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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일어나서 가라! | 김희헌 | 2022-10-09

by 김희헌 posted Oct 09, 2022 Views 152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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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2-10-09

일어나서 가라! (29:1, 4~7, 딤후 2:8~15, 17:11~19)

2022.10.09. 창조절 여섯째 주일

 

[기후위기, 오늘의 묵시]

어느덧 가을이 깊어졌습니다. ‘천고마비의 계절이라는 목가적인 표현을 사용하곤 했는데, 언제까지 그런 표현을 사용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지난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에서 보낸 소책자가 도착했는데, 제목은 <한국교회 2050 탄소중립을 위한 생태교회 매뉴얼>입니다. 읽다 보니, 제 마음에 이 아름다운 가을이 다음 세대에도 지속할 수 있을까 하는 위기감이 생겼습니다. 책을 보지 않더라도 많은 사람이 기후문제의 심각성을 느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질적인 대처는 뒤처지고 있다는 불안감이 듭니다.

유엔이 기후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1988년에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 IPCC>를 설립하던 시기, 세계교회는 새로운 선교 방향을 제안합니다. 1990년 서울에서 열린 <JPIC 대회>에서 제안한 정의와 평화, 창조세계의 보전이라는 주제입니다. ‘정의와 평화는 전통적인 주제라 하겠는데, ‘생태문제가 새롭게 부각된 것이죠. 그리고 교회는 지난 30년 동안 이 문제에 관심해왔지만, 기후위기는 더욱 심각해졌습니다. 교회의 한계도 있지만, 세계체제 자체의 질곡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 IPCC>가 지구온난화에 관한 ‘1차 보고서’(1992)를 발간하고, 그 영향으로 <유엔 기후변화협약, UNFCCC>이 만들어졌습니다. (1992년 체결, 1994년 발효) 이 협약에 따라 매년 <당사국 총회, COP>를 통해 국제 협상이 진행됩니다. 그 과정에서, 온실가스를 의무적으로 감축하는 최초의 로드맵이 1997년에 만들어졌습니다. <교토 의정서>입니다. (2008~2012년까지 1990년 대비 평균 5.2%를 감축하는 안) 하지만, 기후문제는 해결되지 못했습니다. 참여한 국가가 37개국에 불과했고 기후 정의문제에 관한 계획이 미비했던 이유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소비 자본주의로 구축된 세계질서를 바꾸지 못한 한계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이 온실가스 배출문제의 책임이 가장 큰 미국이 도리어 탈퇴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2020년에 만료될 <교토 의정서>를 대신할 합의가 필요하여 제정되었는데, 현재까지 가장 중요한 합의는 2015년 195개국이 참여한 <당사국 총회, COP21)에서 만들어진 <파리 기후변화 협정>입니다. 하지만, 법적 구속력을 가진 <교토 의정서>와는 달리, <파리 협정>은 각 국가가 자발적으로 기여하는 방식(Nationally Determined Contribution, NDC)입니다. 참여한 나라 모두 의무적으로 감축 계획안을 제출해야 하지만, 얼마만큼 줄일 것인지 목표를 정하는 것은 자율적으로 하는 방식입니다. 그렇게 각국이 제출한 계획안을 종합해보면, 지구 평균 상승 온도가 3~4에 이를 수 있다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이는 파국에 이를 수밖에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래서, 2018년 인천 송도에서 모여 발표한 <IPCC 1.5특별보고서>가 나오게 됩니다. 심각해진 지구 평균기온 상승을 산업화 이전 시대와 비교하여 1.5로 막아야 한다는 제안이었습니다. 그리고, 2021<IPCC 6차 보고서>에 따르면, 지구의 기온 상승이 1.1에 이르렀다고 하지요. 앞으로 주어진 시간은 69개월밖에 남지 않았다고 탄소시계는 말합니다. (https://www.mcc-berlin.net/en/research/co2-budget.html)

문제는 기후위기가 단지 환경문제만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늘날 발생하는 수많은 갈등과 전쟁의 배후에는 기후위기가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20032월부터 7년간 아프리카 수단의 다르푸르지역에서 벌어진 내전은, 북부의 아랍계 이슬람 세력과 남부의 기독교계 흑인 반군 사이의 무력 충돌이었는데, 그것을 촉발한 것은 기후문제였습니다. 인종 분쟁과 종교분쟁으로 비화하여 결국 45만 명이 사망하고, 250만 명의 난민이 생겨난 이 처참한 사건은, 긴 가뭄과 땅의 사막화로 인해 북부 아랍계 유목민이 물을 찾아 남쪽으로 이동한 데서 비롯됩니다. 정치적으로 억압을 받던 남부 농업지역의 흑인 부족들은 그것을 침략으로 여기고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정치와 종교의 갈등이 중첩된 사회에서 기후문제는 전쟁의 도화선이 됩니다. 현재까지 10년째 계속되고 있는 시리아 내전도 그러합니다. 그 시작은 2011비옥한 초승달 지역이라 불리던 시리아가 사상 최악의 가뭄을 맞으면서부터입니다. 생계를 위해 도시로 몰려든 농촌 주민과 그들의 생활고를 해결해주기보다는 격리와 탄압으로 일관한 정권 사이에 격돌이 벌어진 것입니다. 긴 전쟁으로 인해 30만 명이 죽고, 700만 명이 난민으로 지중해와 유럽을 떠돌고 있습니다.

국제사회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유럽에서는 언젠가부터 기후변화를 주제로 하는 과학 컨퍼런스에 군인들이 참가한다는 소식입니다. 왜냐하면, 기후위기로 생겨나는 난민 문제를 국가안보의 핵심사안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2015년 알래스카에서 열린 북극 외교장관 회의에서 미 국무장관 존 캐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유럽이 씨름하는 난민 사태가 극단주의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 생각을 잠깐 보류하고 이것부터 생각해 봅시다. 물도 식량도 없이 오로지 생존을 위해 한 부족이 다른 부족과 싸우면, 그 지역에 어떤 상황이 벌어지겠습니까?” (한재각, [기후정의], 21) 이렇게 말한 미국은 난민 문제를 봉쇄정책으로만 해결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를 들어, 유럽 국가들이 2030년 안에 석탄발전소를 모두 폐쇄하겠다고 발표한 상황에 한국정부는 2034년에도 37기의 석탄발전소를 가동하겠다고 오히려 6개를 더 짓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폐쇄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을 우려한 석탄발전소 노동자들은 반대할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환경을 보호하지 않으면 내일 죽지만, 일자리를 잃으면 오늘 죽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기후위기 문제는 사회적 불평등과 깊이 얽혀있어서, 해결책을 마련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으면, 사회적 위기를 기회로 삼아 자본을 축적하려는 재난 자본주의가 판을 칠 가능성이 커집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적 불평등을 함께 해소하는 정의로운 전환을 이루는 것인데, 우리 사회는 기후 정의문제를 풀어가는 일을 아직 준비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기후위기 속에서도 여전히 상대적으로 혜택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해마다 저위도 지역의 개발도상국 주민은 20명 중 1명이 기후재난으로 피해를 보지만, OECD 국가의 피해자는 1,500명 중 1명뿐입니다. ([기후정의], 24-25) 온실가스의 70%를 배출하고 있는 선진국의 태만으로 인해, 온실가스를 겨우 3% 배출하는 개발도상국의 10억 명은 위기에 처합니다. 오늘의 이런 기후 불평등은 환경 제국주의의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현재 속도로 보면, 1.5목표는 이미 어렵게 된 것은 아닐까 하는 회의감이 드는데요. 앞으로 더욱 심각하게 닥칠 기후위기의 현실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포로 생활과 우리 시대의 아포칼립스 / 예레미야서 291, 4~7]

예레미야는 포로기의 첫 번째 예언자입니다. 그의 예언활동은 거짓 예언자들과의 투쟁이었는데 (14:13~15, 23:16~22), 거짓 예언의 특징은 현실을 낙관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 앞 장인 28장이 그 대표적인 내용입니다. 하나냐는 포로 생활이 길지 않으니 2년만 참으면 다시 삶이 회복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28:3) 그러나,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지 않은 백성은 멸망을 피할 수 없다고, 남은 일은 포로 생활을 감내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미 끌려간 포로들에게 보낸 예레미야의 편지입니다. 그는 포로가 된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살아가라고 합니다. 포로 생활에 정착하여 집을 짓고, 정원을 만들고, 그곳에서 나는 열매를 먹으며, 혼인하여 자손들을 낳고 살라.’고 합니다. 심지어, 적들의 평안을 위해서 기도하라고까지 말합니다.

이런 말을 한 예레미야는 바빌론 제국에 동조하는 매국노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하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37), 이집트로 끌려가는 고초를 겪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포로 생활을 감내하라고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해서는 어떤 대답도 만족스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어차피 그렇게 되었으니 정붙이고 사는 것이 낫지 않겠냐는 현실주의의 논리도, 고통을 참고 미래를 위해서 힘을 길러야 한다는 이상주의도 흡족한 대답은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뜻을 따라 살지 못하는 삶은 파국을 피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묵시의 현실에서도 생명의 길을 찾아보라는 말입니다.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간 6세기 유대인이 맞은 묵시록의 현실, 그 파국의 아포칼립스는 오늘 우리가 맞은 기후위기의 아포칼립스와 대비되는 것 같습니다. 묵시록이 가르치는 교훈처럼, 성서의 종말이 세상 자체의 종말이 아니라 제국의 지배질서이후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오늘 우리가 맞고 있는 이 파국적 현상에서 깨달아야 할 것은 소비 자본주의 문명의 종말을 겨냥하고 생태 문명을 향해 나가야 할 과제가 아닐까요?

그러나 우리 사회는 자본주의 자체를 넘어서는 구상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앙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30대 초반 가장 생생한 공동체 실험을 했던 안병무도 교회 창립 3년 만에 회의감에 시달리며 다음과 말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배운 정도의 크리스트교는 자신을 초월할 만한 능력이 없다.” ([선천댁], 162)

그런데, 오늘날 기후위기가 깊어지면서 과감한 구상이 많이 나오고 있는 것은 다행입니다. 남미 국가들이 그 사례인데요. 2007년 뉴욕에서 열린 <유엔 기후위기> 연설에서, 볼리비아 대통령 에보 모랄레스는 지구와 인류의 종말을 초래할 적이 누구인지를 묻고, 발전만을 추구하는 자본주의가 인류 최악의 적이라고 말합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 이미 알고 있는 당연한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개신교회는 시작부터 자본주의와 함께 성장해왔는데, 이제 교회는 다시 개혁의 운명을 맞고 있습니다. 이 개혁을 올바로 하기 위해서는, 오늘 우리 사회가 맞고 있는 묵시록의 현실이 무엇인지를 근본적으로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종교개혁이 있다면, 그것은 녹색 개혁이어야 할 것입니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성서를 자기 말로 번역했듯이, 우리도 성서를 기후위기의 관점에서 새로 번역하고 해석하며, 녹색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힘을 쏟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사마리아인 / 누가복음 1711~19]

누가복음 17장에 나오는 이야기는 열 명의 나병 환자를 고쳐주신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복음서가 말하고자 하는 대목은 열 명이 입은 기적에 있지 않고, 돌아와서 감사한 마음을 전한 사마리아인에게 주어진 구원입니다. 모두가 회복되었지만, 구원을 받은 사람은 믿음을 가진 사람은 단 한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에 있는 어떤 마을 어귀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를 찾은 나병 환자들은 배제당한 자들의 게토(ghetto)’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고난의 땅에는 사마리아인과 갈릴리인이 함께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함께 자신의 소원을 가장 성서적인 기도에 담아 외칩니다. ‘엘레에손’(ἐλέησον), ‘불쌍히 여겨 주소서!’ 이 기도에 하늘의 은총이 내립니다. 몸이 치유된 것입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제사장에게 자기 몸을 보이려고 돌아간 아홉 사람이 아니라, 다시 예수를 찾아온 이방인입니다. 그는 자신이 병에서 낳았다고 해서, 다 끝난 게 아니라고 생각한 듯합니다. 그 과정에 도대체 무엇이 있었길래 그 놀라운 일이 가능했는지를 알고자 했습니다. 자신이 얻게 된 치유의 결과만이 아니라, 감사해야 할 은총의 손길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관심한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예수에게 돌아온 그 사마리아 사람에게 예수가 말합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했다. 일어나서 가라!

나병 환자는 그 시대의 천덕꾸러기입니다.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자기 마을에서 쫓겨난 사람들입니다. 우리 시대로 치면, 공동체의 울타리 밖을 불안하게 떠도는 기후난민일 수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 운 좋은 사람은 정착하여 불안한 삶의 여독을 풉니다. 하지만, 그것은 구원이 아니라, 자신을 배제한 시스템 속으로 편입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복음서가 주목한 그 사마리아인처럼, 모든 사건의 근원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믿음이 있기 전까지 구원은 오지 않습니다.

기후위기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생긴 아이디어 가운데, ‘기후부채’(climate debt)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번영을 위해 남에게 전가해온 짐을 의미합니다. 정확히 말해서, 지금까지 산업선진국이 대기 중에 배출하고 축적해 온 온실가스 배출량에 비례하여 개발도상국에 갚아야 할 부채의 크기를 의미합니다. 이 계산에 의하면 미국의 기후부채는 97천억 달러에 달합니다. 그다음은 독일, 영국 순입니다. ([기후정의], 39). 이렇게 보면,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말도 이제는 다른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 세계는 성장을 목표로 달려왔고, 여전히 성장 신화를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성장은 공유물인 지구 대기에 온실가스를 쏟아내며 얻은 결과이고, 누군가의 집을 물에 잠기게 하고, 누군가의 경작지를 사막으로 만들어 난민으로 떠돌게 만든 긴 연쇄작용 끝에 생긴 풍요입니다. 그 삶을 이어갈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체제를 도입해야 하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는 시점입니다. 과잉생산과 과잉소비, 과잉 폐기의 악순환을 멈추고, 믿음으로 일어나서 구원을 얻는 삶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고난 속의 믿음이 가능한 곳 / 디모데후서 28~15]

디모데후서 본문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주는 권면입니다. 바울은 구원이 임하는 삶이란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고난을 피할 수 없을 때도 좌절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 마지막에서 공동체를 위한 두 가지 지침을 줍니다. 하나는 부질없는 말다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유익이 없고 듣는 사람을 파멸에 이르게 할 뿐입니다. 다른 하나는 진리의 말씀을 따라 사는 일꾼이 되어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더욱 깊어질 기후위기 시대를 살려면, 더 따뜻한 세상을 준비해야 합니다. 현재와 같은 방식의 삶으로는 기후위기의 재앙보다 더 큰 사회적 아마겟돈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우리 사회는 돈의 노예로 너무 오래 시간을 살아오면서, 사랑과 정을 나누는 문화를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정치적인 대결로 풀어가고, 자기주장을 끝도 없이 해대는 자아도취를 자기실현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이 그리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역사의 현장에서는 광야의 바람처럼 살지만, 일상에서는 자비로운 마음으로 고요히 살아가는 사람이 그립습니다. 비판보다는 믿어주는 마음, 부족한 부분이 보이면 비난하기보다 조용히 채워주는 사람, 그렇게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위기 속에서도 함께 만들어가야 할 이 세상에서, 향기로운 이웃이 되고자 했던 우리 모두의 꿈도 꺾이지 않고 계속되기를 기원합니다. 침묵으로 기도합시다.

 

[파송사]

고통의 날에도 다시 해는 뜨고 꽃이 필 것이니, 믿음으로 일어나서 나아갑시다. 현실이 어두워도 삶은 지속합니다. 어둠 깊은 세계에도 선한 불꽃이 일고, 잠든 정의의 노래는 새롭게 일어날 것입니다.

희망의 길을 찾아가는 시작에는 믿음과 사랑이 있습니다. 어진 마음으로 열어가는 세상만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일 것입니다. 모두 힘을 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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