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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사랑 그건... | 정준모 / 정상희 / 김정원 | 2019-03-10

by 이성환 posted Mar 15, 2019 Views 292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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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9-03-15

사랑 그건...(신 26:1-11, 롬 10:8b-13, 눅 4:1-13)

2019.03.10 (사순절 첫 번째 주일, 청년주일)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

 

정준모 교우

 

제가 이 자리에 서니 감회가 참 새롭군요. 어린아이였던 제가 스물 둘의 청년이 되어 이렇게 여러분 앞에 서니 많은 만감이 교차합니다. 뭔가 멋쩍기도 하고 벌써 성인이 되었다는 뿌듯함 같은 이러 저러한 감정이 들어 지금 이 기분을 쉬이 뭐라 단정 짓기 어려울 듯합니다. 왜냐면 제가 교회에서 하도 짓궂은 일을 많이 벌였었기 때문인데요. 하나의 일화로 2층에 가 보시면 담임 목사님 방 옆에 큰 달력이 하나 있죠, 거기 테두리를 잘 보시면 찍찍이가 붙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붙인 이유가 뭐냐면 제가 초등학교 삼~ 사학년 즈음에 교회 달력을 자꾸 지우는 바람에 지우지 말라고 비닐 덮개로 덮은 흔적이 바로 그 찍찍이입니다. 물론 시간이 지나고 제 머리도 커지면서 그 장난을 멈추게 되었고 이후의 어린이들도 그런 장난을 치는 어린이가 없었기 때문에 그 덮게는 자연스럽게 떨어졌죠. 네 제가 전무후무했던 모양입니다.

 

뭐 아무튼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저는 이제 어린이부에서 교사를 하고 있는데요, 아이들과 정신없이 장난을 치고 있다 보면 문득 제 어린 시절이 떠오르는 순간이 종종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추억에 젖다보면 더 이상 오지 않을 시간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고 왠지 모를 슬픔도 느끼죠. 당시 저는 영원히 어른이 되지 않을 것만 같았습니다. 하루하루의 시간이 너무 길어서 어른이 되기 전에 지구 멸망이 더 빨리 찾아오겠지 하며 불평불만을 늘어놓았었죠. 그런데 문득 뒤를 돌아보니 이 시간들은 전부 까마득한 추억이 되었고 어느 새 저는 어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와 함께 시간은 기어코 가고야 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죠. 

 

십대의 시절 때 저는 모든 것에 화가 나 있었습니다. 불행한 가정과 열등한 자신이 너무 싫어 하늘을 원망했죠. 특히 입시생 시절에는 이러한 고통이 최고조에 이르게 됩니다. 뒤집어진 입시 제도의 피해를 왜 봐야 되는지 알 수 없었고 왜 하필 이딴 일을 겪도록 운명을 만들어낸 하늘도 원망스러웠죠. 그런데 이때에 한 가지 조언을 듣게 되는데, ‘하느님이 있다 치고 대학가게 해 달라고 기도 한번 해 보라’ 라는 말이었죠. 너무 터무니없는 조언이었지만 상황이 절박했던 지라 속는 셈 치고 툴툴거리며 기도란 것을 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참 기묘하게도 대학에 예비 번호1번을 받고 안타깝게 떨어지고 맙니다. 게다가 이것도 부족했는지 똑같은 대학교에 또 다시 예비번호 1번을 받는 일까지 벌어집니다. 심지어 그때는 한명밖에 뽑지 않는 전형이었는데 말이죠.

 

감당하기 힘든 슬픔이 찾아왔습니다. 하늘이 나를 갖고 놀았구나 하며 하늘에 대고 수 없이 많은 욕지거리를 내 뱉었죠 그럼에도 슬픔은 가시지 않았고 그런 슬픔이 온 세상을 뒤덮을 즈음에 저는 학교를 빠지고 무작정 영화관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저는 저의 인생을 통째로 다시 생각해 보게 되는 계기를 맞게 되죠. 제가 봤던 영화는 드뇌빌뇌브 감독의 컨택트라는 영화였습니다. 

그 영화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언어학자였던 주인공이 평범하게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전 세계에 외계인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주인공은 외계인과 소통을 시도하지만 그리 쉽게 해결되지가 않죠. 외계인의 언어는 둥그런 형태의 문자였습니다. 인류와는 달리 시작과 끝이 없는 문자였던 것이죠. 그리고 문자체계처럼 그들은 미래를 알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들의 문자를 습득하던 주인공도 점차 미래를 보게 되는 능력을 조금씩 지니게 되는데요. 주인공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중국에서 전쟁을 선포했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그들이 온 이유를 알아냈어야 했죠.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자꾸만 보이는 미래에 어떤 아이가 등장하면서 주인공을 자꾸만 괴롭힙니다. 자신을 엄마라고 부르며 바빠 죽겠는 주인공의 마음을 묘하게 만듭니다. 그 아이는 대체 누구였을까요.

 

영화는 결국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합니다. 외계인은 철수하고 인류는 화합을 이루어내는 전형적인 할리우드식 결말로 끝맺음을 맺게 됩니다. 하지만 이 엔딩은 주인공에게 조금 남 다른 계기가 되었을 듯합니다. 그들의 언어를 완전히 습득하게 된 주인공은 이제 미래를 알 수 있게 되었고 그 아이는 미래에 낳게 될 자신의 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또한 더 먼 미래에 이 딸이 병에 걸려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까지 알게 되지요. 영화를 보고 나서 저는 엄마에게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엄마가 나를 임신했을 때 내가 얼마 못가 죽는걸 알면서도 낳을 거냐고 했는데 제 엄마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더군요. 왜냐면 저와 함께 보낸 시간이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했죠. 이와 같은 이유로 그 주인공도 그래서 딸을 낳기로 결정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영화는 이런 교훈을 주며 이야기가 끝이 납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고통과 슬픔도 결국엔 어떠한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말이죠. 지금 저는 예비번호를 받았던 대학에 기적적으로 합격했습니다. 하지만 1학년이 끝날 즈음에 사랑에 실패하는 일 때문에 크나큰 고통을 다시 한 번 맞게 되죠. 거의 반년 간 제대로 지내지도 못했고 또 다시 하늘을 원망하며 지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시간들이 저를 조금이나마 성숙시켰던 시간이 된 것 같아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심연에 빠져 살던 시기에 교회를 더욱 좋아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새청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저런 일들을 함께하며 저를 따스하게 품어주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새청이 저에게 주는 무한한 사랑 덕분에 실연의 슬픔에서 무탈히 벗어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저는 이러한 물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수 없이 펼쳐진 삶 중에서 이제 22년차에 접어든 저는 이제 어떤 일이 펼쳐지게 될까 하는 그런 끝도 없는 질문 말입니다. 저는 운명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신 하늘이 짜 놓은 운명은 수없이 많고 우리들의 선택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 그런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닐까란 생각을 요즘 하고 있는데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이 삶이 지금 어디에 다다랐고 우리는 이 삶을 가슴 깊이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비록 딸의 죽음을 깨닫는 주인공처럼 우리의 삶엔 수많은 고난이 있겠지만 그럼에도 딸과 함께하는 시간이 너무 소중한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런 소중한 순간이 있기 때문에 이 삶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 않을까요? 이제 저는 이런 질문을 여러분께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지금 어디에 와 있을까요?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요? 

그리고 삶의 끝자락에 다다랐을 때 우리는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까요?

 

 

 

“하나이면서도 둘이고, 둘이면서도 하나이다”

 

정상희 교우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얼었던 대동강 물도 풀린다는” 우수와 경칩을 지나 완연한 봄을 향해 나아가는 요즘입니다. 이러한 새봄을 맞아 이 자리에 서게 되어 개인적으로 영광이라  생각이 됩니다. 저는 희년 청년회에 소속된 이제 막, 두 번째 스물을 맞이한 꿈 많은 청년  정상희 입니다. 옛 성현의 말씀에 “나이 사십이 되면 어떠한 일에도 미혹되지 아니한다”고  하셨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제 경우에는 2019년 새해 첫날부터 지금까지도 흔들리는 나날의  연속입니다. 이를 볼 때 ‘불혹’ 또한 쉬이 찾아오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이러한 새내기 40대에게, 지난 날 앞서 경험하신 향린의 ‘프로 불혹러’ 선배님들의 지도편달을 부탁드립니다(그렇다고 채찍으로 때리지는 말아주세요. 농담입니다). 아울러 청년주일을 맞이하여 제게 ‘하늘뜻펴기’의 기회를 제공해  주신 향린교회와 교우 여러분들께 깊은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교우 여러분 혹시 ‘미스터 선샤인’이라는 드라마를 알고 계십니까? 지난 2018년 여름부터 방송되어 유례없이 뜨거웠던 날씨’만큼이나 종편 역사상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이 드라마를 많은 교우들이 보셨으리라 생각됩니다. ‘미스터 션샤인’은 대한제국을 전후한 시대를 배경으로, 두 주인공(김태리, 이병헌)의 로맨스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던 의병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 드라마는 그 인기만큼이나 숱한 명대사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이를테면, “전쟁을 해보면 말입니다. 빼앗기면 되찾을 수 있으나 내어주면 되돌릴 수 없습니다.”는 물론이고, 최종회에서 많은 이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던 “그대는 나아가시오. 나는 한 걸음 물러날 테니”, “잘가요 동지들, 독립된 조국에서 씨유 어게인”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 중에서 제가 가장 인상 깊게 봤던 장면(대사)은 주인공 고애신(김태리)이 유진 초이(이병헌)를 향해 “양이들 말도 썩 잘하는 것 같으니 혹시 내 뭐 하나만 물어도 되겠소? 러브가 무엇이오” 하자 (…중략…) 유진 초이는 “총 쏘는 거 보다 더 어렵고, 그보다 더 위험하고, 그보다 더 뜨거워야 하오”라고 했던 부분입니다. 이는 ‘사랑’ 하고 싶은 마음이 강렬했던 30대 후반 (노)총각의 사심이 강렬하게 반영된 결과일지도 모릅니다. 

 

하늘뜻펴기 모두부터 서설이 길었습니다만, 상세하게 말씀드렸던 이유는 2019년 향린교회   청년주일 예배 주제가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께서는 ‘사랑’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애틋했던 첫사랑의 아련한 추억이 생각나는 건 아니신지요. 국립국어원에서 제공하는 <표준국어대사전>에 ‘사랑’이라는 말을 검색하면 다양한 뜻이 나옵니다. 앞서 언급됐던 러브로 표현되는 남녀 간의 사랑부터, 어떤 대상이나 사물을 아끼고 소중히 여긴다는 뜻의 사랑, 남을 이해하고 돕는 마음 또는 그러한 일의 의미를 담은 사랑 등이 있습니다.

 

사실, 저는 처음 청년주일 하늘뜻펴기를 제안 받았을 때 눈앞이 깜깜했습니다. 임박한 날짜도 문제였거니와 ‘사랑’을 주제로 어떤 말씀을 드려야 할지 도통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날 하루 종일 되뇌다가 집에 들어 온 후, 안치환의 ‘그 사랑 잊을 순 없겠죠’를 크게 틀어 놓고 욕실로 향했습니다. 뜨거운 열기가 전신을 감싸고 있는 상황에서도 계속 곱씹던 중에  문득, 그 이야기를 하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제가 유레카를 외쳤던 아르키메데스는 아니지만, 비슷한 상황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400여 년 전, 이 땅에서 걸림이 없는 자유인으로 살았던 원효의 삶과 사상, 이를 통해 새겨볼 수  있는 ‘타인’을 이해하는 ‘사랑’의 의미에 대해서 교우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원효의 속성은 ‘설씨’이며, 서기 617년 현재의 경북 경산시 자인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머니 꿈에 유성(流星)이 품 속으로 들어오더니 이내 태기가 있었고, 장차 해산하려 할 때는 오색구름이 땅을 덮었다고 합니다. 어릴 때의 이름은 서당(誓幢)이었으며,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남보다 뛰어나서 스승을 따라 배울 것이 없었다고 합니다. 요즘으로 치면 ‘슈퍼엄친아’ 정도 되는 분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실제로 원효는 ‘생이지지(生而知之)’의 천부적 재능과 불 같은 열정, 냉철한 비판안과 정확한 논리, 그리고 탁월한 문장력을 지닌 학자였고 80여 부 200여 권의 저서를 남긴 세계적인 저술가였습니다. 동시에 존경받던 고승이면서 환속한 거사였고, 뛰어난 사상가이면서도 실천적 행동인이었습니다. 그는 굴레도 구애도 없는 해방자였고, 자유인이었습니다. 

 

원효와 관련된 일화로 널리 알려진 것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바로 ‘해골물과 깨달음’입니다. 이 일화는 그의 나이 44세가 되던 해인 661년, 도반이었던 의상과 함께 두 번째 당나라 유학의 길을 나섰을 때와 관련이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들께서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원효가 간밤에 샘물인 줄만 알고 마셨던 물은 달고도 시원했는데, 그 물이 해골에 고여 있던 물임을 눈으로 본 다음날 아침에는 오히려 토할 듯한 역겨움을 경험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송고승전 중의 의상 전에서는 약간 다른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원효가 고분을 단순히 토굴인 줄로만 알고 있었을 때는 편안하게 잠잘 수 있었는데, 그곳이 실제로는 해골이 나뒹구는 고분 속임을 알았을 때, 귀신이 나타나는 등 뒤숭숭하며 불안한 체험을 했다고 전합니다.

 

원효가 경험했던 대상은 어두운 밤이나 환한 아침에도 변한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이었습니다. 변한 것이 있다면 원효 자신의 마음이었고, 인식이었던 것입니다. 간밤에는 편안하기만 했던 고분이 다음날 밤에는 귀신의 소굴로 변했고, 시원하기만 했던 어젯밤의 그 물맛도 아침에는 도리어 역겨웠던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원효는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내는 것임을 뜻하는 ‘일체유심조’의 깨달음을 얻습니다. 

 

둘째는, ‘요석공주와의 로맨스’입니다. 김선우 작가의 소설 발원의 모티브가 되기도 한 이 이야기는 삼국유사 「원효불기」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원효가 “어느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빌려주려는가 / 나는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으리라”는 노래를 불렀고, 이를 알아챈 태종(무열왕)이 원효를 찾아 요석궁으로 맞아들이게 하였습니다. 원효는 문천교를 지나다가 일부러 물에 빠져 옷을 적셨고, 궁의 관리는 요석궁에서 안내하여 묵게 하였습니다. 이윽고 요석공주가 태기가 있더니 설총을 낳았습니다. 설총은 나면서부터 지혜롭고 민첩하여 경서와 역사에 두루 통달하여 신라 10현 중의 한사람이 되었습니다.  

 

원효가 살았던 7세기 무렵,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불교계에서는 중관학파와 유식학파 사이의 교리적 대립이 극심하게 일어났습니다. ‘공유(空有)의 대립’이라고 일컬어지는 두 학파간의 분쟁은, 모든 사물은 연기(緣起)할 뿐 독자적인 존재성은 없다고 보는 입장<空>과 인식의 대상으로서의 사물 현상은 비록 공하다고 하더라도 그 인식 자체까지 부정할 수는 없으며 인간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객관적인 세계의 모든 사물 현상은 오직 근본의식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의 산물이라고 보는 입장<有>이 격돌하면서 100여년 간의 해결을 보지 못한 채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중관파와 유식파 두 학파의 주장에 대해서 원효는 다음과 같이 비판했습니다. 

 

“중관파의 중관론이나 십이문론은 여러 학설의 그릇된 이론을 모두 비판하고 부정했으나, 부정의 한 면에만 치우치고 긍정할 줄 모르니, 이것은 파괴할 줄만 알고 건설할 줄 모르는 편협한 이론이다. 유식파의 유가사지론이나 섭대승론은 깊고 얕은 여러 가지 주장을 비판·분석하기는 했으나, 긍정과 부정을 서로 결합하지 못했으니, 이것은 긍정의 한 면에만 치우치고 그릇된 것을 부정할 줄 모르는 이론이다.” 

 

이처럼 원효는 어떤 이론이나 사물현상을 분석·평가할 때에는 중관파들처럼 덮어놓고 부정만 하거나, 또는 유식파들처럼 긍정의 한 면만을 볼 것이 아니라, “긍정하면서도 스스로 부정하지 않음이 없고, 또한 부정하면서도 스스로 긍정하지 않음이 없어야 한다”는 그의 독특한 화쟁(和爭)의 논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원효는 두 극단을 버리고 양자를 종합해야 한다는 화쟁의 논리에 따라 중관파의 “세계의 모든 것은 다 공(空)이다”라고 하는 부정론이나, 또는 유식파의 “세계의 모든 현상은 다 식(識)이다”라고 하는 긍정론을 다 같이 비판하고, 세계는 오직 ‘一心(한마음)’이라는 독자적인 견해를 제시하였습니다. 원효는 ‘一心’을 세계의 시원, 만물의 발생 근원으로 보아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일심의 운동이며 발현이고, 자기 발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나아가 그는 ‘一心’은 서로 상반되는 두 측면의 통일체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두 측면의 상호 작용으로 일체의 현상들이 발생·발전하고 운동·변화한다고 보았습니다. 

 

즉, ‘一心’은 두 부문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은 곧 ‘진여문(眞如門)’과 ‘생멸문(生滅門)’이라고 했습니다. 원효에 따르면 진여문은 발생도 소멸도 없고, 증감도 없으며, 차별도 없는 절대적 본체인 ‘一心’의 본질적 측면을 의미하며, 생멸문은 발생도 소멸도 있고, 증감도 있으며, 차별도 있는 ‘一心’의 상대적인 현상적 측면을 의미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한마음의 두 모순적 측면인 진여문과 생멸문의 관계를 “하나이면서도 둘이고, 둘이면서도 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진여문과 생멸문은 서로 떨어지지 않은 미묘한 관계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두 측면 상호 간의 미묘한 작용을 통해 역동적인 대승의 경계를 전개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당시 동아시아 불교권 전체의 기본적 과제였던 대승불교의 2대 조류인 중관학파와 유식학파 사이의 교리적 대립, 즉 ‘공유(空有)의 대립’을 극복할 수 있는 종합불교로서의 독창적인 교학을 성립시켰습니다. 나아가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불교가 인도불교의 아류에서 벗어나 차원이 다른 단계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주 다투고, 세상은 조용할 날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흔히, 나는 옳은데 당신은 그르다는 입씨름이 오가고, 격해지면 주먹이 날아오고, 주먹이 대포로 바뀌면 전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백가의 서로 다른 논쟁의 화해, 이것은 사람들의 오랜 희망이며 과제입니다. 논쟁을 하다 보면 흔히 자신의 주장에 집착해 상대방의 의견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이해하거나 주장할 때도, 자신의 입장이나 위치, 성향 등에 얽매어 객관적이면서 종합적인 시선으로 대상을 파악하기가 힘이 듭니다. 또한 사람들은 모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기 어려우며, 자신의 안경으로 보고, 자기가 가진 잣대로 재며, 자기중심으로 인식하려 듭니다. 

 

또한, 편협한 생각에 얽매여 일방적으로 한 면만을 고집하거나 한 가지 입장만을 절대화 하고 독단화 하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에 대해 원효는 다음과 같이 비판합니다.

 

“자기가 조금 들은 바 좁은 견해만을 내세워, 그 견해에 동조하면 좋다고 하고, 그 견해에 반대하면 잘못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마치 갈대 구멍으로 하늘을 보는 것과 같아서, 갈대 구멍으로 하늘을 보면 좋다고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하늘을 보지 못하는 자라고 한다.” 이는 성품이 좁은 자가 자기의 소견을 홀로 내세워 타인의 말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상황에 대해 가하는 질책입니다. 세상의 이치는 하나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서로 다르기만 한 것도 아닙니다. 비일비이(非一非二) 즉,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능히 모든 방면이 다 합당하고, 다르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로 통한다” 

 

사람 사는 세상에 인정과 도리가 상충할 때가 많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같지도 않게(非同) 다르지도 않게(非異) 말하라”고 원효는 가르쳐줍니다. 상대와 다르지 않으므로 그 사람의 정과 어긋나지 않고, 같지 않음으로써 도리에 위배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잘못이 많고 어려움이 많으며 상처받기 쉬운 세상에 정이 없다면 살맛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 때문에 도리를 어긴다면 세상은 또다시 어려워지고 말 것이니, 이를 경계해야 합니다. ‘냉철한 이성과 뜨거운 가슴’은 불가분의 관계가 아닙니다. 모두 내 안의 한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때로는 서릿발 같이 자신의 견해를 표출하면서도 인간에 대한 예의는 잃지 않는 그러한 토론의 문화를 만들어가는 향린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는 1400여년 전, ‘一心’과 화쟁을 통해서 원효가 우리에게 전하는 사랑의 메시지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20세기 초 중반 남아메리카의 정글에서,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혼신을 다했던 어느 혁명가의 말을 빌어 하늘뜻펴기를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하지만 가슴 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감사합니다.

 

 

 

사랑, 그건...

 

김정원 목사

 

사랑에 대한 고민들이 담긴 영상이었네요. 삼청들의 모습들이 담긴 사진들을 가만 보고 있자니, 입가에 미소가 번집니다. 아마도 그 모습 속에 저마다의 끈끈한 사랑들이 느껴지기 때문인가 봅니다. 

 

이번 청년주일 주제는 ‘사랑’입니다. 청년들과 사랑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시간이 어찌 흘렀는지도 모를 정도로 재미가 있습니다. 특히, 연인과의 지난 사랑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때면, 누가 누가 더 많이 바보 같았는지를 경쟁이라도 하듯, 서로의 과거들을 앞 다투어 꺼내놓기 일쑤입니다. 그 재미있는 이야기를 이곳에서 다 꺼내놓지 못함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다만, 제가 오늘 꺼내놓을 수 있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들이 있는데요, 그 첫 번째는 체 게바라가 전하는 사랑이야기입니다.

 

체 게바라의 시, 제목 ‘개인이기주의’ 속에서 그가 생각하는 사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낭독합니다.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세상이 오더라도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은 개인이기주의이다! 그것은 감기 바이러스와 같은 것이어서 늘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고 우리를 전염시킨다. 전염 경로인 공기와 물을 없앨 수는 없다. 오직 마음을 개조시키는 것, 정신혁명뿐이다. 그것은 인류 최고의 무기인 사랑이다! 그 사랑은 만능열쇠처럼 어떠한 것도 열 수 있다.” 

 

그는 우리가 바라는 바로 그 세상, 우리에게는 하나님나라이겠지요. 바로 그 세상이 온다 하더라도 감기처럼 쉽게 우리를 전염시키는 이기주의 때문에 우리는 사랑으로 무장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있는 만능열쇠라고 그는 전합니다. 

 

게바라의 메시지는 오늘의 본문 신명기서에서도 발견됩니다. 주지하듯, 신명기는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외치는 모세의 소리입니다. 모세는 이제 곧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될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해 외칩니다. “이집트에서 겪었던 학대와 강제노동에서 구원해내셨던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들이 살려 달라고 부르짖었을 때, 그 울부짖음을 들으셨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억압과 짓눌림을 보고서, 강한 손과 넓은 팔로 위엄과 기적을 행하사 여러분들을 이집트에서 건져내신 분입니다. 그러하기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여러분에게 보이셨던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기억하여, 여러분의 것을 외국인과 고아와 과부에게 나누어주십시오. 여러분들의 것으로 그들을 먹이어 좋은 것들을 함께 누리십시오.” 

 

모세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게 될지라도, 하나님이 보이셨던 즉, 하나님이 가르치셨던 그 사랑을 기억해야 함을 외치고 있습니다. 아마도 모세 역시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에 들어갔을 적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감기처럼 번질 개인/이기주의를 염려했었나 봅니다.

 

모세의 외침 속에는 제가 오늘 꺼내어 놓을 두 번째 사랑이 들어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그것입니다. 모세가 전하는, 다시 말해 하나님이 제1성서에서 계속해서 보여주셨던 사랑은 어떤 사랑이었습니까? 저는 이것을 오늘 예배 시작에서 낭독된 시편의 한 구절을 따와 표현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이 나를 간절히 사랑하니, 내가 여러분을 건져 낼 것입니다. 여러분이 나의 이름을 알고 있으니, 내가 여러분을 기억합니다. 여러분이 나를 부를 때에, 내가 응답하고, 여러분이 고난을 받을 때에,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을 건져 주고, 여러분이 즐거이 살게 도울 것입니다.” 즉, 고난 받는 자들의 부르짖는 소리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오늘 제가 전하는 두 번째 사랑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개인/이기주의를 녹이는 사랑, 고난 받는 자들의 울부짖음을 외면하지 않는 사랑, 즉 고아와 과부와 이방인이 누려야 할 사랑. 이러한 사랑은, 오늘의 또 하나의 본문인 로마서로 다시 이어집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있으니, 그것은 곧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갖는 것에 있어서는 유대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모든 사람에게 차별이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잠깐, 자본주의 시대를 헤쳐 나갈 대안적 인물로서 바울을 주장하고 있는 맑스주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의 생각을 빌려와 봅니다.

 

바디우는 바울이 ‘유대사람’과 ‘그리스사람’을 거론한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유대인들의 담론은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담론으로서, 본인들이 선택된 민족이라는 우월의식, 즉 예외성을 기반으로 합니다. 반면에, 그리스담론은 지혜 다른 말로는 이성을 기반으로 하는 담론으로서, 우리의 존재를 고정된 질서 혹은 고정된 세계 안에서 사유하는 것을 기반으로 합니다. 바디우는 바울이 이 두 담론 모두를 부정하며, 전혀 새로운 담론을 제시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제시하고 있는 전혀 새로운 담론, 그것은 바로 믿음을 기반으로 하는 담론입니다. 이것은 “내가 신에게 선택 받았어, 내가 이 기적의 주인공이야, 나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사람이야!”라고 주장하는 유대담론도 아니요, “나는 합리적이야, 나는 정말 이성적 사고를 하는 주체야, 나야말로 이 세계의 질서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야!”라고 주장하는 그리스담론도 아닙니다. 믿음의 담론은, ‘약함’, ‘불안정함’, ‘질그릇과 같은 투박함’ 그리고 ‘부재’를 기반으로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어떤 기적을 선언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 전통적 이성에 기대어 무언가를 증명하는 것 또한 아닙니다. 도리어 믿음은, 기적이라 일컬어지지 ‘못한’, 혹은 증명되지 ‘않은’ 그 부재의 영역을 온전히 고백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약한가요? 우리는 얼마큼 불안정합니까? 우리의 자아는 얼마큼 구멍 난 채로 존재합니까? 만약 우리가 약하다면, 만약 우리가 불안정하다면, 만약 우리가 우주의 질서를 증명 불가능하다고 고백한다면, 그 부족함은 곧 우리의 믿음을 강제할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약함이 우리의 믿음을 이끌어 내고야 말 것입니다. 바울은 약함 속에서 믿음을 발견하는 일, 그 일은 유대인을 넘어, 그리스인을 넘어, 어느 누구에게나 허락된 것으로서 차별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약함을 고백하는 자들이 믿음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은 복음서에서 자주 발견됩니다. 사회적 구조 안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였던 시대의 약자들이 예수의 발 앞에 나와 자신들의 약함을 드러냅니다. 예수는 그들에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의 믿음이 당신 자신을 구원하였습니다.”

 

강함도 아니고, 합목적성도 아니고, 우월성도 아니고, 로고스나 율법은 더더욱 아닌- 바로 약함 속에 우리의 구원이 있다는 것은 부족한 우리들에게, 나아가 고난 받는 이들에게는 더 없는 사랑의 메시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쉽지 않은 시대를 젊은 시절부터 온몸으로 견뎌내고 있는 우리 청년들은 얼마큼 약합니까? 자본주의라는 중력 때문에 혹시, 땅 아래로, 아래로 하강하고만 있는지요? 녹록하지 않은 삶의 무게로 추락하고 있지는 않나요? 만약 그러하다면, 참 다행입니다. 말했든, 여러분들의 약함 속에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이 운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추락하는 힘, 중력만이 있지 않습니다. 또 하나의 힘, 바로 하늘로 솟아 올라가는 힘이 있습니다, 뉴턴은 떨어지는 사과만 봤지, 사과가 어떤 힘으로 하늘로 뻗어나가는지는 설명하지 못했습니다(이어령). 암만 자본주의적 중력이 여러분의 약함을 파고들어 땅으로 꺼지게 만든다 할지라도, 작은 씨앗이 싹을 틔우고 햇빛을 받아 하늘 높이 자라서 열매를 맺게 하는 생명력이 중력의 힘보다 크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중력이 있다면 하나님의 생명력 가득한 사랑도 함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힘은 여러분을 하늘로 뻗어나갈 수 있게 합니다. 

 

돈, 명예, 권력을 속삭이던 악마 앞에서도 거세게 저항했던 예수님을 기억합시다. 예수님의 강함이 여러분의 약한 속을 메워나갈 것입니다. 약함을 기억하시며, 울부짖음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고백합시다. 이미 그 사랑을 고백하고 있다면, 이제 그 사랑을 가지고 고난 받는 이웃들에게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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