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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믿음의 꿈 | 김희헌 | 2019-04-07

by 김희헌 posted Apr 07, 2019 Views 215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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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9-04-07

믿음의 꿈 (43:16-21, 3:4-14, 12:1-8)

2019.04.07. 사순절 다섯째 주일

 

[신앙의 미래, 예언과 신비]

우리는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그분의 길을 배우고 걷는 연습을 하는 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길을 따르기가 어렵다고 느낍니다. 그 이유는 그 길이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의 길은 자신을 형제와 이웃에게 내어주며, 군림하기보다는 섬기는 것입니다. 그 길을 걷기가 어려운 이유는 자신을 내어주지 않고, 군림하면서 예수를 따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기 위해서 갖은 애를 쓰듯이, 우리는 자기를 채우면서 예수를 따르는 묘수를 찾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가 보여준 그 단순한 길을 따라 걸었던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습니다. 그 까닭은 그 길을 걷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개인의 삶만이 아니라 집단의 삶도 그렇습니다. 미국 침례교의 목사이자 하버드대학 교수였던 하비 콕스는 종교의 미래라는 책에서 기독교의 역사를 세 시기로 구분합니다.

첫 번째는 예수운동이 시작되어 그 활력이 있던 처음 삼백 년입니다. 이 시기는 신앙’(faith)의 시대입니다. 교리나 성직제도에서 종교의 활력을 구하기보다는 삶에서 예수의 말씀을 구현하고자 한 때입니다. 그것이 성공을 거두자 아이러니하게도 그 운동이 제도와 신학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이 두 번째 시기는 로마제국의 종교가 된 이후부터 20세기 초 제국주의 전쟁을 거친 기간으로서, 기독교는 힘을 숭상하며 몸뚱이는 커졌지만 신앙운동의 활력을 잃은 교리’(belief)의 시대를 보냈습니다. 교리란 생동하는 신앙이 남긴 껍질입니다. 따라서 첫 번째가 기독교 정신이 약동하는 시대였다면, 두 번째는 이전 시기의 활력이 남긴 정신을 갉아먹는 시대였다고 하겠습니다.

현재 우리는 세 번째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영적 도약을 시도하는 성령’(sprit)의 시대입니다. 이 시기는 관념적인 가르침에 대한 습득보다는 체험과 실천이 중시됩니다. 하비 콕스는 이 성령의 시대를 살아남을 종교는 두 가지 모습을 가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는 예언적 종교요, 다른 하나는 신비적 종교입니다.

기독교의 미래가 예언과 신비를 살려내는 데 있다는 깨달음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전 시대에도 거듭한 실패에 대한 반성에서 생겨났습니다. 첫 번째 믿음의 시대에 얻은 활력을 정치적인 지배력으로 전환했던 기독교는 제국주의적 폭력에 영혼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이 폭력의 시기를 지나고 나서야 기독교는 강자로서 권력을 쥐는 것보다 정의와 평화를 머금은 예언정신이 예수를 따르는 길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백년 남짓 된 한국 개신교회가 권력을 추구하며, 도시를 신에게 바치는 성시화 운동을 벌인다거나, 장로 대통령을 만들겠다고 날뛰었던 것은 참으로 어리석고 가소로운 일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종교가 성숙해진다는 것은 그 지혜와 영성이 깊고 넓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숙해지는 것은 두 가지 방향을 갖고 있습니다. 그 지혜가 넓어져서 자신의 이해관계만이 아니라 타인의 아픔과 고통을 자신의 생각과 삶으로 끌어안게 될 때 예언적품성을 익히게 됩니다. 또 그 영성이 깊어져서 자기 욕망이 내뱉는 호흡만을 하지 않고 자기 존재를 떠받치고 있는 더 깊은 세계 전체를 호흡할 때 신비적감각을 키우게 됩니다. 성숙한 믿음은 예언과 신비가 분리되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그리워하고 돕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적 지혜와 영성은 연결된 세계에 대한 인식이라고도 하겠습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모든 피조물이 함께 신음하며,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고 고백했듯이 (8:22), 예수가 흘린 한 방울의 피에 우주적 대속이 얽혀있음을 깨달은 맘에 예언과 신비의 종소리가 울립니다. 반면에 아무리 그리스도의 보혈을 부르짖어도 관계성의 감각을 잃은 교회는 바리새적 교리주의를 벗어나기 힘듭니다.

살아있는 종교는 단지 교리적 가르침에 순응하지 않습니다. 교리적 언어에는 아직 다 포착되지 않은 더 큰 진리와 아름다움에 대한 그리움과 갈망이 생동하는 종교의 동력입니다. 예수의 고난을 묵상하는 사순절에, 이제까지 기독교는 그가 무엇을 이루었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얻었는지를 주로 가르쳐왔습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그가 가진 믿음의 꿈일 것입니다. 청년 예수의 꿈, 그것이 살아있어야 교회다울 수 있습니다.

김재준 목사님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는 30대 초반의 젊은이로서, 낭만적인 시심(詩心)이 있었다. 들의 백합화에서 솔로몬의 왕복보다 더 화려한 아름다움을 보았고, 깃들 곳 있는 공중의 새가 자기보다 더 행복함을 보았다. 그보다도 몇 갑절 더한 인간의 아름다움을 보았다. 그런데 그 인간이 천대받고 짓눌리고 작은 참새처럼 두 푼에 팔리는 비참을 본 그는 자기 목숨을 던져 인간과 만물의 아름다운 영광을 속량하려 했다. 꿈이라면 가장 위대한 꿈이겠다.” (김재준 전집18:134, “백운산 가는 꿈의 집,” 1985년경)

우리가 믿음을 가졌다는 말은 예수의 이 꿈을 이어가겠다는 말이라고 봅니다. 성경은 이러한 믿음의 꿈이 이어지고 커나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뜻과 뜨고 부름을 따라 일어선 사람들, 이사야 4316-21]

오늘 이사야서 43장은 바벨론 제국의 포로로 살던 절망의 사람들에게 들려온 말씀입니다. 그들은 고통스런 삶에 들러붙어 꿈마저도 암담한 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제2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것은 포로에서 구해내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인데, 약속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다짐이자 꿈처럼 들립니다. 1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이제 내가 새 일을 하겠다.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겠다.”

포로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 약속의 말씀은 어떻게 들렸을까요? 그들의 가슴이 뛰기에는 너무도 오랜 시간동안 좌절이 일상이 된 삶이 지속되었습니다. 그들의 조상이 과거에 이집트를 탈출하며 맛본 해방의 사건에 대한 기억도 이제는 자신들의 한탄스런 신세를 더 깊이 느끼게 할 뿐이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을 사로잡은 깊은 후회, 자기 땅에 살면서 정의롭게 살지 못했던 과거에 대한 후회가 현재 그들의 저주받은 삶에 얽혀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절망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지나간 일을 기억하지 말고 옛 일을 생각하지 말아라.” 이것은 과거에 대한 망각이아니라 과거로부터의 해방이요, 과거를 묻는 봉인이 아니라 과거를 이겨낸 극복을 의미합니다.

옛 일을 생각하지 말라는 것은 신이 주는 명령이라기보다는 신 스스로의 다짐처럼 들립니다. 오늘 본문 뒤에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이스라엘이 과거에 지은 죄를 열거합니다. 그러다 문득 하나님은 스스로 내가 더 이상 너의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43:25).

하나님의 이런 선언을 듣고 있는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와 비천하게 몰락한 이들을 향한 것이라면 그것은 장엄하기보다는 애처롭게 들립니다. 사막과 같이 목마른 삶을 사는 포로들을 향해서, 너희는 나의 백성, 내가 선택한 사람들’(ammi bachir, my people my chosen)이라고 부르는데 이것 역시, 선민사상의 배타성을 드러내기보다는 무릎이 꺾인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위로의 말처럼 들립니다. 왜 하나님은 이토록 힘없는 포로들에게 마치 간청하듯이 말하는 것일까요?

21절에서 이사야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 백성은 나를 위하라고 내가 지은 백성이다. 그들이 나를 찬양할 것이다.” 포로들의 입술에 찬양의 노래를 넣어주겠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당시 포로들이 살던 바빌로니아 땅에 오래전부터 전해오던 신화를 따라 해석하면 끔찍한 이야기가 될지도 모릅니다. 길가메시 서사시로 불리는 이 신화는 신이 인간을 창조한 이유를 노동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긴 노동에 지친 하급신이 흙으로 인간을 빚어 만든 다음, 에딘 땅에 인간을 배치하여 노동을 시킨 후에 비로소 자신은 자유롭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신화는 신의 노예가 된 인간에 관한 이야기요, 신처럼 군림하는 세력들에 대한 찬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를 통해서 들려오는 말들은 군림의 언어가 아니라 비참한 포로들을 향한 애정입니다. 그의 입술을 통해서 내가 택한 백성이라고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격려와 회복의 언어로 재탄생합니다. 한편으로는 절망을 떨치고 일어서도록 이끄는 하늘의 부름이요, 다른 한편으로 보면 역사를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뜻에 눈을 뜬 종교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두웠던 포로민들의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다시 흐른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것은 죄악의 역사를 씻어낸 새로운 세대가 태동하고 있다는 말이요, 고난 속에서도 꽃봉오리를 피워내려는 인간의 노래가 시작되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언자 이사야는 포로기의 사람들에게 현실을 도피하는 관념의 노래가 아니라 미래를 향해 부활하는 노래를 부르자고 외치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간직한 마음, 요한복음 121-8]

요한복음 12장에는 예수에게 향유를 부은 마리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갑니다. 거기에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가 있는 곳입니다. 나사로가 자신을 살려주신 예수님을 맞아 잔치를 베푸는 도중에, 동생 마리아가 아주 값진 향유를 가져다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습니다.

이것을 본 예수의 제자 가룟 유다는 마리아를 비난합니다. ‘값비싼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고, 왜 낭비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대로 두어라. 그는 나의 장사 날에 쓰려고 간직한 것을 쓴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지만,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이야기는 마태와 마가와 요한복음 세 곳에 나오는데, 요한복음의 이야기는 다른 두 복음서의 내용과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먼저 이 사건이 일어난 장소에 대해서 두 복음서는 나병환자 시몬의 집이라고 말하는 반면, 요한복음은 나자로의 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마태와 마가는 이름을 알지 못하는 어떤 여인이 예수의 머리 기름을 붓는 반면, 요한복음은 마리아가 예수의 에 기름을 부었다고 말합니다.

이런 세부적인 차이가 있지만, 큰 틀에서는 같습니다. 세 복음서 모두 이 사건을 예수를 죽이려는 음모가 짜진 맥락에 위치시키면서, 이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의 죽음에 대한 암시를 줍니다.

본문에 나오는 몇 가지 점을 주목해 보지요. 먼저 오늘날의 문화감각으로 본다면, 종처럼 보이는 마리아의 행위는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성서 시대에 기름을 붓는 행위가 가진 상징적 의미를 고려하면, 그렇게 생각할 것만은 아닙니다. 히브리어로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을 가리켜 메시아라고 부릅니다. 구원자를 뜻합니다. 메시아에게 기름을 붓는 사람은 제사장이나 예언자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이야기에서 그 역할을 마리아가 맡고 있습니다. 그녀는 당당하게 이 일을 합니다.

이상한 점은, 보통 기름을 머리에 붓는데, 요한복음의 마리아는 예수의 발에 붓습니다. 예수의 머리에 붓는 것이 차마 엄두가 나지 않아서 겸손한 맘으로 발에다 부은 걸까요? 마태와 마가는 머리에 부었다고 한 반면, 요한복음은 발에다 붓습니다. 이것을 마리아의 겸손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이 이야기가 이전의 관념과는 다른 종류의 메시아를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도 좋다고 봅니다. 우리가 알듯이 예수를 통해 나타난 메시아상은 승리하는 영웅이 아니라, 2이사야가 그려낸 것처럼 고난 받는 양과 같은 존재입니다.

이렇게 죽어갈 힘없는 존재였기 때문에 그를 따르던 제자들마저도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했지요. 오늘 본문에서는 가룟 유다의 목소리로 나타납니다. 유다는 기름을 붓는 마리아를 비난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유다의 똑똑한 태도를 간단히 평가하고 다른 상상을 할 수 없도록 차단합니다. 유다가 가난한 사람을 정말로 생각해서가 아니라 돈 자루에 욕심을 낸 도둑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마리아를 옹호한 것입니다.

마리아의 행동이 옳았다는 것은 예수의 말씀으로 완전히 입증됩니다. “그대로 두어라. 그는 나의 장사 날에 쓰려고 간직한 것을 쓴 것이다.” 이 한마디의 말씀으로 마리아의 행위는 정당성을 얻게 됩니다.

이제부터 예수는 죽음을 향하게 되고, 사태는 점점 어두워집니다. 해방과 구원의 운동이 십자가라는 죽음에 먹혀가는 상황이 되어갑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섬김은 그것으로 가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마리아의 행위에 대해서 여운이 남는 말로 표현합니다. 그녀가 머리칼로 예수의 발을 씻자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 찼다고 말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할 몫은 다 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를 향해 어떤 믿음을 가졌고, 어떤 꿈을 품고 그 일을 했던 것일까요? 죽음을 향해가는 메시아로부터 그녀는 무엇을 얻고자 했을까요? 그것이 마리아의 믿음에 담긴 신비한 꿈이라 하겠습니다.

 

[믿음의 꿈, 빌립보서 4b-14]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 어떤 것인지를 말해줍니다. 그는 믿음을 육신에 대한 자랑에서 찾는 사람들을 비판합니다. 바울 자신도 육신의 자랑이 많았습니다. 본문 4-6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가진 세속적인 자랑을 여섯 가지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뽐내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버려야 할 것이었다고 언급할 뿐입니다.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나는 내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깁니다.” (3:7-8)

예수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는 그의 고백, 여기에 신앙의 모든 것이 표현됩니다. 오늘날 우리 각자가 서로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지만, 바로 이 점에서는 같은 믿음의 목표를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에 담긴 짙은 그리움과 갈망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율법에서 생기는 나 스스로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는 의, 곧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에게서 오는 의를 얻으려고 합니다.” (9)

바울이 가진 믿음의 꿈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의를 얻는 것입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 그가 바랐던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것은 죽는 것 같지만 실상은 참되게 사는 것이요, 그리스도에 잇대어 살아감으로써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는 삶입니다.

바울은 이 믿음의 목표가 모두 성취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계획으로 모두 이루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자신이 예수에게 사로잡혀서, 예수에게 붙들려서 좇아갈 뿐이라고 고백합니다.

그가 가진 믿음의 꿈은 그 옛날 이사야를 통해서 들린 하늘의 소리입니다. (43:18) 바울은 그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하는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3:13-14) 예수를 향한 바울의 이 믿음이 우리 맘에 꽃처럼 피어나기를 바랍니다.

한국교회가 교리적 관념종교로 굳어지고, 교권주의적 힘의 종교로 나가기 시작할 때 새로운 신앙운동을 펼쳐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청년 예수를 살아가려는 젊은 신앙인들입니다. 그 마음에 담겼던 믿음의 꿈을 읽어드리며, 오늘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돌 틈에 싹튼 작은 풀잎사귀에도 전우주의 정기가 품겨있고, 흙무더기에 뒹구는 도토리 속에도 운하(雲霞)를 뚫고 설 상수리나무의 가능성이 품겨 있다. 꿈꾸는 자, 위대한 동경과 약속에 사는 자! 그의 이름은 크리스천이다. 번거로운 세속의 삶(紅塵)에 묻혀 있으나 새하늘과 새땅(新天新地)의 위대한 약속에 기뻐하며, 병약과 죽음에 시들어진 몸을 입고서도 불멸의 영광을 믿음 중에 보며, 죄오(罪汚)에 허물어진 영혼을 응시하면서도 지극히 선하고 거룩한(至善至聖)의 인격적 완성을 향하여 순례의 걸음을 멈추지 않는 것이 곧 신앙인의 심정이며, 혼이며, 특색이다. 이 불멸의 이상(理想)과 꿈이 마음속에 불탈 때 그것은 반드시 소리되어 외치는 힘이 되어 움직이는 것이니, 이것이 곧 신앙운동이다. (김재준 전집, 1:98-99, “불멸의 동경,” 1939)

이 신앙운동이 우리 모두의 삶 속에서 펼쳐지기를 기원합니다. 또한 오늘 제직수련회를 통해서 새로운 시대를 향해 나아가는 교회의 모든 일꾼들의 삶에 이 신앙운동이 다시 시작되기를 바랍니다. 잠시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믿음의 꿈을 키워갑시다.

자기 자신의 의에 만족하는 삶이 아니라하나님에게 이르기까지 깊어지고 깊어져서 신비를 얻고이웃과 세계를 향해 나아가며 예언을 얻으면서, 마침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의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고자 하는 믿음의 꿈을 가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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