도 자기를 망설임 없이 부정하는 일은 민중들과 함께했던 삶에서 드러나며, 그것의 정수는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거룩함을 흠모하며, 신을 지향하는 우리지만, 우리는 늘 실패합니다. 신비로운 체험을 한 분들도 계실 것이고, 깊은 영성을 가진 교우들도 있겠지만, 우리는 자기부정과 자기비움 앞에 매일 망설입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신의 궁극적 계시자인 신비로운 예수가 오셨습니다. 자기비움의 완성인 십자가의 예수가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아름답게 오셨지만, 고통스럽고, 고통이 있기에 예수는 언제나 아름다운 존재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네의 삶 속에서도 신비로워 아름답고, 자기를 철저히 비워내어 고통스러운 존재들을 발견합니다. 성스러움을 궁극적으로 계시하고 있는 사람들, 즉 또 다른 예수를 우리의 삶 속에서 만나기도 합니다. 청년이었던 예수는 까만 머리였을테지요. 신의 기운을 담뿍 담은 그인지라 하얗게 빛이 났던 것일까요

 

37년 전 그의 머리칼도 참 까맣더군요.

사진1.png

 

그런 그가 37년간의 싸움 끝에 복직이 되었습니다. 어느새 하얗게 변해버린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신비롭고 아름다운 변화산의 예수를 발견합니다.

사진2.png

 

 

그리고 37년간의 한을 품고, 네 명의 열사들을 기리며 울던 그의 모습 속에서, 자기비움으로 십자가를 지셨던 예수를 발견합니다. 저의 벅찬 가슴만으로는 그의 복직의 의미를 다 살릴 수 없어, 그의 복직 발언 중 일부를 읽어봅니다

 

검은 보자기 덮인 채 어딘지도 모른 채로 끌려간 날로부터 37.
어용노조 간부들과 관리자들 수십 수백 명에게 아침마다 만신창이가 된 채

공장 앞 도로를 질질 끌려다니던, 살 떨리던 날들로부터 37년입니다.
경찰들이 집을 봉쇄하고, 영도로 돌아오는 시내버스를 불심검문하고,

공장 앞에 나타나기만 하면 닭장차에 군홧발로 짓이겨 넣던

그 억장 무너지는 날로부터 37년입니다.

 

한진중공업 새로운 경영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단 한 명도 자르지 마십시오.
어느 누구도 울게 하지 마십시오.
하청 노동자들 차별하지 마시고 다치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래야 이 복직은 의미가 있습니다.

신념이 투철해서가 아니라 굴종할 수 없어 끝내 버텼던 한 인간이 있었음을.
이념이 굳세서가 아니라 함께 일하고, 같은 꿈을 꾸었던 동지들의 상여를 메고 영도 바다가 넘실거리도록 울었던 그 눈물들을 배반할 수 없었던

한 인간이 있었음을 기억해 주십시오.

 

정치하시는 분들께 말씀드립니다.
중대재해처벌법은 하루 6명의 노동자를 죽인 기업의 목소리가 아니라

유족들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어제 동료가 죽은 현장에 오늘 일하러 들어가는 노동자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차별하는 사람들의 말이 아니라 성소수자, 이주노동자, 장애인, 여성들

그들이 목숨 걸고 하는 말을 들어야 차별이 없어집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던 세월, 37년의 싸움을 오늘 저는 마칩니다.
먼 길 포기하지 않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긴 세월 쓰러지지 않게 버텨 주셔서 고맙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정리해고의 위기 앞에 선 태영버스 동지 여러분들 힘내십시오.

웃으면서 끝까지 함께 투쟁!

 

김진숙 지도위원을 보며, 하나님의 사랑을 인류에게 남김없이 보여주고,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발견합니다. 기독교의 신비주의는 열광적이거나 사변적인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결국 자기비움을 통하여 하나님과 합일을 이루는 것에 있음을 깨닫는 순간입니다. 합리적 이성주의로는 하얗게 변한 예수의 신비를 경험할 수 없고, 물량주의적이고 소유지향적인 사고 속에서는 십자가의 예수를 고백할 수 없습니다.

 

오늘의 서신서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어버리고, 주님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영이신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이 말씀을 오늘 전개한 내용에 기대어 이렇게 다시 써보았습니다.

 

여러분을 가리고 있는 합리적 이성주의와 소유지향적 삶을 벗어버리십시오. 그럼으로써 우리는 주님의 계시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신비 속에 머물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처럼 하나님과 합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는 성령께서 이루어 가실 일입니다.”

 

 

성경 말씀, 즉 텍스트는 나의 사건, 나와의 연관성을 지닐 때만 현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텍스트는 나에 의해서 이해될 때에만 현존할 수 있고, 의미를 갖게 됩니다. 오늘의 변화산의 신비주의적 사건이 여러분들의 삶 속에서 연관지어지고, 여러분들 자신에 의해서 이해될 수 있는 계기가 됐기를 바라봅니다.

 

그러나 혹, 신을 이렇게 고백하는 분들도 계실 듯합니다. ‘이 폭력적이고 죽음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 어떤 것도 응답하지 않고 역사 속에서도 침묵하는 당신이 정말 신이란 말이냐. 신비는커녕 계시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다. 당신은 무능한 신이다!’ 저 역시 이런 고민에 휩싸일 때가 많음을 고백합니다. 역사 속에서도 사람 속에서도 신의 신비를 체험할 수 없을 때를 대비해 소설가 박완서의 글을 빌려와 보았습니다.

 

스물여섯 밖에 되지 않은 아들이 돌연 사고로 죽은 뒤에 쓴 그의 글이자 신에 대한 외침입니다.

 

그저 만만한  ()이었다온종일 신을 죽였다
죽이고  죽이고 일백번 고쳐죽여도 죽일 여지가 남아 있는 


통곡이 치받쳤다며칠 동안 주리 참듯 참던 울음이었다도무지 어떻게  수가 없었다짐승 같은 울음소리를 참으려니 온몸이 격렬하게 요동을 쳤다구원의 가망이 없는 극형이었다.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누구라도 이런 끔찍한 극형에 당해서는  영문을 물을 권리가 있다
당신의 존재의 가장 참을  없음은  대답 없음이다 번도 목소리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도 인간으로 하여금 당신을 있는 것처럼 느끼고부르고매달리게 하는  이상하고 음흉한 힘이다

 

 아들아 세상에 네가 없다니 그게 정말이냐 
창창한 나이에 죽임을 당하는  가장 잔인한 최악의 벌이거늘  애가 무슨 죄가 있다고 그런 벌을 받는단 말인가

하느님이란 그럴 수도 있는 분인가사랑  자체라는 하느님이 그것밖에 안되는 분이라니차라리 없는  낫다아니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일 년 내가 그렇게 고통하고 신음할 수없이 되 물었던 질문
하느님 말씀만 하시옵소서

그러나하느님은 일년이 지난 지금까지  질문에 대한 답변이 없으시다


그러나 고통의 순간을 지나올 내가 그렇게도 원망할 하느님이 계셨다는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나의 원망을 받아줄 하느님이  계셨다면오늘의 나는 존재할  없을 것이다
고통의 순간에 수많은 원망 섞인 질문을 던질  많은 원망을 고스란히 들어주셨던 하느님 그분의 침묵은  많은 원망을 듣고자 하셨던 하느님의 배려였던 것이다

 

한 말씀만 하시옵소서

 

자신의 아들이 죽었는데도 신은 어떤 응답도 없습니다. 박완서는 그런 신을 죽이고 또 죽이며 원망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원망의 복판에서 종교의 아이러니가, 신앙의 신비가 발생합니다. 백번도 넘게 신을 죽이다보니, 한도 끝도 없이 원망을 하다보니, 결국 그 끝자락에 가서는 죽인다고 해도 떠나지 않고, 암만 원망을 해도 그것을 고스란히 들어주고 있는 인내와 배려의 신이 계시되고 있습니다.

 

사순절 기간, 여러분이 처한 각자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신비를 체험하기 바랍니다. 하얗게 빛을 내던 예수가, 그리고 십자가에 기꺼이 달렸던 예수가 하나님의 신비를 품고 여러분의 가슴 속에 찾아가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파송사>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다시 하나님으로 돌아갈 수 있는 오직 한 길, 자기비움.

주여, 우리 삶에 신비로 오시옵소서,

자기비움으로 응답하겠나이다.

하얗게 빛을 내던 예수님을 간직하며,

이제 우리가 산 밑으로 내려가 주님의 빛을 뿜어냅니다.

 

 

<이제 함께 서로를 축복합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시는 친교가

우리 가운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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