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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과 종교 | 김희헌 | 2021-12-12

by 김희헌 posted Dec 12, 2021 Views 112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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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1-12-12

인권과 종교 (3:14-20, 4:4-7, 3:7-18)

2021.12.12. 대림절 셋째 주일, 인권주일

 

[인권에 관하여]

오늘은 대림절 셋째 주일이자 인권주일입니다. 인권주일은 1948년에 제정된 <세계인권선언>의 정신을 따라, 교회가 인권의 의미를 되새기며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세계인권선언>은 인류가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참혹하고 끔찍한 경험을 반성하면서, 모두가 함께 지켜야 할 윤리적 기준점을 세우려고 만든 헌장입니다. <선언>은 침해받아서는 안 되는 인간의 권리와 자유를 30개 조항에 담았는데, 1조는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존엄과 권리에 있어 동등하다.”

인류는 이 선언에 담긴 인간의 존엄과 평등이라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 왔고, 지금도 애쓰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사상과 양심, 종교의 자유와 같은 기본적인 자유권을 확보했고, 그다음에는 인간다운 삶을 지킬 수 있는 의식주와 의료, 노동과 교육에 관한 사회적 권리를 확보했습니다. 그리고 더욱 보편적인 인도주의를 옹호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강자와 남성 중심의 역사를 되돌아보며, 인권의 주체로서 여성과 아동, 이주민과 소수자 등이 차례로 등장했습니다. 또한, 자국의 국민만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인권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세계주의정신이 확대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인간의 권리만이 아니라 동물과 자연의 존엄성을 지키는 생태주의가 강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중입니다. 크게 보면, 인류의 역사는 인권 확장의 역사라고도 할만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모두가 평등하게 인권을 누리지 못합니다. 역사와 문화의 조건에 따라 인권에 대한 이해가 다를 뿐만 아니라, 한 나라 안에서도 인권에 관한 의식이 같진 않습니다. 그런 틈바구니에서, ‘인권이라는 명목으로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려는 이기적 흐름 또한 존재합니다. 배타적인 종교는 교리를 핑계 삼아 인간의 평등권을 무시하고, 제국주의 국가는 지배욕에 사로잡혀 인권을 도구화하는 국제정치를 펼칩니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하는 한국의 보수개신교와 그들이 좋아하는 미국이 인권을 도구로 삼아 마치 세계경찰인 양 구는 모습은 닮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캐나다의 한 정치인(Michael Ignatieff)은 인권을 우상화하는 것을 비판(Human Rights as Idolatry)합니다. 인권을 구실로 삼아 실제로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려는 유혹에 대한 경고입니다. (리차드 에임즈베리, [신앙과 인권], 15)

인류는 분명히 양심과 이성을 바탕으로 인권을 옹호하는 제도를 넓혀왔습니다. 하지만, 이기심을 조율하고 이타심을 발휘하는 일에서 늘 성공해 온 것은 아닙니다. 현실에서는 때때로, 피로 일구어낸 민주주의 터전에서 야만의 광기가 춤을 추곤 합니다. 우리 사회는 지금 촛불 혁명의 거대한 파고를 거쳤음에도, ‘윤석열 현상이라는 적반하장의 현실을 지나고 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자유주의만으로는 자유를 지키기 어렵다는 진실을 실감하는 중입니다.

종교는 어떻습니까?

인권, 인간의 권리에 대해서 기독교 신학은 이중적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인간 이해 자체가 양면적이기 때문입니다. 한편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폭력으로 타락한 죄인으로 이해됩니다. 따라서, 인간이 누려야 할 권리는 한편으로 신성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부인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양면적인 성격은 기독교가 인권문제에 대하여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또한 그런 복합적인 모습이 인권문제를 더욱 진지하게 대하도록 하는 종교적 성격을 부여하기도 했습니다. 종교는 인권이 단지 법률과 제도로써 보장받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거기에 담긴 생명적 의미를 더 깊이 성찰하고 갱신해가는 속성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율법의 조문 자체보다 그 정신에 주목하고자 했던 것도 같은 이유일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완성하려고 하면서도, 동시에 허울뿐인 율법을 비판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기독교는 인권문제에서 협력과 긴장이라는 복합적 태도를 띠곤 합니다. 일차적으로, 자유와 평등을 증진하기 위해 제도와 법적 공간을 넓히는 일에서는 협력적입니다. 인권이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시민이 누릴 수 있도록, 자국의 국민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적용될 수 있도록, 인간만이 아니라 자연생물과 무생물에까지 확대되도록 공간을 넓히기 위해 협력합니다. 그래서 현재의 법적 한계 너머의 정의를 추구하는 급진적 흐름과도 함께합니다. 이것은 사회적 정의를 추구하는 종교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종교는 원칙과 이념에 일방적으로 자신을 맡기기보다는 때로는 긴장 관계를 이루면서, 실제적인 삶의 공백을 메우는 실존적 현명함을 요구합니다. 특별히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삶에서 중요한 것은, 권리 주장의 원칙보다는 현명한 봉사와 헌신의 징검다리들입니다. 우리는 공동체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과정에서, 자유와 평등에 기민한 사람들이 실제로는 이기적인 소비자가 되는 현실을 절절히 경험하곤 합니다. 그래서 한 철학자는, 자유의 주장이 무응답의 이기심이 되지 않도록, 평등에 관한 강조가 자기주장의 이기심이 되지 않도록 깨어있으라고 말합니다. (김영민, [동무론], 248-49) 종교가 유념해야 할 말입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종교지도자로서 노벨평화상을 받은 데스몬드 투투 주교의 고백은 큰 교훈이 됩니다. 그는 요하네스버그에 있는 성공회 성당을 발판으로 인종차별에 저항하며, 억압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차별 철폐 투쟁에 헌신했습니다. 그에게 기독교 종교는 양면적인 얼굴을 가졌습니다. 영국에서 유학하는 동안, 그는 기독교 문명에 기초한 서구사회의 자유를 실감했습니다. 하지만, 자기 나라로 돌아온 후에, 기독교가 흑백갈등과 백인들의 억압정책을 가리는 가면처럼 기능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비판합니다.

백인들은 우리에게 와서 성서를 주고 기도하라고 했죠. 그래서 우리 아프리카인들은 성서를 받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드니, 백인들은 아프리카를 차지했더군요. 하나님과 예수님이 분노할 짓을 하고, 그걸 성서로 덮어버렸죠.”

하지만, 투투 주교는 냉소에 멈추지 않고, 예수의 길을 걷습니다. 훗날 남아공교회협의회책임자로서 정부에서 파견된 <감사위원회>에서 조사를 받을 때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부여한 소임을 정부는 막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좋아해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처럼, 나는 가만히 있으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이 내 가슴속에서 불길처럼 타오르기 때문에,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백인들이 나에게 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일은 나를 죽이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나에게는 죽음도 최후의 것은 아닙니다.”

이런 대범한 성품은 종교인 모두에게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욱 겸손하게 자신을 돌아보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가정과 교회를 비롯하여 이곳저곳에서 크고 작은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갑니다. 그 모든 관계에서 자유와 책임의 문제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생명의 길은 항상 자기를 넘어서는 지점에서 열린다는 것을 배웁니다. 그것이 우리가 성서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이유입니다.

 

[회복의 날을 향한 약속 / 스바냐서 314~20]

오늘 제1성서의 주인공 스바냐는 유대 왕조의 마지막 가능성으로 알려진 요시야 왕의 개혁 시기에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그는 모두 9개의 신탁을 전하는데, 그중 8개는 혹독한 심판에 관한 내용입니다. (1:2-3:8) 마지막 한 개가 구원과 회복에 관한 신탁인데, 오늘 본문이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야훼의 날, 회복의 날에 관한 예언입니다. 예언자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날이 오면, 내가 너에게서 두려움과 슬픔을 없애고, 흩어져 사는 모든 땅에서 부끄러움을 겪던 너희를 고향으로 인도하겠다.’

이 신탁의 배경은 요시아왕이 집권하던 시기가 아니라, 수십 년이 지난 후인 포로기 시대라고 추정합니다. 훗날 덧붙여진 내용이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 회복의 날을 기다리는 사람은 포로들이라 하겠습니다. 그들은 인권을 말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인 사람들입니다. 고향 땅을 잃고 사로잡혀 끌려와서 억눌림을 당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회복에 관한 하늘의 약속을 꿈꿉니다. 기본적인 인권도 없는 때 인간이 구상할 수 있는 가장 원대한 꿈을 꾸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말합니다. ‘주 너의 하나님이 구원을 베푸시고, 사랑으로 새롭게 해주실 것이다고 약속합니다. 이 약속은 시련을 겪는 사람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을 것입니다. 이 약속을 가진 사람은 두려움과 슬픔과 모욕을 경험했지만, 세상이 어둡다 해도 삿된 흐름에 자신을 맡기지 않고, 죽음의 시대에도 평화의 씨앗을 뿌리며 살아가게 됩니다. 12절을 보면, 그들이 바로 미래를 위해 남겨진 씨앗, ‘주의 이름을 의지하는 온유와 겸손의 사람들입니다.

만일 그들이 없다면 성서의 약속도 헛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바로 이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야훼의 날은 단지 심판과 보복의 날이 아니라, 회복과 구원의 날로 변합니다. 죽음의 시간을 견뎌낸 이 남은 자들이 평화의 그루터기가 될 것이라는 믿음이 스바냐의 예언에 흐르고 있습니다.

반대로 최근 우리 사회는 믿음을 잃고 지쳐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듭니다. 촛불의 염원과 남북의 평화를 이룰 소중한 기회를 모두 잃고, 초조해진 마음으로 갈등의 진영논리에 갇힌 듯한 모습입니다. 하지만, 역사는 양면적이지요. 과거가 남긴 질곡 속에서 고통당하지만, 또한 평화를 향한 모험은 항상 새롭게 벌어집니다. 온 세계가 갈등을 반복하며 쇠약해져 가는 듯이 보일지라도, 또한 평화롭고 생태적인 미래를 위한 상상력은 어딘가에서 자라납니다. 그것이 스바냐의 꿈이자 우리의 꿈입니다.

 

[삶을 지키는 종교 / 누가복음 37-18]

복음서에서 요한은 세례를 받으러 오는 모든 사람에게 통렬한 목소리로 외칩니다. 같은 이야기를 다룬 마태가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말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향해 한 것과는 달리, 오늘 본문에서 누가는 세례를 받으러 온 모든 무리(ὄχλος), 바로 그 오클로스를 향해서도 퍼붓습니다. 요지는,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면제받았다고 생각하지 말고, 일상에서 평화로운 삶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옷과 음식을 나누는 것이요, 욕심부리며 남의 것을 빼앗지 않는 것, 거짓 고소를 하지 않는 것, 그리고 자신이 가진 것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평범한 요구입니다. 하지만 그 가르침에 힘이 있고 빛이 났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요한을 두고, ‘그가 그리스도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요한은 자신을 낮추며 자기 다음에 오실 분을 높입니다. 자신은 물로 세례를 줄 뿐, 오실 분은 거룩한 영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자기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에는 겸손보다 깊은 의미가 담긴 듯합니다. 그것은 대림의 믿음입니다. 새 시대를 향한 간절한 그리움입니다.

본문은 요한이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권면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는 말로 마칩니다. 요한이 권면한 많은 것들, 그가 전했던 기쁜 소식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회개의 열매를 맺는 것, 다시 말하여 믿음으로 삶을 지키자는 것입니다. 요한 자신도 삶을 지켰습니다. 이어지는 이야기를 보면, 요한은 식민지 시대의 지도자로서 진실을 말하며 투옥됩니다. 하지만, 그의 믿음대로, 자신의 뒤를 이어 예수가 세례를 받고 하늘의 소리를 엽니다.

 

[율법 너머의 평화를 향하여 / 4:4-7]

빌립보서는 바울이 보낸 우정의 편지입니다. 이 편지를 받은 교회는 바울이 유럽에 세운 최초의 신앙공동체입니다. (16:12) 바울은 그들을 격려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다시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십시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그리하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주실 것입니다.”

이 모든 권면은 자기 만족적인 심리치료가 아니라, 믿음으로 보는 세계를 향한 것들입니다. 삶에서 믿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신학적으로 가장 명료하게 깨달은 사람이 바울입니다. 그는 촘촘하게 구성된 이 세계의 질서와 율법만으로는 생명력 있는 삶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의 깨달음은 이 세상이 움직이는 구조에 관한 깊은 성찰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도 이 세상의 문법을 가르치는 율법학자들을 가리켜 위선자요 눈먼 인도자라고 비판했듯이, 바울은 합법적인 질서를 통하여 도리어 죄악이 만들어지는 세속의 역설적 구조를 꿰뚫어 보았습니다. 그는 인간의 죄가 율법을 지키지 않아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잘 지켰을 때 도리어 죄악에 사로잡히는 현실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인류의 죄악은 율법을 지키지 않은 행위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율법을 따라 행동할 경우에 생겨난다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서, 율법이 아니라 믿음을 따라 살고자 하는 그의 각성이 일어납니다. 바울에게 믿음은 거룩한 영이 우리 마음에 지어주신 새로운 정신입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믿음을 사회적 언어로 바꾸면, 모든 증오와 대립 정신을 뛰어넘는 진취적인 마음이요, 역사의식이자 공동체 정신입니다. 다가오는 세계의 평화를 미리 맛본 깨어난 정신의 품격입니다.

대림절 셋째 주일에 우리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듣습니다. 기뻐하십시오. 염려하지 마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그리하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넘은 하나님의 평화가 지켜줄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화는 참혹한 세계를 어루만져주는 자비로운 숨결입니다. 하나님의 평화는 억압과 교만을 녹여내는 급진적인 분노요, 우리의 한계와 굴곡을 치유하는 깨어난 사랑입니다. 대림절의 기쁨은 이 하나님의 평화에서 비롯될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에는 온라인 회의가 있었습니다. 한국교회협의회(NCCK)와 미국교회협의회(NCCUSA)가 작년에 결정한 대로, 분기에 한 번씩 모여서 한반도 평화통일에 관해 대화하는 워킹그룹 모임이었습니다. 이번 모임에서는 메노나이트 교회의 평화 전통에 관해 듣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메노나이트는 퀘이커 공동체처럼, 평신도 리더십을 중시하고, 비폭력 평화주의를 철저히 옹호하는 교회입니다. 그분들은 교회가 평화를 위해서 일하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믿음에 투철합니다.

저는 그들이 펼쳐 온 분쟁 조정과 구제 활동을 듣고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정의를 이루는 일에는 반드시 헌신이 필요하다는 사실, 인권을 지키는 일에는 회복과 용서의 감각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깊이 느꼈습니다.

대림절이 깊어갑니다.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평화가 임하기를 빕니다. 이 믿음의 계절에, 우리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하기를 빕니다.

잠시 침묵합시다.

 

[파송사] 하나님의 자비로운 숨결에 마음을 여십시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으로 살아갑시다. 관용의 힘을 길러냅시다. 두려움을 떨쳐냅시다.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룁시다. 그리하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 모두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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