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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임마누엘, 꿈의 못자리 | 김희헌 | 2022-12-18

by 김희헌 posted Dec 19, 2022 Views 156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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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2-12-18

임마누엘, 꿈의 못자리 (7:10~16, 1:1~7, 1:18~25)

2022.12.18. 대림절 넷째 주일

 

[임마누엘의 꿈이 솟아나는 마음]

대림절 넷째 주일 아침 함께 생각해 볼 성서의 주제는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입니다. 성서의 기본 믿음이 어쩌면 이 단어에 기초하고, 기독교 신학의 많은 상상력이 비롯되는 꿈의 못자리라고도 하겠습니다.

임마누엘에 관한 성서의 이야기는 이사야서 7장과 마태복음 1장에 나옵니다. 이 두 성서 본문의 역사적 배경은 고통과 위기의 시대입니다. 오늘 읽은 시편 80편에서 시인이 노래하는 것처럼, 어둠 속에서 탄식하는 사람들이 임마누엘의 꿈을 꿉니다. 시편의 기자는 자신의 시대를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눈물의 빵을 먹이시고, 눈물을 물리도록 마시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우리의 이웃에게 시빗거리가 되게 하시니, 원수들이 우리를 비웃습니다.” (80:5~6)

오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요? 사회적 참사와 가난한 이들의 죽음이 확대되는 비통한 현실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현 정부 들어 민주주의의 가치는 급속히 파괴되고, 사회적 퇴행을 거듭하며 인간의 삶을 끌어내리는 혼돈의 정치가 번지는 것 같습니다. 삶의 불안은 커지고, 투쟁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 외침에는 시편의 시인이 반복하고 있는, “하나님, 우리를 회복시켜 주십시오.” 하는 기도가 짙게 담겨 있습니다.

삶이 위태로울 때, 사람들의 선택은 다양합니다. 직접적인 이해관계에 더욱 이기적으로 몰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저버릴 수 없는 양심의 도전을 크게 느끼며 믿음을 지켜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위기의 시대에 더욱 그리운 것은 임마누엘의 믿음입니다. 임마누엘의 기도가 터져 나오는 자리, 임마누엘의 신앙이 솟아 나오는 자리는 고통과 위기가 깊은 곳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고통을 견디는 것 자체를 목표로 두지는 않습니다. 삶이 비록 고통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그 속에서 자비로운 구원을 만나고자 합니다. 그것이 성서가 말하는 성탄의 신비, 하나님의 사랑이 고통 깊은 삶에 임한다는 임마누엘의 믿음입니다. 우리의 고통을 아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임마누엘의 신앙으로 이끕니다. 성서의 하나님은 고통받는 피조물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고, 우리는 고통의 자리로 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믿음을 얻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임마누엘의 믿음이 왜곡되기도 합니다. 특히, 예수의 탄생설화에 얽힌 동정녀 탄생과 성령의 잉태에 관한 성서 이야기를 생물학적 사실관계로 이해할 때 그러합니다. 성서는 오늘날 과학이 다루는 사실관계보다는, 역사와 인생이 추구할 진실의 문제를 증언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서가 말하는 임마누엘의 진실(truth)은 역사적 사실(fact)에는 모두 담기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문제는 인간의 정신 활동이 가진 중층적인 기능 때문이기도 합니다. 곰곰이 살펴보면, 인간의 마음은 세 가지 기능을 하는 것 같습니다. 첫째는 세계를 보고 들으면서 얻는 경험(experience) 활동입니다. 둘째는 경험한 것을 유추하고 반성하는 생각(thinking)의 작용입니다. 셋째는 그 생각 너머로 나아가는 각성과 깨달음(awareness)입니다. ‘경험과 생각사실에 착안한 마음의 운동이지만, 깨달음은 진실을 얻으려는 마음의 각성에서 비롯됩니다. 임마누엘의 진실을 깨닫기 위해서는 이 차이를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은 실제 사실과 다를 때가 많습니다. 현실 경험에서 굴절된 사실을 올바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과학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일어난 사실에 모든 진실이 담기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사실과 진실의 무게를 재는 철학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 진실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종교의 가르침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임마누엘의 진실을 보기 위해서는 지식보다는 깨달음이 중요합니다.

현대 심리학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불안과 초조의 원인이 되는 자아의 경험 요인들을 밝히려고 합니다. 하지만, 종교는 그 심리학적 자아의 자기중심적 태도 자체를 문제시합니다. 심리학이 추구하는 자아발달이 자신을 확장하고 강화하는 것이라면, 종교는 그것을 자아의 집착이라 부를 것입니다.

종교마다 가는 길은 다를 수 있지만, 진리를 추구하는 목표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불교가 수행을 통해 이루려는 깨달음이든, 기독교가 절대자와 온전한 사랑의 관계에서 얻으려는 하늘의 선물이든, 모두 자기 경험과 생각너머에서 열리는 진리의 길을 추구합니다. 경험과 생각에 매인 자아에서 벗어나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자기 경험과 생각을 주도하는 마음속 해설가를 침묵시킨 순간에야 자유와 진리, 순수함과 깨달음의 빛이 비치기 때문입니다.

성서가 가리키는 임마누엘의 사건은 고통의 세상에 임하는 자비로운 선물이지만, 그것은 단지 고통 속에서 얻은 경험과 생각을 만족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임마누엘의 사건은 깨달은 마음에야 비로소 확연해지는 진실입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해야 볼 문제가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 성서 본문은 임마누엘 예언에 관한 두 개의 이야기입니다. 이사야서는 유대 왕 아하스에게 주어진 임마누엘 예언이요, 마태복음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이 깨달은 임마누엘 사건입니다. 이 두 이야기는 모두 불안한 위기 상황에서 생겨났습니다. 하지만 같은 위기 상황에서 서로 다른 결과를 보여줍니다.

 

[예언과 응답 1, 아하스의 길 / 이사야서 710~16]

이사야가 전하는 임마누엘의 예언의 배경에는 다윗 왕조의 불안과 공포가 있습니다. 왕국이 남북으로 분단되어 이백 년가량 흘렀을 때, 스무 살의 나이로 남 왕조의 왕이 된 아하스는 전쟁 상황을 맞게 되었습니다. 북 왕국이 옆 나라 시리아와 동맹을 맺고 침공한 것입니다.

성서 기록을 보면, 기원전 734년경에 이루어진 이 침공이 성공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7:1). 하지만, 아하스는 두려움에 빠져 외세의 힘을 빌려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10년 후에 북 왕국 이스라엘은 패망하고, 남 왕국도 제국의 위성국으로 몰락하게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상황에서 임마누엘의 예언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아하스는 자신이 처한 현실에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너는 주 너의 하나님에게 징조를 보여 달라고 부탁하여라.”(7:11) 하지만, 아하스는 거절합니다. “아닙니다. 저는 징조를 구하지도 않고, 주님을 시험하지도 않겠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아하스의 이 대답은 겉으로는 순수한 말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영적인 실패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두려움에 휩싸여 무엇이라도 붙들고 싶었지만 (2), 정작 믿음이 필요할 때에는 주님을 시험하지 않겠다라고 말하면서 사태를 비틀었던 것입니다. 깨달음이 없는 자기기만의 지식입니다.

그것을 본 이사야 예언자는 비판합니다. “다윗 왕실은 들으십시오. (당신은) 백성의 인내를 시험한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이제 하나님의 인내까지 시험해야 하겠습니까?” 그런 다음 주어진 말씀이 임마누엘의 예언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다윗 왕실에 한 징조를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 왕조에 주어진 임마누엘의 예언은 회복의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북쪽 연합군의 땅은 모두 황무지가 되고, 남 왕국에도 이제까지 겪어본 적이 없는 재난이 될 것이라는 예언이었습니다. 이사야가 전한 임마누엘의 예언은 하늘의 선물이라기보다는 하늘의 심판이었고, 아하스가 걸었던 두려움과 불신의 길에서 임마누엘의 예언은 회복의 기회가 아니라 폐허의 징조가 되었습니다.

 

[예언과 응답 2, 요셉의 길 / 마태복음 118~25]

그렇게 아하스의 비극으로 시작된 임마누엘의 예언은 수 세기가 흘러 재탄생합니다. 마태복음이 들려준 임마누엘의 예언은 요셉의 꿈속에서 시작됩니다. 이 이야기는 시작부터 위태롭습니다. 요셉은 약혼자 마리아가 같이 살기도 전에 아이를 가진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어서, 약혼자에게 부끄러움을 주지 않으려고, 가만히 파혼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조용한 파혼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그의 계획은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대신, 꿈에 나타난 천사의 말로 인해 요셉은 더 큰 고민을 안게 되었습니다. 천사는 요셉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라고, 태중의 아이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장차 자기 백성을 구원할 사람이 될 것이라고, 무엇보다 이 모든 일이 이사야 예언자가 일러준 임마누엘의 사건이라고 얘기해줍니다.

요셉은 이 예언을 어떻게 들었을까요? 물론 현대인과 같은 사고를 하지는 않았겠지만, 그 역시 큰 고민에 빠졌을 것입니다. 자신의 삶이 엉망이 된 상황에서 무언가를 선택하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선택하려고 했던 조용한 파혼은 당시 관습에 비춰보면 너그러운 태도이겠지만, 사실 그것은 자기만 문제에서 벗어나겠다는 자기중심적인 해결책이었습니다.

그런데 천사의 말을 듣게 된 요셉은, 자신의 발을 뺀다고 문제가 해소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직감했습니다. 그는 자기 세계 속으로 거대한 사건이 밀려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생각을 접고, 천사가 말한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고, 아들이 태어나자 그 이름을 예수라고 짓습니다. 그를 통해서 임마누엘의 예언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아하스와는 달리 요셉은 예언의 목소리를 분별하고 깨달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진정으로 지키는 길은 자기 에고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삶의 고귀함을 하늘의 부르심에서 찾았던 것입니다. 자신의 가장 깊은 열망을 하늘의 부르심 속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요셉의 이 모습은 숱한 아이러니와 모순으로 얽힌 세계 속에서도 고상함을 잃지 않는 인간의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자신의 궁극적인 답을 자신을 넘어서는 부르심 속에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정신적 위기가 깊었을 때 그 위기를 넘어설 가능성을 이 부르심에서 찾습니다.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 헌장을 보면, 이런 문구가 나옵니다.

인간은 양심의 깊은 곳에서 법을 발견한다. 이 법은 인간이 자신에게 부여한 법이 아니라 오로지 인간이 거기에 복종하여야 할 법이다. 그 소리는 선을 사랑하고 악을 피하도록 부른다. 이 법에 복종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존엄이며 이 법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다. 양심은 인간의 가장 은밀한 핵심이며 지성소이다. 거기에서 인간은 홀로 하느님과 함께 있고 그 깊은 곳에서 하느님의 소리를 듣는다.” (바티칸 공의회,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 1부 인간의 소명과 교회, 16. 도덕적 양심과 존엄)

 

[임마누엘의 은총으로 부르시는 하나님 / 로마서 11~7]

그렇다면, 대림절의 주제 임마누엘의 이야기는 단지 하늘에서 내려오는 사건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심으로 초대하는 이야기라는 점을 알게 됩니다. 임마누엘의 사건은 자기를 둘러싼 경험세계에 대한 분별만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들려오는 부르심, ‘우리를 운명으로 부르는 내적 목소리에 귀 기울일 때 깨달을 수 있다는 말이겠습니다.

바울이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 서두에 반복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부르심’(κλητός, called)을 받았다는 표현입니다. 그는 이 편지를 시작하면서,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나 바울은 부르심을 받아 사도가 되었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어서 여러분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6절과 7)

임마누엘의 은총을 베푸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기독교 영성가 토마스 머튼은 구원의 길을 찾는 것은 보이지 않는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말합니다. 부르심을 듣는 것이 대림절을 지나는 우리의 과제입니다.

우리의 내면에는 여러 목소리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어두운 상처가 뱉어내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신앙의 분별이 필요합니다. 부르심이란 단지 개인의 의식 안에서 이루어지는 심리적 게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고통의 세상에서 주어지는 것으로서, 자신과 세상이 어떻게 만나고 있는지를 깨닫는 가운데 들려옵니다. 참된 부르심을 식별하기 위해서는 내적인 경청과 외적인 경험이 모두 필요합니다. 세상의 고통에 대한 마음의 응답이 이루어지는 곳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이 들려옵니다.

바울의 편지 3절과 4절에는 초대 교회가 경험한 임마누엘의 그리스도에 관한 고백이 나옵니다. 육신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났으며, 성령으로는 죽은 이들 가운데 부활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다는 고백입니다. 이는 두 차원의 세계를 동시에 경험한 사람들의 고백입니다. 질곡의 세상에서 맺어진 인연과 하늘의 부르심을 따라 산 믿음이 함께 어우러진 삶을 산 사람들이 깨달은 임마누엘의 비밀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의 세계는 하나님과 세계가 함께하는 공동체의 모습을 띱니다. 따라서 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이 세상의 목표이지만, 그 삶은 늘 양면적입니다. 공동체의 삶이란 환대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환멸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선의까지 이기심으로 흡수해버리는 관계를 견디지 않으면 공동체는 세워지지 않습니다. 우리 세계는 여전히 그 고통을 견디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얻기 위해 갈망합니다.

그리스도의 강림, 임마누엘의 은총은 고통의 역사에 존재하는 영원한 가능성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가능성은 현실에 감추어진 비밀입니다. 임마누엘의 믿음은 거룩한 탄생을 기다리는 삶에서 솟아나는 위대한 진실입니다. 인간 삶의 모든 불완전과 불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 땅에 오신다는 믿음이 그것입니다. 이 믿음을 가질 때, 이 세상의 온갖 절망 속에서도 용기와 확신과 고요함이 우리를 비켜 가지 않을 것입니다. 성탄을 기다리는 우리 모두의 마음에 임마누엘의 은총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침묵으로 기도합시다.

 

[파송사]

성탄이 다가옵니다. 성탄은 고통과 슬픔으로 얼룩진 세상으로 오시는 임마누엘의 은총입니다. 이 임마누엘의 비밀은 깨달은 마음에 주어진 하늘의 선물입니다. 고통 속에서도 진실 하십시오. 슬픔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마십시오.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의 자비로움을 잊지 마십시오. 임마누엘의 믿음에서 솟아나는 용기와 확신으로 우리 모두 진리의 길을 고요히 걸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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