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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역사의 예수를 찾아서 | 김희헌 | 2022-10-16

by 김희헌 posted Oct 16, 2022 Views 186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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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2-10-16

역사의 예수를 찾아서 (31:27~34, 딤후 3:114~4:5, 18:1~8)

2022.10.16. 창조절 일곱째 주일

 

[성서 본문, 세 가지 화두]

우리 교회에서 10월 이맘때에는 안병무의 유산을 생각하며 우리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습니다. 올해는 탄생 백 주년을 맞아 두 가지 행사가 준비되었습니다. 하나는 오늘 오후에 있을 기념강연회이고, 다른 하나는 내일 있을 학술대회입니다. 오늘 오후에는 김용옥 선생의 강연과 함께 성가대의 찬양, 목포 디아코니아자매회 언님들의 순서 등 따뜻한 회고의 시간도 있습니다. 교우들의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오늘 하늘뜻펴기는 주어진 성서 본문과 함께 안병무의 삶과 사상을 엮어보고자 합니다. 내일 학술대회에서 제가 기조 강연 형식의 글을 발표할 예정인데, 그 제목이 역사의 예수를 찾아서입니다. 오늘은 그 가운데 몇 가지를 성서 본문과 연결하여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성서 본문에서 몇 개의 화두를 뽑아볼까 합니다. 예레미야서는 포로기를 시작하는 위태로운 시기에 주어진 말씀입니다. 함께 읽은 33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언약을 세울 것이니, 나는 나의 율법을 그들의 가슴 속에 넣어 주며, 그들의 마음 판에 새겨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새롭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길이 두 가지였습니다. 율법으로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민족의 구성원이 되거나, 솔로몬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종교 질서에 참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민족이 멸망하고 성전이 파괴된 포로 상황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길은 새롭게 제시되어야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것을 가리켜, ‘마음속에 새겨진 새 언약이라고 말합니다.

디모데후서 본문은 성경의 중요성에 관한 가르침으로 시작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진리 안에 머무는 길을 성경이 주는 지혜에 있다고 말합니다. 성경의 지혜를 따르지 않으면,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이나 자기 욕심에 맞는 가르침에 빠지고 말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누가복음 18장 본문은 과부와 재판관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늘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한 과부가 재판관에게 자기 권리를 찾게 해달라고 요청에서 시작합니다. 재판관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는사람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과부의 거듭되는 하소연을 듣고 귀찮아서 들어줍니다. 예수께서는 이 과부의 모습을 옹호하면서, 그와 같은 믿음이 인자가 올 때 세상에서 찾아볼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이 성서 본문에서 세 가지 화두를 뽑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레미야가 제시한 새로운 언약이요, 둘째는 바울이 말한 성서의 진리에 관한 것이요, 셋째는 예수의 비유가 요구하는 믿음, 어떠한 상황에도 낙심하지 않고 지켜가는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안병무의 삶에서 이 세 가지가 어떻게 펼쳐졌는지를 찾아보는 것이 오늘 하늘뜻펴기 내용이 되겠습니다.

 

[새로운 언약을 향한 갈망, 고난의 시대에 울린 야성(野聲)]

안병무는 평신도 목회자이자 성서신학자요, 한국사회를 대표하는 실천적 지식인이었죠. 1922년에 태어나 이듬해에 간도로 이사하여 해방을 거기서 맞았으니, 청년이 될 때까지 일제강점기를 파란만장하게 살았습니다. 당시 간도에는 나라를 잃고 삶이 거덜 난 사람들이 삼백만 명이나 이주했다 합니다. 거기서 안병무도 민중들의 고난을 몸소 체험하였고, 훗날 그 경험을 가리켜서 뼈에 사무치게, 내 가슴에 응어리진 것이었다고 고백하지요. (민중신학 이야기, 18)

안병무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은 아버지 때문이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한의사라는 존경받는 직업을 갖고도 가정을 돌보지 않고 술과 첩에 빠졌기 때문에, 그것을 금지한 교회를 열심히 다니게 된 것입니다. 물론, 그것만은 아니었지요. 의협심이 강한 안병무가 학교에서 데모를 주동하다가 퇴학을 당하고 친척 집에 가 있었는데, 거기서 교회 십자가를 보고,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입니다. ‘남을 위해 대신 죽은 사람이 있었대라는 말을 듣고, 이상한 충격을 받아 자진해서 교회를 다니게 됩니다. 그때부터 예수를 향한 그의 끈질긴 모험이 시작됩니다.

일제강점기 조선 지식인은 울분과 고뇌를 풀 길을 두 가지 방향에서 찾았던 것 같습니다. 하나는 정치적 변혁의 길로 나간 사회주의 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기독교와 결합한 저항적 민족주의 흐름이었습니다. 안병무는 간도 명동촌을 중심으로 한 진보적 기독교의 길을 걷게 됩니다. 기독교 학교인 은진중학교에 진학하면서, 평생의 스승 김재준 목사를 만나고, 문익환, 강원용과 같은 선배들과 함께 더욱 신앙이 깊어집니다.

해방정국의 혼란과 한국전쟁으로 인한 갈등 상황에서 이념 대결은 점차 심해져서 사람들이 서로 적대 감정을 갖고 인정을 말살하는 일도 서슴없이 벌어졌습니다. 기독교 편에 있다 보니, 안병무는 체험적인 반공주의를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남하한 서북지역 출신의 보수 기독교가 이념 대결의 첨병이 되었던 것과는 달리, 간도 출신의 민족주의 기독교는 대결보다는 새로운 공동체를 실험하는 것에 더 관심을 두었습니다. 20대의 안병무 그러했습니다. 그는 이념 대결보다는 역사 속의 예수를 찾고자 하는 열정으로 신앙공동체를 실험하는 것에 몰두합니다.

이점을 강조해야 할 이유는 항간에 퍼진 낭설 때문입니다. 안병무가 해방정국에서 극우단체인 서북청년회부위원장으로 활동했다는 언론 보도가 몇 차례 있었는데, 이는 역사자료를 제대로 살피지 않은 기자의 오보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 시작은 19927<>기자가 서북청년회 2기 임원 명단에 안병무라는 사람이 있다고 보도했고, 이를 근거로 2014년에 <오마이뉴스>안병무의 숨은 이력이라는 부제로 서북청년회 부위원장에서 민중신학자로라는 기사(2014104)를 낸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서북청년단의 자료를 직접 확인해보니, 한자로 기록된 송병무’(宋秉武)라는 이름을 안병무로 오독(誤讀)한 치명적인 실수였다는 점이 밝혀졌습니다. (앞으로 그런 오해가 없도록 교우들이 잘 알려주기를 바랍니다.)

안병무가 추구한 예수는 증오의 화신이 아니라, 길을 잃은 역사에 빛을 던져주는 존재였습니다. 대결보다는 용서를, 갈등보다는 화해를, 개인의 생존보다는 공동체의 꿈을 불러일으키는 믿음의 토대였습니다. 예레미야가 새 언약을 갈망했듯이, 안병무는 예수를 갈망한 것입니다. 그것이 1947년 대학 동료들과 시작한 일신회운동과 일신교회목회로, 한국전쟁으로 뿔뿔이 흩어진 동료들과 함께 전주에서 시작한 잡지 [야성(野聲)] 발간 작업으로 나타났습니다. 서른 살 안병무는 마치 광야의 세례 요한처럼, 폐허가 된 세상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외친 것입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안병무가 남산 기슭에서 동지들과 신앙공동체를 만들고 힘쓴 것은 성서 묵상이었습니다. 그것을 예수이라는 이름으로 야성에 연재하는데, 거기 그려진 예수는 인간의 온갖 어리석음과 모든 실수를 덮고도 남는 위대한 용서의 빛입니다. 그는 예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빛, 그 빛을 역사 속에서 발견하고자 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이 실험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안병무는 그것을 가리켜 처절한 실패였다고 말합니다. 함께 공동체를 시작했지만, 각자의 삶의 경계는 분명했고, 하나씩 떠나기 시작한 유학으로 결국 혼자 남게 된 것입니다. 결국, 자신도 모든 것을 버리고 유학을 결심합니다. 그 마음에는 역사의 예수를 찾고자 하는 열정, 이 어둠과 고통의 역사 속에서 삶의 의미를 말해 줄 새 언약을 찾고야 말리라는 결심이 있었습니다.

 

[성서의 가르침을 찾아서, 민중을 발견하기까지]

1956년부터 65년까지 독일 유학 기간 10년은 거의 침묵의 시간이라고 할만합니다. 안병무는 30여 권의 책과 800여 편의 방대한 글을 쓴 사람인데, 이 기간에 쓴 것은 간헐적으로 유럽 사회와 교회를 소개한 7편뿐입니다. 그가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몰두한 것은 예수에 관한 탐구였습니다. 당시 성서신학 연구를 이끈 사람은 R. 불트만이라는 실존주의 신학자였는데, 그의 결론은 성서에 기록된 예수는 역사적 예수에 관한 사실이 아니라, 초대교회가 경배한 신앙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성서만으로는 예수에 관한 사실을 알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안병무는 10년 연구 끝에 답을 얻지 못하고 돌아온 것입니다. 하지만, 실존주의 신학으로부터 배운 바가 컸기 때문에, 그가 돌아와서 1969년에 창간한 월간지 이름이 [현존(現存)]입니다. 철학자 하이데거가 자신의 책 [존재와 시간]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룬 개념인 ‘Dasein’을 한국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dasein’이라는 말은 인간을 어떤 본질이나 가능성으로 해석하지 말고, 현실에 내 던져진 존재, 그저 그곳에(da) 있는(sein) 존재로 보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안병무에게 인간이란 그저 존재하는(exist)’ 것이 아니라, 믿음의 가능성에 기초한 존재였습니다. 따라서, 언어의 겉모습은 유럽의 실존주의를 본떴지만, 그 안의 물음은 다른 방향을 갖고 있었습니다. 안병무에게 현존이란 두 가지 관심을 담은 말이었습니다. 하나는 인간의 현존은 무엇이냐?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현존은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는 것입니다. 안병무는 이 두 물음을 밀고 가다가, 자신이 경험했던 민중을 접목해서 마침내 민중신학을 체계화해 내지요. 안병무의 고민이 무엇이었는지 살펴보지요.

먼저, 인간의 현존은 무엇이냐 하는 물음입니다. 안병무는 인간을 관계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로 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선 존재, 이웃과 관계에 선 존재입니다. 이것은 서구의 개인주의적인 인간관과 다릅니다. (안병무, “인간을 말한다: 불교와의 대화”, 현존5(196911), 36).

안병무에게 인간의 현존을 가장 잘 보여준 성서의 인물은 아브라함입니다. 그는 미래의 약속을 믿고 과거를 탈출하는 믿음을 상징합니다. 그의 탈출은 도피가 아니라 잃어버린 자기를 되찾기 위한 쟁취의 첫발입니다. 그 삶의 토대는 믿음입니다. 안병무는 아브라함이 어떤 완충지대를 만들기보다는 자기의 절망적 현실을 직시하면서, “발아래 놓인 영원히 뛰어넘을 수 없는 카오스에서 눈을 피하지 않고 대결할 수 있었던 것은 믿음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현존이란 믿음으로 구성되는데, 그 믿음이란 실존의 한계를 주저함이 없는 승인하는 동시에 그 앞에 절대 굴복하지 않으려는 결전의 교두보라고 말합니다. (안병무, “히브리적 인간상 아브라함”, [현존] 4(196910), 7)

따라서, 인간 현존은 죽음의 절망이 아니라 자유의 가능성이요, 그 현존은 과거로부터의 탈존과 미래를 향한 향존사이에 놓인 삶이요, 우리가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의 삶을 살아야 하며, 신앙공동체란 바로 -향의 공동체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개념은 196910월 [현존] 4히브리적 인간상 아브라함에 처음 나오며, 19901월 [살림] 14탈향(-)의 인간사(人間史)”에서 정립)

두 번째 물음, 하나님은 어떻게 현존하는가? 안병무에게 하나님의 현존이란 역사의 예수라고 할 수 있기에, ‘하나님의 현존에 관한 물음은 오늘의 예수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나?’ 하는 것이 됩니다. 안병무는 그 오늘의 예수수난과 해방의 현장에서 찾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뼈에 사무친 민중의 현실에 관한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자기 발을 우리 역사에 두었을 때, 스승 불트만의 실존주의 신학을 완전히 넘어서게 됩니다. 불트만은 성서에 기록된 예수는 역사적 예수가 아니라 신앙의 그리스도라고 보았는데, 안병무는 그 신앙의 그리스도이전에 역사적 예수의 사건이 있지 않았겠냐고 봅니다. 다시 말해서, ‘초대교회가 나중에 신앙으로 고백한 그리스도 사건이전에, ‘갈릴리 예수의 사건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갈릴래아의 예수, 10)

이런 발견과 주장은 서구신학과는 다른 것이었기에, 안병무는 1989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버클리연합신학교의 초청으로 한 학기를 강의하고, 그 노트를 [갈릴래아의 예수]라는 책으로 냅니다. 그 주장의 핵심은, 예수를 한 개인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사건속에서 보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를 사건으로 보면, 성서는 그 예수 사건을 전승하려는 사람들의 고백적 이야기가 됩니다. 여기서 안병무는, 예수 사건을 전승한 모체가 되는 사람들이 바로 예수 사건에 참여한 당시의 민중, ‘오클로스였다고 말합니다. (“예수사건의 전승모체”, 1984) 이렇게 보면, 성서가 단지 이천 년 전의 고대문헌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에서 새롭게 볼 수 있는 길이 열린다고 안병무는 말합니다. “수천 년 전 이방에서 일어난 민중 사건이 오늘 우리의 민중 사건으로 재연되고, 또한 오늘의 민중 사건이 그 시대 민중 사건의 현재적 사건으로 조명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민중과 성서, 3)

이렇게 해서 안병무의 민중신학이 완성되는데, 그의 신학은 한마디로 사건의 신학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사건의 신학은 그가 경험한 민중 사건에 관한 신학적 반성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일제강점기 간도로 모여든 민중들의 한()과 분노에 대한 그의 원초적인 경험,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착취와 수탈의 대상이 되었던 민중들, 특히 197011월 한 기독 청년이 자신의 몸에 불을 붙여 표현한 민중 현실의 고통과 비참, 그 충격으로 인한 신학적 성찰이 그의 민중신학을 지어낸 사건체험이었습니다.

안병무는 1976사건의 신학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바울의 고백(고후 11:23~33)을 풀어냅니다. 그 고백에 나오는 바울의 삶은, 믿음과 삶이 하나가 된 통전적인 삶입니다. 그것은 고난과 희망이 함께 얽혀 만들어내는 창조적인 삶이며, 수평적인 책임과 수직적인 신비가 교통하며 만들어내는 신앙, 외부적인 실천만이 아니라 내적인 거듭남을 동반하여 개인과 공동체가 함께 구원을 얻는 사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안병무의 사건의 신학은 역사에 참여하는 정치신학이면서, 동시에 신앙인을 위한 삶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낙심하지 않고 지켜가는 믿음, 생명 살림의 삶]

안병무가 1969년부터 월간으로 발행한 현존113호를 마지막으로 신군부에 의해서 1980년에 강제 폐간됩니다. 그리고 6월 항쟁 이후 88년에 재창간되는데, 안병무는 그 이름을 현존이라 하고 싶었으나, 새로 지어서 살림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예수 운동의 목표와 생명력을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창간사에서 안병무는 살림을 통해서 예수의 살림 운동이 우리의 생활 구석구석에서 일어나도록 전력을 기울이자.”고 말합니다. (“창간에 부쳐: ‘살림운동”, [살림], 창간호(198812), 3-5)

살림이란 단지 산다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죽임의 세력과의 투쟁을 포함합닏. 생명에 관한 담론에 그치지 않고, ‘생활을 생산해내는 것입니다. 문제는 누가 이 살림의 주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안병무는 그 주체를 민중이라고 말해왔는데, 실제로는 여태까지 민중은 OO라는 개념 규정을 피해왔습니다. 그런데, 살림을 말하면서, 비로소 이제까지 보류한 민중에 관한 개념을 말하게 됩니다.

그것은 1989년 미국에 초청을 받고 갈릴래아의 예수에 관한 강연을 한 후에 있던 사건 때문입니다. 이 강연은 평소 좋지 않은 심장때문에 위태로웠는데, 한 학기를 가까스로 마친 다음 7시간에 걸친 심장 수술을 받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안병무는 특이한 경험을 합니다. 마취된 몸과는 분리되어 그것을 지켜보는 또 하나의 자신을 경험하고, 거기서 소년 시절에 겪은 소생체험을 반복한 것입니다.

간도에서 지낼 때, 가난해서 중학교에 가지 못하고 작은 공장에서 조끼를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쌓인 눈길을 달리다가 짐을 실은 자전거와 함께 큰 구덩이에 빠져 얼어 죽을 위기에 놓였습니다. 정신을 잃어가던 그때, 자기를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 빨리 일어나 나와하는 음성을 듣고 살아난 것입니다. 이 체험을 57년 세월이 지나 미국에서 다시 하게 된 것입니다. 이 체험 이후에 안병무는 민중은 생명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에게 민중운동이란, ‘생명이 있는 삶을 생산해내는 운동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이 운동을 여러 방식으로 풀어왔습니다. 안병무가 살았던 시대는 오늘 우리 시대의 문제의식과 같지는 않지만, 그가 밀고 간 삶의 방식은 여전히 우리가 밀고 가야 할 과제에 빛을 던져줍니다. 안병무가 남긴 삶의 과제가 몇 가지로 남았습니다. 가부장 시대를 넘어가야 할 여성신학의 가르침으로, 분단시대를 극복해야 할 통일신학의 가르침으로, 자본주의 소비문명을 넘어서야 할 생태신학의 가르침으로 남아 있습니다.

물론, 안병무는 이 세 가지 과제에서 우리에게 완벽한 해답을 주었다기보다는 열린 질문을 던졌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역사의 예수를 끈질기게 좇아온 그의 삶이 그대로 증언하듯이, 생명을 살리는 살림의 삶은 오늘 우리에게 남아 있는 그의 가르침입니다. 그것은 고난 속에도 낙심하지 않고 생명을 밀고 가는 삶인데, 그것은 바울이 복음의 진전’(1:12)이라고 표현한 삶이기도 합니다. 안병무도 바울의 이 고백을 이어받아 자신의 사건의 신학이 태어났다고 고백합니다. (불티, 97)

역사의 예수를 좇아가는 믿음의 삶, ‘복음의 진전을 이루는데 필요한 생활양식은 비판적이면서도 창조적이어야 합니다. 삶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생활양식에 관한 비판적 성찰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비판만으로는 삶을 창조할 수 없습니다. 비판은 자신이 변하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쉬운 일이기에, 우리 현실에 비판이 넘쳐납니다. 그러나, 그것은 비판의 대상이 있어야만 생존하는 관념적인 삶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살림의 사건은 복음의 전진을 이루는 삶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생활을 생산하는 삶입니다. 그것이 안병무가 남긴 살림의 가르침입니다. 그것을 말해주는 글 한 대목을 읽으며 오늘 하늘뜻펴기를 마칩니다. 19919, [살림]34호에 실린 글로, 제목은 살림운동은 죽임의 세력과의 투쟁이다입니다.

예수의 사건이 민중의 사건이라면, 하느님은 민중으로 살림 운동의 현장에 온 것이다. 그렇다면 그 길은 예정됐다. 그것은 죽이는 자에게 죽임을 당하는 길이다. 지금까지 민중이 그랬던 것처럼. ‘그의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 [사는 삶은] ‘살림 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사는 삶이요], ‘죽임의 세력과의 투쟁을 위해’ [사는 삶이]라는 말이다. 그것은 언제나 우리 안에서[부터 시작하는] 싸움이라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침묵으로 기도합시다.

 

[파송사]

우리는 어둠의 시대를 밝힐 새 언약을 얻기 위해 온 삶을 밀고 간 안병무를 기억합니다. 그는 성서의 가르침을 따라 역사 속으로, 민중과 함께 살아갔습니다. 고난을 겪을 때도 낙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생명 살림의 운동을 펼친 그 삶의 교훈이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역사의 예수를 찾는이 신앙공동체의 운동을 힘차게 이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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