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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의심하는 믿음 | 박재형 | 2019-04-28

by 이성환 posted May 01, 2019 Views 226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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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9-04-28

의심하는 믿음 (행 5:27-32, 계 1:4-8, 요 20:19-31)

2019.04.28. 부활절 둘째 주일

 

박재형 목사(들꽃향린교회)

 

 

오늘은 부활절 둘째 주일입니다. 풀어서 말하면,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일주일이 지났다는 것이죠. 한번 더 풀어서 말하면,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2000번 가까운 부활절을 지낸 후,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우리는 지금 무수히 많은 부활절을 지나 2019년 부활절을 보내고 일주일 뒤에 다시 이곳에 모였습니다.

 

시간이란 건 참 신기합니다. 시간을 특별한 절기나 기념일로 구분하면, 매년 마다 그 시간은 반복되는 것 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시간은 한편으로 결코 반복될 수 없는 늘 새로움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매년 반복되는 날들 가운데 우리는 매시간마다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매년 같은 날을 맞이 하지만, 매번 다른 상황, 다른 생각, 다른 마음자세로 그 날을 살아갑니다.

 

지난 부활 주일은 저에게 매년 반복되는 부활 주일 중 하나 였지만, 그 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부활절이었습니다. 저는 올해 2월부터 담임목사직을 위임받아 들꽃향린교회에서 함께하고 있습니다. 네, 저는 새내기 담임목사입니다. 목사가 된 후, 처음 담임목사직이라는 것을 맡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지난 주, 생전 처음 부활절 말씀나누기와 성찬을 진행했습니다. 다행히(?) 세례신청자가 없어서 세례집례는 안하고 잘 넘어갔습니다. 오늘도 매년 반복되는 부활절 둘째 주일을 맞아, 저는 생전 처음 이곳 향린교회에서 하늘 뜻 펴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매년 반복되는 절기를 통해 그리스도교 신앙의 맥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매년 반복되는 그 날들 가운데 특별한 의미를 찾고 깨닫기 위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고 말씀과 서로의 삶을 나눕니다.

 

오늘은 부활절 둘째 주일입니다. 수 많은 부활절이 지난 후, 그 둘째 주일을 맞아 우리는 이곳에 함께 모여 있습니다.

 

어제는 역사적으로 또 다른 의미있는 날을 맞이하여 수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그 날은 수 없이 반복되었던 부활절과는 달리 불과 1년 전에 있었던 역사적 사건을 기억하는 날이었습니다. 2018년 4월 27일 분단 이 후, 처음으로 남과 북의 정상들이 판문점에서 모여 정상회담을 하고 4.27 판문점 선언을 발표한 날입니다. 지난 이명박근혜 정부 기간 동안 꽉 막혔던 남과 북의 대화가 재개되는 역사적인 날이기도 했습니다. 그 이 후, 남과 북의 정상은 평양에서 다시 정상회담을 가졌고, 이를 시작으로 역사적인 북미 정상 회담까지 개최 되었습니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한반도 평화와 통일이 이루어 질 것만 같았던 꿈같은 시간이 지나고, 지난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된 후, 또 다시 남과 북의 대화와 협력의 길 위에는 짙은 안개가 끼여 한치 앞을 바라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1년 전 역사적이고 감격적인 순간을 기념하는 4월 27일 토요일, 어제 수 많은 사람들은 서로의 손을 잡기 위해 북으로 북으로 올라왔습니다. 그저 서로의 손을 잡기 위해 모였습니다. 여전히 단 한 발짝도 앞으로 더 내디딜 수 없는 그 분단의 장소 앞에서 서로의 손을 잡고 그 분단의 현실을 의심하기 위해 모인 것입니다.

 

물론 같은 날 다른 곳에서는 자신들이 움켜쥔 뒤틀린 욕망과 기득권에 대한 한치의 의심도 없이 그것을 지키기 위해 추한 모습으로 서로 뒤엉켜 바닥에서 뒹굴기 위해 모인 정치인들도 있었습니다.

 

‘의심하는 믿음’. 사실 이 말에는 모순이 있습니다. 아니 모순 그 자체입니다. 결코 서로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가 결합되어 있으니 말입니다. 더군다나 믿음의 반대말인 의심이 오히려 믿음을 수식하고 있으니 말이죠. 하지만 어제 모여 서로의 손을 잡았던 이들은 분단의 현재를 의심했기 때문에 평화와 통일의 미래를 믿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 미래를 염원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서로의 손을 잡고 서로의 마음을 모으면 우리 힘으로 그 평화와 통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사실 믿음은 의심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요한복음 본문에 등장하는 도마, 그는 언제나 의심과 불신앙의 상징으로 묘사되곤 합니다.

“나는 내 눈으로 그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

이 말은 도마가 자신이 함께 없을 때,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에게 찾아왔었다는 소식을 듣고 보인 반응이었습니다.

 

부활한 예수를 맨처음 만난 막달라 마리아에게 예수가 부활했다는 소식을 들은 제자들은 오히려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제자들은 유대인들로부터 자신들이 예수의 시신을 숨겼다고 의심받을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 있었습니다. 그 때 부활한 예수가 나타납니다. 그는 두려워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평화’의 인사를 전합니다. 두려움에 휩싸여 결코 평화롭지 못한 이들에게 평화가 있기를 기원한 것이죠. 그리고는 자신이 부활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여줍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예수를 주님이라 부르며 기뻐합니다.

 

제자들은 예수의 손과 옆구리 상처를 본 뒤, 부활한 예수를 주님이라 부르며 기뻐했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 도마는 없었습니다. 도마는 그저 동료 제자들에게 전해들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도마는 의심할 수 밖에 없었겠죠. 다른 제자들은 모두 직접 눈으로 확인했는데, 본인은 그렇지 못했으니 당연합니다. 그 당시 제자들의 말은 아마 그 누구도 믿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 마저도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믿지 못했으니 말입니다.

 

어쩌면 도마의 의심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그 누구도 부활한 예수를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했으니까요. 딱히 도마만 의심 가득한 인물인 것 처럼 보이진 않습니다. 모두가 같은 상황이었죠. 모두가 의심과 두려움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럴 수 밖에요. 죽은 사람의 시체가 무덤에 없다니, 더군다나 그는 반역죄로 십자가에서 처형된 범죄자인니 말입니다. 그 시체를 빼돌린 사람도 반역죄로 몰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8일이 지나고 예수는 다시 나타납니다. 그리고는 도마에게 자신의 상처를 만지고 손까지 넣어 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더 이상 의심하지 말라고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는 손을 대지 못하게 했지만, 의심했던 도마에게는 만지고 손까지 넣어 보라고 합니다. 물론 “보지도 않고 믿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는 말과 함께 말이죠.

 

우리는 이 이야기의 의도를 31절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요한복음 저자가 도마의 이야기를 빗대어, 이 후에 자신을 통해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전해들을 사람들에게 믿음을 요구하고자 한 것입니다. 예수를 직접 목격하거나 경험하지 못한 이들에게 요구하는 믿음말입니다. 하지만 그 믿음은 의심없는 믿음이 아닙니다. 오히려 의심 뒤에 따르는 믿음입니다. 흔들림 뒤에 굳어지는 확신입니다. 현실에 대한 부정 뒤에 오는 새로움에 대한 신뢰입니다.

 

두려움에 떨던 그들은 어느 덧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에 대한 의심을 갖도록 하고 균열을 일으키도록 자극하는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의심없이 복종하는 믿음을 강조하며 자신들의 종교적 권력을 유지하고자 했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방해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나무에 달려 죽을 수 없다는 믿음. 죽은 자는 결코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믿음. 그리고 그렇게 비참히 죽어 간 한 인간이 결코 하나님이 될 수 없다는 믿음. 그들이 가졌던 종교적 신념을 의심하도록 만드는 예수의 제자들은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기나긴 의심의 터널을 지나왔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그리스도로 믿고 생을 걸고 따랐던 예수가 한낱 개죽음을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 결국 그가 비참하고 무기력하게 죽음으로써, 이 세상에 변혁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는 의심. 꼴찌가 일등되고 일등이 꼴찌되는 세상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의심. 

 

제자들은 그 모든 의심을 뚫고 나와 부활한 그리스도를 통해 도래할 새로운 세계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현재를 의심하게 함으로써, 끊임없이 새로움을 갈망하도록 이끄는 두려움 없는 발걸음이 되었습니다. 그 발걸음은 그 누구도 저지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저지하면 할 수록 더 커져만 가는 거대한 행렬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의심은 믿음으로 싹트고, 그 믿음은 다시금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한 현실에 대한 전복의 의심을 갖도록 만든 역사의 거대한 행진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존재와 그 존재의 목적, 그리고 죽음과 그 죽음의 목적에 대해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흔들리게 하고 의심하게 만들었던 인간이 된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그는 자신의 다시 오심 마저도 우리로 하여금 의심할 수 밖에 없도록 내몰고 있습니다. 이 불의한 세계가 너무도 견고해서 우리는 다시 오실 그 나라를 의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를 짖누르는 현실의 무게가 너무 커 하나님의 미래를 의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시 오심을 기다리던 2000여 년의 시간 동안,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그 다시 오심에 대한 의심에서부터 믿음의 싹을 틔우기 위해 많은 고통과 희생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다시 오심에 대한 의심은 현실의 무게로 부터 시작하지만, 그것은 결국 다시 오심에 대한 믿음으로 극복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땅 위의 왕들이 행사하는 악한 권력의 현실 가운데 의심의균열을 일으키는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억울하게 죽어가는 모든 이들의 죽음이 결코 끝이 아닐 것이라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가득한 이 세계는 영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끊임 없이 인간을 착취하고 소외시키는 신자유주의 자본의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이 아닐 것이라고. 남과 북을 나누고 있는 저 철조망도 그리 단단하지 않을 것이라고. 죽음의 현실에 생명의 의심을, 차별과 혐오의 현실에 평등과 사랑의 의심을, 불의의 현실에 정의의 의심을 그리고 분단의 현실에 평화와 통일의 의심을 심는 예수의 공동체를 일구어 나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을 균열내는 우리의 의심들이 모여 새로운 세계의 미래를 향한 믿음으로 열매 맺을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하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는 의심의 알파요 믿음의 오메가 이십니다.

 

요한계시록 1장 7절입니다.

“보아라,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신다. 눈이 있는 사람은 다 그를 볼 것이요. 그를 찌른 사람들도 볼 것이다. 땅 위의 모든 족속이 그분 때문에 가슴을 칠 것이다.”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멘.

 

말씀을 기억하며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편안히 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진정한 믿음은 현실에 대한 의심으로부터 비롯됩니다.

하나님의 미래는 지금 여기에서 하는 모든 의심들로부터 싹틉니다.

우리는 현실에 안주하며 안전함을 기뻐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우리는 현실을 의심하고 그 의심함으로 하나님의 미래를 믿음의 모험으로 

일구어내는 예수 공동체입니다.

죽음의 현실을 의심하십시오. 불의한 현실을 의심하십시오. 분단된 조국의 현실을 의심하십시오.

그것이 생명과 정의와 평화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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