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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평화의 길은 어디에 | 김희헌 | 2022-11-13

by 김희헌 posted Nov 13, 2022 Views 155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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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2-11-13

평화의 길은 어디에 (65:17-25 살후 3:6-13, 21:5-19)

2022.11.13. 창조절 열한 번째 주일, 전태일 추모주일

 

오늘은 <전태일 추모주일>입니다. 전태일은 청계6가 평화시장에서 재단사로 일하던 청년 노동자였습니다. 1948년에 태어난 그는 23살인 19701113, 일터 앞에서 자기 몸에 불을 붙여 우리 사회의 열악한 노동 현실을 알렸습니다.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52년이 흐른 오늘, 우리가 그를 추모하는 것은 그가 마지막 순간에 외친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는 부르짖음에 대한 응답 때문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의 삶을 통해서, 인간의 의미와 신앙의 가치와 역사의 진실을 보게 됩니다. 그는 가난이 주는 두려움을 사랑으로 이긴 인간의 참모습을, 하나님 앞에 선 기독 청년의 몸부림치는 믿음을, 불의에 잠긴 역사의 어둠을 밝힌 불꽃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가 그를 추모하는 것은 그 사랑과 믿음과 진리를 이어가려는 마음 때문입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제도는 보완되었고, 삶은 풍요로워졌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여전히 시대의 불행과 어둠을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많은 성취와 번영을 이루어왔음에도, 그 업적 속에 파국의 징조가 있음을 느끼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공할수록 인간의 삶에서 멀어지고, 올라갈수록 믿음의 길에서 멀어지며, 번성할수록 시대의 요청에서 멀어지는 것을 느낍니다. 우리는 지금 무언가 어긋난 목표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매주 토요일 남대문에서 일어난 촛불이 점점 커지는 듯합니다. 통쾌한 실험 한번 없이 변죽만 울리며 끝난 문재인 정부, ‘자유를 남발하면서 노골적으로 시대를 역행하는 정책을 서슴없이 진행하는 현 정부에 대한 누적된 분노 때문일 것입니다. 이번 촛불이 6년 전의 촛불과 다른 모습으로 더욱 근원적인 시대적 과제를 완수할 것인지는 두고 봐야겠습니다만, 우선은 현 정부의 기만적인 정치라도 벗겨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오십 년 전 전태일 열사가 몸으로 던진 과제는 오늘날 더욱 다양한 삶의 문제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치지 않는 코로나 팬데믹과 심각해진 기후위기, 전쟁으로 인한 파괴와 죽음, 기아와 물 부족으로 인한 난민들, 금리와 물가상승으로 인해 커지는 삶의 불안정성, 일상이 된 재난, 정치를 악화시키는 뻔뻔한 극우주의, 제도화된 혐오와 갈등, 이제 평화의 길을 내는 일은 더욱 근원적인 변화를 통해서만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려는 공동체적인 노력이 없으면, 이 총체적 재난의 시대를 지나기가 참으로 어렵게 되었습니다. 개인의 삶도 물질적인 풍요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깊이와 영적인 의미를 지닌 삶으로 가꾸지 않으면, 평화의 길을 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전태일을 오늘 다시 그려보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하겠습니다. 평화시장 낮은 곳에서, 정의를 사랑에 담아서 인간의 길을 열어간 그의 믿음과 진실을 되새겨보는 것입니다.

 

[재난의 시대에 지켜야 할 것 / 누가복음 215~19]

누가복음 본문은 화려한 겉모습 뒤에 감추어진 위기와 재난의 징조에 관한 이야기로서, 예루살렘의 멸망, 파국의 시간을 지날 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예수시대 예루살렘 성전은 헤롯왕이 지은 거대한 건물이었습니다. 그는 이방인 출신으로서 민심을 얻고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이전보다 두 배나 되는 성전을 지었습니다. 건물을 짓고 나서도, 뜰을 확장하고 장식물로 치장하는 공사를 예수 시대까지 수십 년째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본 몇몇 사람이 아름답다고 감탄하면서 본문은 시작합니다.

그런데, 복음서는 예수의 입을 통해 성전의 붕괴를 말합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이것들이, 돌 한 개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날이 올 것이다.” 이 성전파괴 예언은 단지 종교시설의 붕괴만이 아니라, 체제의 몰락이요 삶을 구성하는 사회적 기반의 붕괴를 의미했습니다. 본문은 왜 성전이 무너져야 하는지 그 이유를 말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 체제의 도덕적인 타락과 영적인 추락이 너무도 자명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야기는 제자들의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만일 그런 파국적인 일이 벌어진다면 언제 무슨 징조와 함께 나타나느냐는 물음이었습니다. 예수의 대답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외부적인 징조요, 다른 하나는 내부적인 고통과 갈등입니다.

외부적인 징조로는 먼저, 자칭 메시아가 등장하는 현상입니다.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표방하는 사람들이 등장하여 때가 가까이 왔다고 외칠 때, 그들을 따라가지 말라고 말합니다. 왜일까요? 그들이 거짓 예언자이기 때문일까요?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4년부터 유대 전쟁이 끝난 70년까지 유대 사회에 등장한 혁명 지도자는 수십 명에 이릅니다. 이들과 함께 일어난 민중들은 모두 처참하게 처형되고 살육당했습니다. 누가복음 공동체는 위기의 시대에 구할 해답을 거기서 찾지 않은 것 같습니다.

위기의 시대는 이런 사회적 난국만이 아니라, 나라와 민족의 전쟁, 기근과 역병, 지진과 재해 등 총체적인 파국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이런 외부적인 징조만으로는 재난의 시대가 가진 성격을 다 말할 수 없습니다.

본문은 이제 내부적인 고통과 갈등의 모습을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하늘의 뜻을 찾는 이들이 적대자들에게 고난과 박해를 당하는 상황입니다. 또한, 가족과 동지들로부터 갈등과 배신을 당하는 고통의 시간입니다. 이때 더러는 죽고, 예수의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이 비극의 시간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을 증언할 기회,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언어를 하늘로부터 얻는 시간이라고 성서는 말합니다. (13~15) 예수의 이름으로 미움과 모욕을 당하더라도,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신실한 사람들에게 성서가 말하는 일반적인 약속은 구원과 회복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길이 보이지 않을 때 하나님이 어떻게 길을 내시는지, 비통에 빠진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의 손길은 어떻게 펼쳐지는지를 말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총체적인 재난의 시대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다르게 말합니다. 그것은 마지막 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참고 견디는 가운데 너희의 목숨을 얻어라.예수의 말씀으로 표현된 이 구절은 아마도 누가복음 공동체의 다짐으로 보입니다.

파국을 맞은 비탄의 시대, 그 상실과 혼돈의 시대에 놓아야 할 그루터기로 누가 공동체가 증언하는 것은 목숨(psuché, soul)’을 얻는 것, 다시 말해 자기 영혼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난과 위기를 앞둔 사람들이 흔히 하는 선택은 영혼’(soul)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그런 태도를 가리켜, ‘내일은 죽을 것이니, 오늘은 먹고 마시자라는 말로 표현한 바 있습니다. 앗시리아 제국에 방어선이 뚫린 위기 속에 보인 유대 사람들의 모습을 언급한 것인데, 훗날 바울도 부활의 뜻을 간직하지 못한 사람들이 그런 삶의 태도를 가진다고 말합니다. (22:13, 고전 15:32) 그것은 위기와 재난의 시대를 감춘 가면의 문화에 영혼을 잃은 모습처럼 보입니다.

누가의 공동체에 들려온 예수의 목소리는 너희는 참고 견디는 가운데, 너희의 목숨을 얻어라!”였습니다. 물론, 이것이 누가 공동체가 들은 마지막 대답은 아닙니다. 성서를 이어서 보면, 누가가 발견한 진정한 해답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새로운 공동체, 예수의 부활 이후,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공동체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무절제에 관한 경고 / 데살로니가후서 36~13]

바울은 오늘 서신서 본문에서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 한 가지 경고를 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명령합니다. 무절제하게 살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을 따르지 않는 신도를 멀리하십시오.”

여기서 무절제한 삶이란 해석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본문에서 두 가지로 묘사됩니다. 8절에서는 일하지 않고 먹기만 하는게으름으로 표현되기고, 11절에서는 일은 하지 않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질서 없는 행위로 표현됩니다(11).

<표준새번역> 성서가 무절제로 번역하고, <개역개정> 성서가 게으름으로 번역한 부사 아탁토스’(ἀτάκτως)무질서한’(disorderly) 모습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그 단어는 게으름에 대한 질책이라기보다는 질서 없는 행위에 관한 문제를 말한다고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마십시오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낙심하지 않고 선한 일을 해나갈 수 있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낙심한 이유는 게으름보다는 무질서한 행위, 공동체의 문제는 열성의 부족이 아니라, 영성의 부재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찾을 것은 성실한 삶에 관한 프로테스탄트 윤리보다는, 영적으로 깨어있는 삶에 관한 교훈입니다.

제가 교회에 부임하여 안팎에서 간혹 들었던 말, 그래서 제 마음에 깊이 담겨 있는 우리 교회에 관한 평가가 있습니다. ‘향린교회는 신앙공동체이지 시민운동 단체가 아니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겠습니다만, 저에게는 그 말이 교회다움의 회복이라는 말로 이해되었습니다. 그것은 윤리적 행위 너머의 영적인 과제의 분별과 관계된 것이었습니다.

기독교 영성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도 불교 영성가 틱낫한 스님도 영성의 목표는 깨어있음’(mindfulness)에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깨어있는 마음에 두 가지 선물이 주어진다고 합니다. 하나는 관용(magnanimity)이요, 다른 하나는 평정심(equanimity)입니다. (브라이언 피어스, [깨어있음])

깨어있는 마음이란 수행자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이기도 하지만, 공동체의 활동 속에서도 드러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정의가 사랑에 싸이면 관용이 일어나며, 사랑이 평화에 담기면 평정심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공동체로서 정의와 평화가 입 맞추는 세상을 향해 행진할 때, 이 깨어있는 마음으로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파괴적인 근대문명을 넘어가는 공동체적 실천의 장이 되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저마다의 권리 투쟁으로 잘게 부서진 민주주의만으로는 결코 역사를 움직이는 힘을 갖지 못합니다. 자기주장으로 구성된 이기적인 근대문명의 질곡을 돌파하려면, ‘정의와 평등에 관한 평면적 주장보다는 더 깊은 영적 경험과 더 두터운 영적 관계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게 됩니다.

신앙공동체 안에서는, 관계의 무게를 지고 언덕을 오르다 얼룩진 사랑이 말끔한 주장에 조롱당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자기주장을 권리처럼 사용하는 무절제로 인해 공동체가 사랑과 꿈의 언어를 잃게 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다시 모아 세운 희망의 예언 / 이사야서 6517~25]

이사야서 65장 본문은 포로 귀환 공동체에 들려준 제3이사야의 예언입니다. 본문에는 예언자의 창조적 상상력이 빛나는 세 가지 설명이 나옵니다. 첫째는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것이요 (17), 둘째는 자기가 지은 집에서 살고 자기가 기른 열매를 먹고 사는 평화로운 삶이요 (21), 셋째는 서로 해치거나 상하게 하는 일이 없는 이상적인 관계입니다. (25)

당시 시대 상황을 고려하면, 뜻밖의 비전입니다. 귀환 공동체의 고된 삶과 비참한 현실, 서로 다른 이해관계로 갈라진 관계, 포로 생활에서 켜켜이 쌓인 분노와 회한, 무엇으로 그들을 위로하고 치유할 수 있을까요? 이런 복합적인 현실에서 어떤 말로 귀환공동체를 다시 세울 수 있을까요?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역사에 주어진 계시로 보고 예언을 전합니다. 그의 비전은 자신의 상상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에서 생겨났습니다. 비전을 잃은 사람, 뜻을 잃은 세계에 가장 필요한 것은 하늘의 음성,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은 과학의 언어와는 다릅니다. 과학의 언어는 무언가를 분명하게 묘사하는’(descriptive) 언어인데, 예언의 언어는 표현 불가능한 의미를 지시하는’(indicative)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묘사하는 언어가 알고 있는 의미를 떠올리게 해주는 것이라면, 지시하는 언어는 우리가 이전에 갖지 못한 의미로 안내하는 언어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서의 언어는 부르심에 응답하게 하려는 것이요, 하나님의 창조 현실로 호출하려는 것입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할 때 성서의 말씀은 비로소 이해됩니다.

성경이 묻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질문에 답하는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유대인 철학자 아브라함 헤셸은 그 이유를 가리켜, 현대인이 자신에게만 집중하여 세계의 깊은 연관 관계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근대를 살아온 인류는 모든 것이 분리되어 있다는 세계관을 갖고 있습니다. 돌과 풀도, 하나님과 인간도 서로 분리되어 있다는 세계관에 갇혀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거리는 태양과 지구별 어느 작은 산기슭의 한 포기 풀 사이의 우주적 거리와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헤셸은 반문합니다. 태양이 자신의 따스함으로 식물에 영향을 주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어째서 하나님의 영이 인간의 마음에 미친다는 사실을 무턱대고 배제할 수 있겠느냐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의 믿음을 다음과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시내산에서 우리를 압도하신 뒤로 우리는 한 번도 그 이전과 똑같았던 적이 없다.” ([사람을 찾는 하느님], 209)

 

오늘 우리 시대는 평화의 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다시 찾고 있습니다. 그것은 과거의 기억에서 소환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분투 속에서 새롭게 지어지는 것입니다. 지난 2주간 우리는 창립 70주년을 맞는 우리의 표어를 세우기 위해 마음을 모아 왔습니다. 마지막에 선정된 주제는 작은 믿음 다시 모아 새로 심는 향린 70”입니다.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출 때까지 향기로운 이웃이 되어 살아가는 모든 선한 발걸음에 주님께서 함께해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침묵으로 기도합시다.

 

[파송사]

낮은 곳에서 하늘의 부르심을 듣는 선한 삶을 살아갑시다. 정의에 사랑을 심고, 사랑을 평화에 담는 깨어있는 삶을 추구합시다. 재난이 일상이 된 시대에도 낙심하지 않고 선한 발걸음을 옮기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평화의 아침을 여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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