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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삶으로 드리는 제사 | 김희헌 | 2022-08-28

by 김희헌 posted Aug 28, 2022 Views 169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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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2-08-28

삶으로 드리는 제사 (2:4~13, 13:1~8,15~16, 14:1,7~14)

2022.08.28 성령강림절 열두 번째 주일, 교회교육주일

 

오늘은 교육부와 함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유치부부터 청소년들까지 들살이를 마치고, 가을의 길목에서 함께 예배드리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들살이에서 진행된 일을 영상으로 보면서, 우리 안에 생명력이 흐르는 공간이 있음을 확인합니다. 그렇게, 향기로운 이웃이 되고자 하는 신앙공동체의 활동이 있다는 것에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우리는 모두 아름다운 삶을 살고자 합니다. 그런데, 삶의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요? 예술이 아름답기 위해서는 창조적이어야 하듯이, 삶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고난과 역경의 여건을 이겨낸 사람에게서 인생의 빛나는 아름다움을 보게 됩니다.

고난과 역경 자체가 아름다운 것은 아니지요. 고난 속의 아름다움은 그 고난을 속량해가는 인간의 마음에 담겨있는데, 신앙인이 품을 수 있는 아름다움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 속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은 고난이 없는 삶이 아니라 고난을 이겨내는 것이요, 그것이 가능한 것은 고난 너머의 거룩한 뜻을 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 나라 역시 고난이 없는 행복한 온실은 아닐 것입니다. 어떤 철학자는 하나님 나라는 악으로부터 분리된 선의 나라가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겨가는 나라라고 말합니다. 황금으로 이루어진 풍요의 도시는 하나님 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의 웅장한 성전을 보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 ‘너희가 보고 있는 이것들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라고 합니다. (21:6) 그리고,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2:19) 그것은 자신만을 위한 성채를 만드는 삶이 아니라, 자기 삶에 하나님의 집을 세워가는 삶을 살라는 것,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삶으로 제사를 드리라는 말일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의 길도 있을 것입니다.

 

[삶의 자리, 고난과 창조 / 누가복음 141, 7~14]

누가복음 본문은 예수님이 바리사이파 사람과 식사할 때 생긴 일로서, 높은 자리에 오르려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두 가지 교훈입니다. 하나는 초대받은 사람에게 주는 말씀이요, 다른 하나는 초대하는 사람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에 관한 것입니다.

먼저, 초대받은 사람은 높은 자리에 앉지 말고 낮은 자리에 앉으라고 합니다.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곳은 낮은 자리요,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분별하는 자리도 낮은 자리입니다. 낮은 자리는 삶을 새롭게 지어내는 자리요, 하나님 나라를 향해 삶을 밀어갈 수 있는 자리입니다.

이어서, 잔치에 사람을 초대할 때는 그 잔치의 은혜를 갚을 수 없는 사람들을 초대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갚아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자신에게 갚을 수 없는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그것은 역사에 하늘의 은총을 심는 일이요, 하나님 나라를 지어가는 일입니다.

이 두 가지 교훈은 단순하면서도 의미심장합니다. 사람들이 높은 자리로 앉으려 하고, 부유한 사람을 초대하는 이유는 아마 두려움 때문일 것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생존의 두려움, 남들보다 뒤처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 마음에는 아직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한 삶의 두려움, 종교적으로는 자기 삶의 근원을 발견하지 못한 데에서 오는 두려움이 깔려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to want)을 얻어도 정작 자신에게 필요한 것(to need)을 갖추지 못하면, 삶에 평화가 없고 갈증은 계속됩니다.

예수께서 친구로 삼은 사람은 대부분 눈물 나는 인생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는 그들을 잔치의 자리로 부릅니다. 복음서에서 잔치는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말인데, 삶의 아픔이 깊은 곳에서 벌어진 하늘의 잔치가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파토스 / 예레미야서 24~13]

파멸의 위기 앞에 선 예레미야가 그러했습니다. 그는 나라가 패망해가는 위태로운 시기를 살아가면서, 하늘의 탄식을 듣습니다. 비극으로 흘러가는 운명 앞에서 비탄에 빠진 예언자가 먼저 들은 소리는 하나님의 탄식입니다. 그가 들은 목소리는 파토스(pathos) 가득한 하나님의 질문입니다. “너희의 조상이 나에게서 무슨 허물을 발견하였기에, 나에게서 멀리 떠나갔느냐?이렇게 세상의 어둠을 보면서 자신의 허물을 먼저 묻는 신이 도대체 어디 있을까요?

이것은 비극의 시대에 하나님을 경험한 예언자의 통찰을 보여줍니다. 예레미야가 본 시대의 비극은, ‘헛된 우상을 쫓아다니며, 결국 자신들이 허무하게 된사태입니다. 예레미야는 그것을 압도적인 사랑의 체험을 잃어버린 시대의 비극으로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출애굽의 감격과 광야의 체험을 잊고, 황량하고 죽음의 그림자 짙은 그 메마른 땅에서 조상들을 인도하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이제는 당신은 어디에 있느냐고 묻지도 않습니다. 제사장도 예언자도 하나님을 찾지 않으며, 율법을 말하는 자도 통치자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 범죄를 저지릅니다.

예레미야는 그 시대의 두 가지 죄악을 보았습니다. 하나는 생수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을 버린 것이요, 다른 하나는 물이 새는 웅덩이를 자기 샘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물이 더는 흐르지 않는 메마른 시대의 비탄을 하나님의 목소리에 담아 외칩니다.

파멸의 시대를 사는 그들이 다시 하나님을 향한 행진을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삶의 방패로 삼고 평화를 꿈꿀 수 있을까요? 예레미야 시대의 비극은 너무 깊어서, 하늘마저 길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가 외칩니다. “하늘아, 너도 놀라고 떨다가, 새파랗게 질려 버려라.”

하늘마저도 새파랗게 질려버린 시대의 비극 앞에서 예레미야는 무슨 꿈을 꿀 수 있을까요? 생의 그루터기마저 불타버린 듯한 절망이 깊을 때 희망의 가능성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마치 믿고 따르던 스승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버린 사태를 경험한 제자들의 처지와도 같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예수를 보고 조롱합니다. “아하! 성전을 헐고 3일 만에 짓겠다던 사람아!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너 자신이나 구원해 봐라!”하면서 스승을 향한 조롱이 사람들의 입술마다 걸려있는 때에 제자들은 어디에서 희망을 보았을까요?

복음서 기자 마가는 단 한 사람의 독백에 담아 상상하기 힘든 가능성을 표현합니다. 골고다 언덕의 비운이 깊었을 때, 로마 군인 백부장은 십자가 위에서 바들바들 떨며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혼자 말합니다. ‘이분이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백부장의 이 독백은 사실 복음서 기자 마가의 결론이었습니다. 그는 압도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바로 십자가에서 죽임당한 아들을 보는 아버지의 파토스에서 것입니다. 거기에서 생명의 물이 흘러나오고, 그 물을 마신 사람은 영원을 향해 걸어갑니다.

 

[신앙의 삶, 세속에서 거룩을 추구 / 히브리서 131~8, 15~16]

삶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눈앞의 이익이 아니라, ‘영원한 분을 향한 관심을 놓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현실에 대한 새로운 참여입니다. 참된 삶에 관한 거룩한 꿈을 갖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히브리서 본문은 그렇게 생수가 흐르는 삶에 대해 몇 가지로 말합니다. 그 삶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요, 나그네를 환대하고, 갇힌 사람을 기억하는 것이며, 음행하지 않고, 재물에 대한 집착을 버린 삶입니다. 그 삶을 사는 사람은 고백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도우시니, 내게 두려움이 없다. 누가 감히 내게 손댈 수 있으랴?”

불안한 우리 시대에도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히브리서는 그 길을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서 찾습니다. 그는 영원히 한결같은 분이시니, 그분을 그루터기로 삼은 삶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 삶에 대한 히브리서의 당부는 명료합니다. 선을 행할 때 낙심하지 마십시오. 가진 것을 나누어주는 것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이 삶이 히브리서가 증언하는 삶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관념적인 신앙은 강한 모습을 띠지만, 그 실상은 혼자 만들어놓은 심리적인 전능성에 기댄 미숙한 신앙입니다. 이런 관념적인 신앙은 현실에서는 배타적이며 위험합니다. 삶에서 멀어진 신앙은 사랑의 이름으로 편견을 심고, 정의의 이름으로 타인의 존엄과 미래를 망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삶으로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지금 여기서 다시 삶에 의미가 있도록 자신을 바꿔 갑니다. 흘러가는 대로 삶을 내버려 두지 않고, 참된 모습을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에게 이르고자 하는 삶이요, 오늘도 창조 활동을 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자신을 가담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어있다면, 고통과 역경에서도 신앙의 신비를 잃지 않을 것입니다.

성령강림절을 모두 지나고 새로운 창조절을 향해 나아갑니다. 우리 모두의 삶에 하나님의 새로운 은총이 임하기를 기원합니다.

잠시 침묵합시다.

 

[파송사]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사람의 삶에는 빛나는 아름다움이 새겨집니다. 선을 행할 때 낙심하지 마십시오. 가진 것을 나누어주는 것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우리를 새롭게 지어내는 하나님의 은총을 기억합시다. 그 은총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물을 마시며, 삶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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