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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세례, 하늘의 열림 | 김희헌 | 2022-01-09

by 김희헌 posted Jan 09, 2022 Views 166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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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2-01-09

세례, 하늘의 열림 (43:1~7, 8:14~17, 3:15~17, 21~22)

2022.01.09. 주현절 1.

 

주현절의 시작입니다. 주현절은 성탄절에서 사순절 사이의 기간으로서, ‘주현(主顯)’ , ‘주님의 나타나심을 기념하고, 그 가르침을 묵상하는 기간입니다. 개신교회는 서방 가톨릭교회와 함께 성탄절을 보내고, 동방 정교회의 전통과 함께 주현절을 보냅니다. 이 전통이 말해 주듯이, 기독교는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두 가지 방식으로 이해했습니다. 서방교회는 주님이 나타나신 징표를 동방박사가 별을 보고 찾아온 사건에서 찾았고, 동방교회는 예수께서 세례를 받고 하늘의 음성을 듣는 것에 그 의미를 두었습니다. 서방교회가 다분히 전설적이라면, 동방교회는 신학적이라고 하겠습니다. 또한, 서방교회가 예수의 존재에 관심한다면, 동방교회는 예수가 맞은 사건에 주목한다고 하겠습니다.

 

[예수의 세례 / 누가복음 315~17, 21~22]

주현절을 시작하는 복음서의 본문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고 하늘이 열리는 사건입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고 기도하시는데,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예수 위에 내려오셨다.”라고 본문은 표현합니다. 이 묘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유한 가치를 부각하면서, 그가 본격적으로 열어가는 하나님 나라 운동의 시작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내리는 일은 예수에게만 일어나는 특별한 사건은 아니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은 제자들과 각 지역의 수많은 사람에게 계속해서 부어졌고,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본문이 언급한 하늘의 소리, ‘너는 내 사랑하는 자녀요, 나는 너를 좋아한다.’라는 음성은 울립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가르침은 단지 예수의 우월성을 강조하려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세례 요한의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자신은 예수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라고 말한 것을 요한은 예수보다 못한 사람이다라고 본다면, 피상적인 생각이라고 하겠습니다. 그것보다는, 새로운 삶의 출발을 세례사건에서 찾은 성서의 가르침에 대해서 생각을 모아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먼저 주목할 점은, 이 사건을 먼저 기록한 마가복음의 설명과는 달리, 누가복음은 예수에게 세례를 베푼 사람을 요한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오늘 누가복음 본문의 틈 사이(18~20)에는 세례 요한의 투옥사건이 있습니다. 요한은 헤롯왕을 비판하여 옥에 갇혔습니다. 그때 모든 사람’(ἅπαντα τν λαν, all the people)이 세례를 받고, 예수도 세례를 받습니다. 오늘 본문은 주목하는 것은, 세례가 모두에게 주어졌고, 모두가 열린 하늘을 보았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세례를 받는 데에는 신분의 특권이 필요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게 되는 것도 무슨 종교적 자격이 요구되는 것도 아닌 듯합니다. 본문이 강조하는 점은 거룩한 영에 힘입어 하나님의 자녀로 일컬어지는 삶입니다. 물론 그런 삶은 그냥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오늘 본문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예수께서 거친 광야의 시험과 같은 시련을 거쳐야 할 것입니다. 어떤 이는 그 시험을 단박에 통과하지만, 대부분은 그 시험을 계속 치르며 살아갑니다.

오늘날 교회는 예식을 통해서 이 세례 사건을 재연합니다. 세례를 받는 사람은 사전에 교육을 받고 그 의미를 배웁니다. 우리 교회는 세례교육에서 기장의 <신앙 문답서>를 사용합니다. 개혁교회의 신학 전통에서 간추려진 99개 질문이 담겨 있습니다. 그 가운데, 세례와 관련된 질문은 두 가지입니다.

52 : 세례란 무엇입니까?

: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회개하는 사람에게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물로써 베푸는 예전이며, 죄 사함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는 것입니다.

53 : 세례를 왜 받습니까?

: 세례를 받는 것은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교회의 일원이 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삶을 시작하기 위함입니다.

이 문답은 신학적 언어로 표현되었지만, 거기에 담긴 본래의 경험은 생동하는 사건입니다. 고통의 시대를 견뎌내려는 생명의 모험, 하늘이 열리고 거룩한 영이 임하는 놀라운 체험, 하나님의 자녀로서 충만한 삶을 살아가려는 믿음의 꿈이 거기 담겨있습니다. 교회는 거기에서 이 역사에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은 삶의 기준 변화를 의미합니다. 세상의 근심과 염려 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근심하는 것들의 내용과 성격이 바뀌는 것입니다.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지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 이사야서 431~7]

2 이사야 예언자가 포로 생활의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에게 들려준 소리는 두려워하지 말라입니다. 1절에서 한 번, 5절에서 다시 한번, ‘두려워하지 말라는 소리가 반복됩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 (1)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5)

험난한 노예살이를 하는 사람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전하는 예언자의 모습은 어쩌면 한가해 보입니다. 죽음에 내몰린 포로 생활 자체가 하나님이 없는 현실의 증거가 아니냐?’고 묻는 것이 나을 것만 같습니다. 포로들에게 두려움은 일상이요, 그것은 자신을 지키는 본능과 같은 것이어서, 만일 그것을 거둔다면 삶이 도리어 위기에 빠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서는 두려움을 떨쳐내고, 어떤 형편에 있든지 존재의 뿌리를 하나님에게 두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무리한 종교적 요구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지닌 본질적인 갈망과 가능성에 대한 뜨거운 호소입니다.

진화심리학에서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자신을 지키려는 인간의 보존본능과 관련되어 있다고 봅니다. 만일 인간에게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없었다면, 아마 생존해오지 못했을 것으로 봅니다. 인간은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에 위협적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고, 위험에 빠지게 만든 요소가 무엇이었는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우리가 생존에 적합한 길을 찾도록 만듭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 두려움이라는 감정 자체를 발전시켰습니다. 두려움의 감정을 세분화하여, 극복해야 할 것과 간직해야 할 것을 구별하게 된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두려움이라는 감정에 담긴 두 개의 얼굴을 분리해낸 것입니다. 하나는 공포로 얼룩진 두려움이요, 다른 하나는 경외감으로 구성된 두려움입니다.

공포심이 힘에 굴복하는 감정이라면, 경외감은 뜻에 순복하는 감정입니다. 인간은 이 경외감을 발전시키면서 자신을 지키려는 목표보다 더 큰 가치를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정신활동을 대표하는 윤리와 문화와 종교 영역에서, 공포감을 주입하여 복종시키는 방식보다는 경외감을 불러일으켜 동경하게 하는 방식을 더 고상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신은 공포의 원인이 되기도 하며, 사랑의 토대가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인간을 공포에 떨게 하는 신은 점차 극복되어왔습니다. 성서의 신앙인들 역시 공포를 주입하는 신의 모습을 벗어나면서, 가장 깊은 사랑 속에서 신을 만나는 방식으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세상의 두려움을 이겨내는 것은 같은 말이 되었습니다.

두려워 말라!’ 이 말과 함께 전해진 소식은 너는 나의 것이다라는 하나님의 목소리입니다. 이것은 죽임의 질서에 속박된 사람들을 풀어내려는 신의 사랑 고백이요, 두려움으로 얼룩진 세계에서 정의를 되찾으려는 종교의 선언이기도 합니다.

 

[사마리아에서 생긴 회복의 사건 / 사도행전 814~17]

사도행전 8장 본문은 사마리아 지역에서 있었던 사건을 다룹니다. 16절을 보면,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지만, 아직 성령은 내리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예루살렘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와서 그들에게 손을 얹자 모두 성령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복음이 예루살렘과 유대 지역을 넘어서 외부로 퍼져가는 과정을 배경으로 합니다. 그 첫 지역이 사마리아였다는 것에 의미가 있습니다. 사마리아는 예루살렘과 오랜 숙적관계였습니다.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순례할 때 길이 멀어져도 사마리아를 피해 돌아가곤 했습니다. 사마리아도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 공동체가 스데반의 죽음으로 한계를 맞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흩어졌고, 스데반과 함께 집사로 뽑힌 빌립은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이때, 사마리아 역시 고충이 많은 도시였습니다. 그것을 대변하는 사람이 시몬이라는 마술사입니다. 그는 마술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스스로 큰 인물인 체하는사람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시몬을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한 위대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9~10) 그는 마술로써 사람들을 자기 뜻대로 부렸는데, 사람들은 그를 유능하고 유익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먹고 먹히는 세계에서 통용되는 능력 평가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사마리아는 하나님을 모르고 진리도 없는 곳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예루살렘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루살렘 성전은 합법적인 약탈 장소와도 같았습니다. 그런 예루살렘에 성령이 부어진 복음 공동체가 세워졌듯이, 사마리아에도 성령이 부어집니다. 그렇게 성령이 임하자,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의 배타적인 대결은 사라지고, 마술로 인간을 현혹하던 세계가 변화됩니다. 제자들에게 주어진 예수의 당부가 열매를 맺은 사건입니다.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이 내비치는 순간입니다.

우리는 오늘 세 개의 성서 본문에서 주현절의 믿음을 찾아보았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모습이 역사에 드러난 세 장면이라 하겠는데, 그것 외에도 그리스도는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생명이 정의와 평화로 피어나는 곳에서 그리스도는 나타납니다.

올해 우리 교회는 힘겨운 광야생활 속에서 유/무형의 교회를 지어낼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겨울 추위로 언 땅이 풀리면 예배당 신축작업이 시작될 것입니다. 건물 골조를 세우며 교육과 선교의 비전도 구체화하고, ‘생태적 전환한반도 평화라는 목표를 두고 선택과 집중의 사회선교 정책을 재정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온라인콘텐츠를 만드는 기획그룹을 구성하고, 진보적 신앙의 샘이 될 <안병무도서관> 개관을 준비하면서, 창립 70주년에 합당한 사업을 마련해가야 합니다. 분주한 해가 될 것 같습니다.

이 모든 일을 위해서는 주현절의 가르침을 잃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삶과 신앙에 그리스도를 담아내는 것입니다. 먼저 신앙생활을 재정비해야 하겠습니다. 회의도 중요하지만, 기도와 묵상의 자리가 더 확대돼야 합니다. 교회 갈등의 여파로 약해진 공동체를 회복하는 일에 힘을 모아야 하겠습니다. 믿음의 연대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신을 비우고 서로 낮아져야 합니다. 이성의 주장보다 믿음의 마음으로 대할 때,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고 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행위로써 무언가를 쌓기에 앞서, 존재로서 하늘을 여는 순명(順命)의 삶이 우리 공동체에 되살아오기를 기원합니다. 교우들의 삶에 하늘이 열리고, 주님의 얼굴 비치기를 빕니다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메마른 삶에 하늘이 열리고 주의 음성이 들립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자녀요, 나는 너를 좋아한다.’ 광야와 같은 삶에서도 주의 뜻을 좇는 행진을 포기하지 않고, 평화의 일꾼 되어 올 한해를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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