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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진정으로 옳은 길 ㅣ 김지목 ㅣ 2023-01-29

by 김지목 posted Jan 29, 2023 Views 173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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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3-01-29

20230129 주현절4

 

진정으로 옳은 길

6:1-8, 15:1-5, 고전 1:18-31, 5:1-12

 

고린도교회는 사도 바울이 마음을 다해 애정으로 세운 공동체였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받은 하나님의 은혜”(고전1:4)를 기반으로 건강하게 성숙하는 모습을 확인하고, 사도 바울은 다른 지역으로 선교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이내 바울이 없는 틈을 타서 분란을 일으키는 자들이 고린도교회에 유입되었습니다. 공동체의 인적 물적 자원에 입맛을 다시며 종교적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는 자들이었습니다. “바울파나, 아볼로파냐, 게바 베드로파냐?” 하는 파벌을 형성하고 서로 대적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기득권을 확보하려는 궤계에 고린도교회는 몸살을 앓기 시작했습니다. 그 세력들의 성격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있도록 성서는 말해주고 있지는 않지만, 시대적인 배경을 살펴보면, 그들은 영지주의 세력과 유대주의 세력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영지주의 세력은, 당시 하나님을 경외하는, 종교적으로 신실한 삶을 살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을 호도하여 권력을 차지하려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신실한 고린도교회 공동체는 탐낼만한 대상이었습니다. 또 다른 세력 유대주의자들은 유대 본토주의자들로, 지난하게 사도 바울과 대립하며 종교적 세력을 흡수하려는 자들이었습니다. 유대 율법을 내세우며 권력의 지위를 선점하려는 자들이었습니다.

 

애정을 쏟은 고린도 공동체가 분란에 휩싸여 흔들리고 있다는 소식에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교의 근본 사상으로 공동체가 회복되기를 바랐습니다. 바울이 서신을 통해 고린도 공동체에 전한 해결책의 내용은 십자가의 사랑이라고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분열을 획책하고 파벌 경쟁의 혼란을 극복할 수 있는 길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원초적인 사랑의 사상으로 공동체가 회복되기를 바란 것입니다. 획책과 혼란으로 무성한 가지처럼 흔들리는 상황에 휘말리지 말고, 신앙의 중심을 잡는 일이 시급했습니다. 원시반본(原始返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우리 신앙의 근본으로 돌아가서 지금의 소란을 잠재우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현절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공생애 동안 가르치신 것을 마음에 담는 이 계절에, 사도 바울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되새겨보고자 합니다. 24절에 바울은, “우리에게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지혜라고 말합니다.

 

능력과 지혜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어떤 힘과 방식을 논하고자 함입니다. 고린도교회가 처해있던 분란의 상황을 극복할 힘과 방식, 그것이 십자가라고 사도 바울은 역설하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근원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리와 내용에 집중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의지해야 할 힘이며, 선택해야 할 방식이라는 의도가 능력과 지혜에 담겨 있습니다. 이것은 구별된 우리의 길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신앙인에게 맡겨진 특별한 소명이자 신앙인의 삶을 운전하는 원리임을 강조합니다. 그 십자가는 유대인에게는 거리껴지는 것이고 헬라 그리스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방식이겠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야말로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선택해야 하는 근원적인 힘이라는, 사도 바울의 강조입니다.

 

유대인에게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종교권력 헤게모니를 갈취하려고 죄 없는 청년 지도자를 희생시킨 사건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예수의 제자들은 유대인의 그 비양심을 찔렀습니다. 유대의 오랜 율법적 전통을 올바르게 가르치며 야훼사상으로 민중을 위로한 메시아적 샛별을, 그깟 알량한 산헤드린 종교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십자가 처형으로 죽여버린, 그 잘난 유대주의를 저격하면서, 초대교회 공동체는 유대교와 다른 그리스도교의 시작을 새롭게 선언했던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태동하면서 외쳤던 것은 예수가 부활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 말뜻에는, 십자가로 처형된 예수가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어 예수의 사상이 우리들 공동체로 이어졌다, 유대인 너희가 죽인 그 예수가 초대교회 공동체로 부활했다는 선언이 담겨 있습니다. 이러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일어나기 시작하자 유대인은 더 긴장감을 가지고 경계하며 응전했습니다. 그 한 기류가 이방선교를 하는 사도 바울에 대한 공격이었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그 대립이 첨예해지면서 정치세력과 결탁한 그리스도인 박해로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배경을 지닌 유대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거리껴지는 것이었습니다. 초대교회라는 새로운 물줄기가 솟아난 문화적 환경에서 십자가 이야기는 자신의 입지를 좁히는 이슈였습니다.

 

한편 헬라 그리스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어리석은 방법이었습니다. 형이상학의 깊은 통찰을 추구해온 철학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고상하지 못한 육적인 차원의 고통에서 진리를 찾는 것은 매력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영과 육의 상존관계를 조화롭게 균형 맞출 수 없는 철학자에게 형이상학은 악마적인 것으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헬라철학 전부를 그렇게 매도할 수 없겠습니다만, 당대 주류 담론이었던 영지주의 사상의 일부가 그리스도교에 폐해를 끼쳤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들은 십자가 처형의 그 육적인 것에서 진리를 운운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비웃음의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구원의 단초를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지혜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이 말하는 지혜와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지혜를 구별합니다. 20절에, “현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학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의 변론가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한 것이 아닙니까?” 고린도교회 교우들에게 전하는 바울의 이러한 항변은, 형이상학 철학의 고상한 겉멋에 심취한 영지주의자들의 분란에 휩쓸리지 않기를 권면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민중의 삶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삶을 떠난 철학은 공허한 결말을 맞이합니다. 이러한 까닭에 사도 바울은 25절에서,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하다고 하였습니다. 민중의 삶을 응원하고 위로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곧 하나님의 지혜이며, 그 하나님의 지혜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귀결되었음을,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다시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중심축이 되는 십자가는 변혁의 원심력입니다. 하나님나라를 향한 힘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는 십자가로 구원을 얻는다고 고백합니다. 십자가는 그 자체로 동적인 메시지입니다. 목걸이로 작고 아름답게 장식되었더라도 이것은 매우 강렬한 희망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역사만큼이나 십자가의 모양은 참 다양합니다. 십자가를 중심으로 여러 의미들을 결부시키거나 공동체의 정체성을 십자가 모형에 담기도 하여, 다양한 형상의 십자가들이 있습니다마는, 모든 다양성을 관통하는 하나의 메시지는 구원과 하나님나라의 실현입니다.

 

그리스도교를 상징하는 십자가에서 느낄 수 있는 하나님나라의 역동성, 그 안에는 고통이 또한 내재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수난과 민중의 고난이 상징되어 있는 것입니다. 수난과 고난은 인내입니다. 고통을 감수하고 견디는 이유는 구원과 하나님나라를 바라보는 까닭입니다. 한편, 아픔을 견디는 인내는 정적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는 것은 세상 죄를 짊어지신 그분의 아픔에 가만히 동화되는 정적인 과정을 수행하게 됩니다. 세상의 죄를 전적으로 받아들여 구원의 희생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세상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깊은 구심적 성찰, 이것이 십자가를 묵상하는 또 다른 면모입니다.

 

고난을 인내하면서 하나님나라를 소망하는 것, 구심적 성찰과 원심적 변혁이 동시에 담긴 십자가. 이것을 마음에 품은 우리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선택이라고 평가하는 이들이 있을지라도 십자가는 우리의 방식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십자가를 중심에 둔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남을 확신하며 오늘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참고 견디고 연단하고, 설득하고 기다리는 십자가의 방식이 인류를 구원할 하나님의 지혜임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제1성서에 증언된 야훼 하나님의 사상이 형상화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위하여 설득하고 기다렸습니다. 설득하고 기다리는 신(), 하나님은 백성의 집단적 성찰이 완성되는 그때를 그토록 기다리는 분입니다. 백성의 무지와 끊임없는 배신에 설득과 기다림을 중단할 법도 하건만, 끝까지 설득하고 기다리겠다고, 야훼 하나님은 그렇게 신실하신 분이라고 성서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미가서 말씀은 제1성서 전체를 요약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핵심적입니다. 본문 내용은 몇 번이고 백성을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관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저변에는 예언자 미가의 답답한 심정이 깔려 있는 것을 느낍니다. 3절에, “내 백성은 들어라!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하였느냐? 내가 너희에게 짐이라도 되었다는 말이냐? 어디, 나에게 대답해 보아라.”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쓰여 있지만 성서 기록과 편집을 감안한다면, 예언자 미가가 느낀 하나님의 심정을 표현한 것으로 읽어야 합니다. 끝까지 기다리시는 하나님에 대한 서술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8절에, “너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이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것, 그것은 계약으로도 체결했고, 율법으로도 제정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공의 실천, 사람 사랑,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충실한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해서 그동안 수차례 설득해 오셨다는 것을 예언자를 통해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그 세 가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십자가로 수렴됩니다.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공의를 실천하고 인자를 사랑하고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기에 완전한 때가 되기를 기다리시고 또 설득하고 계신다고, 두 본문을 공시적으로 읽어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의지가 형상화된 것입니다. 이러한 십자가의 목적은 공동체적 각성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의를 실천하고 인자를 사랑하고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사람들이 모이고 확대되는 것이 그리스도교 십자가의 목표입니다. 무엇 때문에 고난을 인내하고 때를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어떻게 하나님나라를 완성할 수 있겠습니까? 영적인 깨달음과 우리 삶의 변화를 위해서 십자가는 인내하고 기다립니다. 깨달음과 변화, 이렇게 우리 신앙의 힘을 축적하여 하나님나라를 마침내 실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다분히 공동체적이어야 합니다. 영적 각성과 삶의 변화가 우리 공동체 안에서 조화롭게 축적되는 것, 여기에 그치지 않고 노회와 총회라는 보다 큰 교회로 신앙의 힘을 확대하고, 나아가 세계 교회와 함께 세상을 변화시켜 나갈 신앙의 힘을 공유함으로써 하나님나라 실현을 기대하는 것이, 2천년을 아우르는 그리스도교의 오랜 전통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신앙을 고백하는 세계의 수많은 교회들은 각자 자기에게 맡겨진 십자가가 있음을 또한 고백합니다. 십자가 고백을 나 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신앙의 동지들이 있음에 우리는 힘을 얻습니다. 향린공동체를 넘어, 신앙의 동지들과 선한 연대를 형성하면서 우리 시대에 맡겨진 십자가를 합심하여 짊어지는 것, 이 또한 우리에게 맡겨진 십자가입니다.

 

교회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고난당하는 민중들과 함께 연대하기를 갈망하는 향린의 선교정신에서 우리의 십자가가 밝게 빛납니다. 하나님이 백성의 아픔에 한 몸처럼 느끼시고 아파하셨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클로스 민중들의 삶에 하나가 되셨고 십자가 위에서 인류의 죄를 한 몸으로 받아들이셨듯이, 우리가 십자가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아픔과 고난에 동참하는 고백을 하듯이, 오늘날 이 시대와 역사로 인해 고통을 받는 이웃들과 그 아픔을 나누어 연대하는 것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애초 사랑의 발로였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민중과 세상을 사랑하신 것처럼, 연대의 십자가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자신의 범주를 넓혀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큰 나를 맞아들여서 아픔도 즐거움도 함께 나눌 수 있는 관계를 형성하는 것. 이것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 그 사랑의 훈련을 위해 우리는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향린에서의 모든 과정, 모든 일과 계획이 사랑이기를 기도합니다. 모임과 예배, 삶의 나눔과 다양한 논의, 친교와 봉사, 선교 등 모든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잉태되고 하나님나라의 기쁨을 맛보는 기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지난 70년 이끌어주신 하나님께서, 또 광화문 새역사의 발걸음을 내딛도록 인도해주신 하나님께서 우리 공동체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해주실 줄을 믿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길에 낙담할 때가 있습니다. 십자가의 길에는 기쁨과 보람도 있지만, 또 희생과 감내가 뒤따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공의를 실천하고 인자를 사랑하는 우리의 소명은 마땅히 걸어가야 할 길이지만, 쉬운 길만은 아닙니다. 하나님나라를 미리 맛보는 기쁨에 멍에를 벗은 것 같은 쉬운 길이지만, 자기를 부인하고 따라가야 할 고난의 길이기도 합니다. 그런 까닭에 십자가는 사랑의 힘을 필요로 합니다. 기도와 묵상으로 하나님과 동화되는 영성의 깊은 우물을 길어 올려야 합니다. 민중의 현장에서 나보다 먼저 와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감동도 큰 힘이 됩니다. 서로 힘을 내기 위해서 향린공동체로 우리가 모였습니다. 예배의 봉사를 통해 깊은 감동을 받고 사랑의 교제로 위로를 나누는 일은 우리 신앙생활에서 결코 낭비적인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고난에 치우친다면 낙담이 쉬이 찾아올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에는 충분한 사랑의 힘이 채워져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복음서의 산상설교는 복을 예고해주시는 예수의 말씀입니다. 복을 빌어주는 마음으로 우리는 일상을 살고 있기에 산상설교의 축복은 중요합니다만, 이 말씀은 복을 약속받은 사람들에게 보다 중점을 두고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나라의 축복은 단순한 기복의 보상이 아니라 그 나라의 백성이 되는 사람들이 어떤 이들인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한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들이 그 주인공들입니다. 그들과 같은 삶, 그리고 그들과 연대하며 사랑을 나누는 사람에게 응당 하나님나라의 복을 차지할 것이라는 약속이 말씀의 본뜻일 것입니다.

 

그러한 산상설교의 본뜻 위에서 오늘은 이 말씀을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에 주목해봅니다. 산상설교라는 공간적 배경에서, 작은 언덕 위에서 제자들을 바라보시며 말씀을 전하시는 예수의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예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두고서 하늘나라의 축복으로 위로하고 격려하시는 예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마음이 가난한 제자의 간절함과 겸손함, 옳은 일로 인하여 슬픔에 젖어있는 제자, 따뜻하고 부드러운 심성으로 사람들을 위로하던 제자, 정의를 위하여 깊은 결단을 하고 있는 제자, 자비로운 마음씨로 뭇 생명을 살리는 일에 헌신하는 제자, 깨끗한 마음으로 모든 이들의 신망을 받는 제자, 평화를 이루기 위해 애쓰는 제자, 정의를 위해 싸우다가 박해를 받는 제자 등. 제자들의 삶 면면히 잘 알고 계시는 예수께서 하나님나라를 향하여 매진하는 제자들의 처지를 알아주시고 그들에게 하늘나라의 축복으로 위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에서 넘치는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며 신앙생활과 선교를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사랑의 마음이 가득하기를 소망합니다. 타인의 형편과 처지를 충분히 이해하고 복을 빌어주는 마음, 그 사랑의 힘으로 작은 믿음 다시 모아 새로 심는 향린” 70주년을 열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 공동체에게 맡겨진 십자가의 길, 특별히 광화문 새역사의 선교를 희망차게 수행해 나가기를 마음을 모아 기도합니다.

 

잠시 침묵합시다.

 

 

(파송사)

파송의 말씀을 전합니다.

우리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오십시오.

함께 짊어집시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힘을 냅시다.

공동체는 사랑과 십자가의 훈련 공간이며 공급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발길 따라 광화문 새역사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밝게 빛나기를 빕니다.

 

함께 공동축도를 나눕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 주시는 친교가

 

우리 가운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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