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하늘뜻펴기

살아 있는 자들의 하나님 ㅣ 김지목 ㅣ 2022-11-06

by 김지목 posted Nov 06, 2022 Views 170 Replies 0
Extra Form
날짜 2022-11-06

20221106 향린주일 창조절10

 

살아있는 자들의 하나님

1:5b-2:9 살후2:1-5,13-17 20:27-38

 

이스라엘은 이집트 탈출 후 가나안 땅에 정착하고 다윗과 솔로몬 시대를 지나면서 예루살렘 성전을 세우고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분열되고, 주전 752년에 북이스라엘이 북쪽의 신흥강국 앗시리아 제국에 의해 멸망합니다. 한편 남유다는 남쪽 강대국 이집트의 방패 노릇하며 존속하는 듯했으나, 앗시리아를 멸망시킨 바벨론이 이집트를 공략하는 과정에서 남유다, 난공불락이라 여겨졌던 산 위의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이스라엘을 포로로 끌어갑니다. 이때가 주전 586년이었습니다. 바벨론이 서남쪽 이집트 공격으로 소진했을 때를 틈타 바벨론 동쪽에서 페르시아가 들어와 주전 559년에 바벨론을 멸망시킵니다. 바벨론을 정복한 페르시아의 고레스는 서남쪽 강대국 이집트를 견제하기 위해서 포로로 잡혀있던 이스라엘을 본국으로 귀환시키는 칙령을 내립니다. 이집트의 북진을 완충시키려는 전략으로, 고레스는 이스라엘 재건에 필요한 물자 지원을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고레스의 약속이 20년이 지나면서 고레스와 그의 아들 캄비세스가 죽게 됩니다. 페르시아는 내란과 폭동에 휩싸여 국력이 급격히 쇠퇴하고 이스라엘 재건에 필요한 물자 조달이 어려워졌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재건이 중단되었습니다. 이때가 페르시아 다리우스 왕의 제위 시기입니다. 민족의 부활을 기대했던 이스라엘은 그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직면하고 말았습니다. 이때 나타난 예언자가 학개입니다.

 

학개는, 남유다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기 전의 모습을 눈으로 간직하면서 오십여년의 포로생활을 겪은 노장 예언자였습니다. 민족재건의 열정이 차갑게 식어버린 동포들을 향하여, 지켜지지 않은 고레스의 약속이 아닌,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외치면서 재건을 추동하고 이스라엘의 1차 재건이 완성되도록 기여한 인물이 학개였습니다. 유다 총독 스룹바벨을 다독였고 이스라엘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설득했습니다. 열방이 시온으로 몰려들고 시온에서 공의의 빛이 퍼져나가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여전히 유효하다, 다만 그 약속이 성취되지 않은 이유는 성전이 건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레스가 파기한 물자 조달의 약속은 하나님의 섭리로 채워질 것이다, 이전보다 더 찬란한 성전이 예루살렘에 세워질 것이라고, 예언자 학개는 외쳤습니다.

 

학개의 예언은 하나님의 신실하심, 곧 하나님의 약속은 파기되지 않는다는 강력한 믿음에 기반합니다. 신앙의 굳건한 믿음은 미래의 영광을 끌어오는 힘을 생산합니다. 미술가가 상상한 것을 화폭에 그려내는 것처럼, 하나님나라를 오늘 여기에 선포하고 그 비전으로 오늘을 살게 하는 힘. 무기력한 이들이 그 힘을 내도록 가르치는 것이 모든 성서 예언자들의 목표입니다.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교 안에서 배우고 습득해야 할 신앙의 내용입니다. 신앙의 힘을 낼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께서 신실하시다는 믿음에서 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은 결코 파기되지 않는다는 믿음입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나라로 귀결된다는 믿음입니다. 칠흑 같은 어둠에 둘러싸여 있지만 결코 어둠은 촛불의 빛을 이길 수 없다는 믿음입니다. 학개는 돌 하나 남겨지지 않은 예루살렘 성전 터에서 이전보다 찬란히 우뚝 선 성전을 보았습니다. 믿음이 있는 자에게 비현실은 초현실입니다. 우리 공동체가 꿈꾸는 하나님나라의 초현실을 위하여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깊이 묵상합니다.

 

성서학자들은 데살로니가후서가 데살로니가전서와 내용적으로 연속적이지 않다고 분석합니다. 고린도교회에 보낸 사도 바울의 편지 고린도전후서와 다르게 데살로니가전후서는 후대 제자공동체가 사도 바울의 권위를 빌려서 집필했습니다. 권위있는 이름을 빌려 문서를 남겨놓는 것은 당시 유행하던 문학기법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행적은 우리가 제법 아는 바가 있어서 바울이 직접 기록한 서신의 배경이 어떠한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후대 제자공동체가 겪었던 상황을 알지 못하는 처지에서 데살로니가후서 내용의 전말을 전부 가늠하기 어려운 것이 실정입니다. 성서는, 성서가 기록된 당시의 상황과, 오늘날 해석하는 우리를 이어주는 주석이 필요한데, 엄밀하게 데살로니가후서는 주석적으로 취약한 점이 있습니다. 다만 바울서신으로서 사도 바울의 상황을 유추하여 본문을 이해합니다.

 

사도 바울이 선교하면서 직면하게 된 적대자들이 안팎으로 많았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요즘과 비교하여 당시는, 민중의 종교심을 이용하여 권력을 차지하기에 매우 용이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힘을 그리스도교의 온건한 사상을 고양시키고 교회를 세우는 데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혹세무민(惑世誣民)하면서 바울이 세운 교회공동체를 장악하려는 자들은 언제나 바울을 불안하게 했고 여러 편의 편지를 보내면서 오염된 공동체를 진정시켰습니다. 이들은 바울의 외부의 적대자들이었습니다. 바울에게는 내부의 적대자들도 있었으니, 이방선교를 방해하던 유대그리스도교의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유대중심주의로 권력을 수렴하려는 자들은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하고 교회에서 바울의 진정성을 파내려고 노력했습니다. 이같이 사도 바울이 안팎으로 대항하고 변호한 문서들이 초기 그리스도교의 근본을 정립하는 내용이 되었습니다. 오늘 데살로니가후서 본문을 이러한 사도 바울의 상황을 기본으로 하여 읽어봅니다.

 

오늘 데살로니가후서의 주요 논점은, 사도 바울을 사칭한 자들의 속임수에 걸려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라는 권면입니다. 이것은 오늘 제1성서 학개의 예언과 상통하는 메시지입니다. 믿음을 흔드는 요소가, 학개 예언서에서는 성전 재건 조달이 중단되는 절망이었다면, 데살로니가후서에서는 사칭하며 속이는 술수입니다. 그러나 두 본문 모두 강조하는 것은 신실함, 그에 기인하는 믿음을 굳건히 지키는 것입니다. 오늘 데살로니가후서는 우리의 믿음을 위하여 단호하게 결별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합니다. “헤어질 결심”(최근 한 영화의 제목). 믿음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생각, 습관, 생활을 조금씩 자꾸자꾸 덜어내는 신앙훈련의 과정을, 우리를 품어서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어머니’(칼빈), 교회공동체에서 찾아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의 적대자들처럼 예수를 속이려고 모세를 사칭한 자들이 오늘의 누가복음서에 등장합니다. 사두개파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바리새파와 대립하던 산헤드린 종교회의의 한 종파인데 부활을 믿지 않고 율법(토라)의 문자적 의미에 집착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를 떠보려고 부활에 관한 질문을 합니다. 모세가 남겨준 율법에 형이 자식 없이 아내를 남기고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맞아들여 후대를 이어야 한다는 조항이 있습니다. 이것은 자식이 없는 과부를 가문에서 내쫓아서 재산 없이 죽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입법취지였습니다. 과부에게 후대의 자손을 낳게 하여 과부의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두개파는 이것을 부활논쟁의 근거로 삼아 질문합니다. 한 여인이 자식 없이 일곱 형제를 맞아들인 후 나중에 부활하면 그때 이 여인은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는 질문입니다. 예수는 이들의 의중을 파악하시고 두 개의 답변을 주십니다. 하나는 인간의 관계에 관한 답변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부활의 때에는 모두가 천사와 같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지금과 전혀 다른 인간관계가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부활을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사두개인에게 인간이 천사처럼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사실을 과연 어떻게 이해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누가복음서 본문 37절과 38절을 음미해보면, 부활은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으며 영생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예수는 사두개인이 그토록 신뢰하는 모세의 일화를 들어 부활과 영생을 설명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향하여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모세가 만난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함께하시고 그들과의 관계에서 를 보여주셨던 하나님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타지 않는 가시떨기나무 앞에서 모세 역시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낼 것임을 결단하는 외침이었습니다. 즉 예수는 사두개인에게, “하나님의 일으켜주심곧 부활이 없다면 어떻게 모세에게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이어지겠느냐, 하나님은 살아있는 사람들과 관계하신다, 모든 사람은 살아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고 답하시면서, 부활과 영생을 가르치십니다.

 

부활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두개인에게 죽음은 끝입니다. 그런 까닭에 죽지 않기 위해 자기만 생각합니다. 참사로 156명이 희생되더라도 사두개인에게는 무심한 일입니다. 대통령이 되었을지라도 사두개인은 남일에 사회적 책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책임을 지는 순간 자칫 일말의 손해를 볼 수도 있기 때문에 끝까지 파렴치로 일관합니다. ‘희생자사망자로 고쳐 씁니다. ‘참사가 아니고 사고라고 떠들어대는 이 시대의 사두개파가 참담할 따름입니다. 온 국민이 진정한 애도와 책임지는 사과를 원하지만 남탓으로 일관하면서 국민을 배신합니다. 왕놀이에 자족하는 무지몽매한 권력자 때문에 일순간 국격은 급락하고 국민은 수치스러움과 죄책감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살아 있는 자들의 하나님, 모세의 율법을 박제시키고 제 잇속만 사리는 사두개파의 무지와 죄악을 거절하고 심판하시는 말씀입니다. 윤석열 사두개파는 크게 착각하고 있지만, 민중은 역사 속에서 수많은 참사를 아프게 견디면서 고귀한 희생을 부활시켜 왔습니다. 모세 안에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살아 있었듯이, 이태원, 세월호, 구의역, 스텔라데이지호 등 참사의 수많은 희생자들이 우리 안에 살아 있습니다. 민중은 희생당하면서 온갖 불평등과 무지와 죄악을 세상에 드러내고, 부활하면서 스스로 윤리적 존재로,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거듭납니다. 하나님과 함께 민중은 죽음을 넘어 안전사회로, 하나님나라로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입니다. 이것은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예언자 학개와 같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이 결코 파기되지 않을 것임을 믿습니다.

 

 

 

 

 

< 1029일 이태원 참사 희생자를 위한 한국교회 공동기도 >

 

! 주님, 이 절망 앞에서 희망의 빛은 어디에 있습니까? ! 주님, 이 원통하고 억울한 상황에서 우리는 어디로 나아가야 합니까? 고통 받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고통을 가벼이 여기지 않으시고 부르짖는 이에게 응답해주시는 주님께 애끓는 마음으로 눈물 담아 호소합니다.

 

또다시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같이 손잡고 그 길을 내려오던 연인에게 작별인사도 고하지 못한 채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 이들의 다수가 10, 20대라니 우리는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결혼을 앞둔 사람, 정규직으로 전환된 사람, 친구를 만나기 위해 해외에서 찾아온 사람, 모처럼 가족들과 나들이 나온 사람, 한 부모 가정의 외동인 사람, 1029일 참사로 희생된 156명은 156가지 삶과 꿈을 안고 살아가던 이들입니다. 이 소중한 사람들이 순식간에 삶과 꿈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눈앞에서 벌어진,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망연자실했을 이들이 몸과 마음 곳곳에 큰 상처를 입고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아파합니다. 주님, 이들의 영혼을 당신 품에 고이 안아주시고 편안한 안식 누리게 하소서.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 말도 안 되는 참사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헤아릴 수 없는 절망에 빠진 이들을 위로해 주소서. 쏟아진 물처럼 퍼져 버리고 뼈마디가 모두 어그러진 사람들, 마음은 촛농처럼 녹아내리고 기력은 옹기처럼 말라버린 유가족들의 상실감과 아픔을 감히 누가 어루만져줄 수 있겠습니까! 주님, 위로의 영으로 상처투성이 마디마디마다 감싸 안아주소서.

 

생명의 하나님, 사람보다 돈을 우선시하며 생명의 존엄성을 지키는 일에 소홀한 우리 사회에서는 언제든, 누구든 희생자가 될 수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주님, 더 이상 소중한 이들을 이렇게 잃고 싶지 않습니다. 아니 잃을 수 없습니다.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할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남겨진 과제이자 소명임을 다시금 새깁니다. 당신의 부르신 뜻을 따라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는 세상을 이루기 위해 실천하는 우리들이 되게 하소서. 안전망에 큰 구멍이 뚫린 것이 여실히 드러난 만큼 진실을 규명하고, 재발방지를 위해 온 힘을 기울이게 하소서.

 

슬피 우는 자와 함께 우시는 하나님, 희생자 156명의 넋을 고이 안아주소서. 부상 입은 이들이 속히 치유되고 회복할 수 있도록 기운을 주소서. 의료진들을 비롯해 사고수습을 위해 애쓰는 이들에게 힘을 주소서. 마음이 무너져 내린 유가족들, 지인들, 연인들을 살펴주소서.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슬픔의 눈물 닦아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침묵으로 기도합시다.

 

 

........................

 

파송사

 

아무도 슬프지 않도록”(정호승)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아무도 슬프지 않도록

그대 잠들지 말아라

 

마음이 착하다는 것은

모든 것을 지닌 것보다 행복하고

행복은 언제나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곳에 있나니

 

차마 이 빈 손으로

그리운 이여

풀의 꽃으로 태어나

피의 꽃잎으로 잠드는 이여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그대 잠들지 말아라

아무도 슬프지 않도록.

 

 


List of Articles
날짜 제목
2023-02-26 예수의 광야시험 | 김희헌 | 2023-02-26
2023-02-19 날이 새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 한병철 | 2023-02-19
2023-02-12 종교와 믿음 | 김희헌 | 2023-02-12
2023-02-05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 김희헌 | 2023-02-05
2023-01-29 진정으로 옳은 길 ㅣ 김지목 ㅣ 2023-01-29
2023-01-22 어둠이 걷힐 날이 온다 | 김희헌 | 2023-01-22
2023-01-15 생명의 시대, 주의 사랑으로 구원하소서 | 이영미 | 2023-01-15
2023-01-08 주님의 의를 이루는 발자국 | 김희헌 | 2023-01-08
2023-01-01 작은 믿음 다시 모아 | 김희헌 | 2023-0101
2022-12-25 주님의 열심 | 김희헌 | 2022-12-25
2022-12-18 임마누엘, 꿈의 못자리 | 김희헌 | 2022-12-18
2022-12-11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 김희헌 | 2022-12-11
2022-11-27 깨어있어라! | 김희헌 | 2022-11-27
2022-11-20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거늘 ㅣ 이세우 ㅣ 2022-11-20
2022-11-13 평화의 길은 어디에 | 김희헌 | 2022-11-13
2022-11-06 살아 있는 자들의 하나님 ㅣ 김지목 ㅣ 2022-11-06
2022-10-30 삭개오의 회심 | 김희헌 | 2022-10-30
2022-10-23 소성리에서 던지는 질문 | 강형구 김희헌 | 2022-10-23
2022-10-16 역사의 예수를 찾아서 | 김희헌 | 2022-10-16
2022-10-09 일어나서 가라! | 김희헌 | 2022-10-09
2022-10-02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 김희헌 | 2022-10-02
2022-09-25 자족의 영성 | 김희헌 | 2022-09-25
2022-09-18 모두를 위한 구원 | 김희헌 | 2022-09-18
2022-09-11 지금은 교회가 세상에 무릎을 꿇어야 할 때 ㅣ 정경일 ㅣ 2022-09-11
2022-09-04 돌이킴 ㅣ 김지목 ㅣ 2022-09-04
2022-08-28 삶으로 드리는 제사 | 김희헌 | 2022-08-28
2022-08-21 시내산과 시온산, 그 너머로 | 김희헌 | 2022-08-21
2022-08-14 우리들의 울부짖음을 들으시는 하나님 ㅣ 신승민 ㅣ 20220-08-14
2022-08-07 믿음의 길 | 김희헌 | 2022-08-07
2022-07-31 끊임없이 새로워져서 ㅣ 김지목 ㅣ 2022-07-31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Next
/ 11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