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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시내산과 시온산, 그 너머로 | 김희헌 | 2022-08-21

by 김희헌 posted Aug 21, 2022 Views 226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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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2-08-21

시내산과 시온산, 그 너머로 (1:4~10, 12:18~29, 13:10~17)

2022.08.21 성령강림절 열한 번째 주일

 

[산을 넘어온 믿음의 발자국]

어제는 교회 수양관에서 새교우 강좌 마지막 일정으로 수련회를 했습니다. 세 분이 참석하셨으니 예전에 비해 적은 인원이지만,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 우리 교회에 입교하신 세 분을 기뻐하며, 저는 그 의미가 우리 공동체에 세 개의 작은 우주가 더해진 것으로 이해합니다. 자세한 소개는 조금 후 가입식 때 하겠습니다. 이분들을 통해서 우리 교회에 새로운 기운이 흘러오기를 기대합니다.

어제 수련회에서 신앙공동체의 삶에 관한 대화를 나누며, 저는 우리 교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했습니다. ‘향린교회는 보이지 않는 믿음의 기둥이 든든한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의 겉모습을 보면 사회적 실천이 강하고, 진보적인 신학이 명료하지만,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은 교회의 창립 정신부터 이어온 믿음의 기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영적 기둥은 단지 과거의 전통만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내는 교우들의 삶에 있다고 봅니다.

우리 교회 역시 인간 집단이 가진 한계로 인해 때로는 쓴 물이 쏟아져나옵니다. 그 오욕과 수치를 견딜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 진실한 믿음의 사람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개인의 삶도 집단의 삶도, 최고의 순간과 최악의 시간은 교차하며 역사의 능선을 오르내립니다. 절정의 시간은 길지 않고, 절망의 시간도 지나갑니다. 돌아보면, 좋았을 때도 힘들었을 때도 순간입니다. 문제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진실하게 살아가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부어주신 믿음을 살기 위해, 인간의 도리를 잃지 않고 지나온 흔적, 그것이 역사의 발자국으로 새겨진 삶은 복됩니다.

교회 건축이 본격화되면서, 구체적으로 준비해야 할 일이 많아졌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교회 뒤편 계단을 따라 순례길을 만드는 일입니다. 몇 차례 논의를 거치면서, 우리 교회가 지나온 발자국과 앞으로 나아갈 길을 8개의 장면으로 선정하여 1층부터 5층 위 옥상까지 순례길을 구성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모였습니다. 교우들께서는 무슨 내용이 담겨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그간 협의하여 뽑아낸 우리 공동체의 여덟 발자국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한국전쟁의 혼란 속에 세워진 창립 정신 (1층 입구)

둘째, 명동의 교회 정문 왼편 기둥 벽 기념 동판에 담긴 876월항쟁의 정신과 사회적 실천 (1층 뒷마당)

셋째, 홍근수 목사 구속과 한반도 화해통일의 꿈 (2층 예배당 오르는 길)

넷째, 전태일 사건에 조응한 안병무의 민중신학 (3층 안병무 도서관 옆)

다섯째, 분가 선교와 향린 공동체 운동

여섯째, 정관의 제정과 교회 민주화 작업 (사무실이 위치할 4층 외벽)

일곱째, 녹색교회 지정과 생태적 전환의 과제 (5층 식당 옆 계단)

여덟째, 새 하늘 새 땅을 위해 행진하는 공동체 (옥상)

이 여덟 발자국은 우리 교회의 성격과 비전을 알려주는 것으로서, 하나하나가 미지의 세계를 향해 첫발을 내디뎌서 삶과 믿음의 영토를 넓힌 활동입니다. 우리 공동체가 칠십 년을 이어온 역사에는 창립자를 비롯한 많은 신앙의 헌신이 있었습니다. 영광의 산을 하나 넘고 나면 고난의 골짜기도 있었습니다만, 시대가 부여한 또 다른 산을 넘어왔고, 앞으로도 그 믿음의 역사를 이어갈 것입니다.

 

[시내산과 시온산 / 12:18~29]

오늘 제2성서 본문 가운데 히브리서는 신앙공동체를 독려하고 권면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본문이 있는 12장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에 대해 말합니다. 그 역사적 배경이 되는 1세기 말, 예수 공동체의 운동은 구시대의 관습에 걸려 들어간 듯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옛 시대와 오늘의 시대를 비교하면서 믿음의 성찰을 요구합니다.

오늘 본문은 과거 신앙의 공동체가 가진 자랑스러운 상징을 두 개의 산으로 묘사합니다. 하나는 모세의 영광이 깃든 시내산이요, 다른 하나는 다윗의 영광이 세워진 시온산입니다. 시내산은 하나님의 율법을 받은 곳이요, 시온산은 왕조의 기틀을 다진 곳입니다.

1성서의 전통에서 우뚝 솟은 이 두 개의 산 가운데, 히브리서는 후대에 세워진 다윗의 시온산 전통을 따라서 자신의 신학을 전개합니다. 시내산이 율법에 기초한 심판의 옛 시대를 상징한다면, 시온산은 복음의 계보가 그리스도에게까지 이어진 은총의 새 시대를 상징한다고 본 것입니다.

이러한 히브리서의 시대 인식은 역사적 사실에 충실한 기억이라기보다는 신학적 강조를 위한 의도적인 구분인 것 같습니다. 시내산이 비록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장소요, 출애굽 백성이 하늘의 율법을 받은 곳이지만, 그 숭고한 장소에 대한 히브리서의 기억은 두려움입니다. 아무리 과거의 영광이 컸을지라도, 믿음으로 삶을 더 앞으로 밀고 나간 사람들에게 반추된 과거는 공포와 야만이 얼룩진 곳으로 기억됩니다.

반면, 히브리서에서 소환된 시온산은 아름다운 곳으로 묘사됩니다. 하나님의 도성이요, 하늘의 예루살렘이며, 새 언약을 연 그리스도의 시대에 합당한 곳으로 상징됩니다. 그가 이런 신학적 해석을 한 것은, 예수 운동이 3세대가량 흘러간 히브리서 공동체의 상황 즉, 계속되는 시련 속에서 힘을 잃어가는 사람들에게 그 시련의 의미를 더욱 큰 은총의 세계에서 깨닫도록 하려는 의도 때문으로 보입니다. 다시 말하여, 삶의 시련을 하나님의 훈련으로 이해하자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은 그것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수많은 증인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우리도 갖가지 무거운 짐과 얽매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을 참으면서 달려갑시다.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내다보고서,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이 분을 생각하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이 낙심하여 지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은총의 세계를 믿음으로 살아갈 공동체를 위한 권면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자신의 삶이 진행되는 곳을 시온산으로 표현했지만, 살아있는 신앙공동체는 늘 자기 시대에 주어진 또 다른 산을 넘어갑니다. 과거의 공동체가 시내산을 넘어 시온산에 이르렀듯이, 생동하는 공동체는 그 시온산마저 넘어갈 것입니다.

그 과정에 시련이 있습니다. 본문이 말하듯이, ‘땅뿐만 아니라 하늘까지 흔들리는사태도 경험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의미에 대해서 본문은 흔들리지 않는 것들이 남아 있게 하시려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27) 하나님은 태워 없애는 불이요, 그 불은 파멸이나 소멸이 아니라, 은총의 세계를 살아가는 공동체의 정화를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시편의 표현을 따르면, 주님은 네 젊음을 독수리처럼 늘 새롭게 해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103:5)

그렇다면, 히브리서 기자가 자기 시대의 시련을 은총의 세계를 향한 훈련으로 보았듯이, 오늘 우리는 시온산 너머로 날아가는 독수리와 같은 젊은 믿음을 그려야 할 것입니다.

 

[젊은 영혼, 예언자의 등장 방식 / 예레미야서 14~10]

1성서의 본문은 예언자를 부르는 소명기사에 관한 전형적인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부르시자, 예레미야는 그 일을 감당할 수 없다고 부인합니다. “주님, 저는 말을 잘 할 줄 모릅니다. 저는 아직 너무 어립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한 것은 예레미야만이 아니라, 모세도, 이사야도 그랬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설득을 4번이나 거절했고 (3:11~4:10), 이사야는 자기 입술이 부정함을 탄식하면서 죽게 되었다고 염려합니다. (6:5)

이렇게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자신의 부족함을 염려하며 물러설 때, 하나님은 이들을 향해 너는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라고 격려하면서, 그들을 시대의 일꾼으로 일으켜 세웁니다. (8) 이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사람을 세우시는 방식에 대해서 알려줍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일꾼을 세울 때는, 이미 준비된 자를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부름을 받은 사람을 당신이 직접 준비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저하는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이 말씀합니다. “똑똑히 보아라. 오늘 내가 뭇 민족들 위에 너를 세우고, 네가 그것을 뽑고 허물며, 멸망시키고 파괴하며, 다시 세우고 심게 하겠다.” (10)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예레미야는 시대를 꿰뚫는 환상을 보면서, 젊은 날의 고결한 이상과 하나님을 향한 모험의 열정, 그 투쟁의 상처가 얼마나 위대한 것을 심어가는지를 배우게 됩니다.

예레미야는 나라의 패망을 알리는 눈물의 예언자로서, 그의 예언은 민족의 참혹한 실패를 전하는 것이었지만, 그의 활동은 예언의 진실에 관한 영원한 증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를 통해서, 폭풍이 역사를 휩쓸고 갈 때, 거기에 하늘의 무늬가 새겨지는 것을 보게 되고, 죄악의 물결이 심신을 할퀴고 갈 때, 거기에 비로소 선한 경륜이 솟아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예레미야의 삶을 통해서, 자신의 비참을 감당하는 사람만이 진실한 자신을 지켜갈 수 있으며, 진보라는 것도 상처와 치욕에 대한 정직한 성찰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는 한 시절의 실패를 알렸지만, 거기에 하나님을 향한 뜻은 더욱 깊어가고, 살아남은 영혼에는 빛나는 진실이 머문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치유를 위한 담대한 발걸음 / 누가복음 1310~17]

누가복음서 본문은 두 개의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먼저 누가복음에만 있는 특수자료로 치유 이야기가 나온 다음, 복음서의 여러 곳에 나오는 안식일 논쟁이 이어집니다.

사정은 이렇습니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고 있을 때, 거기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허리가 굽어 있어서, 몸을 펼 수 없었습니다. 너무도 오랜 세월 시달려 이제는 자신도 병마에 익숙해졌고, 사람들도 그 상황에 익숙해서 누구도 그 불운한 운명에 관해 묻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때 예수는 솔선해서 그녀를 불러 고쳐 줍니다. 이름 없는 그 여인을 가리켜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복음서 전체에서 단 한 번 나오는 칭호입니다. 예수께서 여인에게 병에서 풀려났다고 선언하자, 그녀는 곧 허리를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역동적인 증언을 합니다.

문제는 그다음에 벌어졌습니다. 이 일을 본 회당장이 분개해서 말합니다. 예수의 활동이 안식일에 병을 고칠 수 없도록 규정한 안식일법을 위반한 행위였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의를 가장하여 인륜을 저버린 위선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는 그를 비판합니다. 자신들은 안식일에도 가축을 기르는 노동을 하면서도, 정작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여 있는 사람을 안식일에 풀어준다고 하여 문제 삼느냐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 말씀은, 율법을 유보하고서라도 인간의 도리를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도리를 모르는 정의의 주장은 탈선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권리 주장도, 정의와 진보의 외침도, 인간에 대한 예의와 도리를 모르면, 이겨도 지는 싸움입니다. 인간 자신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안식일법에 맞선 예수의 말씀을 들으며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였습니다. 예수를 반대하던 사람들은 부끄러워하였고, 가난한 민중들은 그것을 영광스러운 일로 알고 기뻐했습니다.

안식일법을 지키려고 열심이었던 사람들은 정작 필요한 일에서는 열심히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열심히 율법을 지키면서 진리에서 멀어졌고, 열심히 위로 올라가면서 하늘에서 멀어졌으며, 열심히 쌓아가며 삶의 도리에서는 더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모습은 마치 길을 잃고 혼란스러운 우리 시대의 자화상처럼 보입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달려가는 삶이 정작 자신에게서는 멀어지고, 너무 멀리 삶의 경로를 이탈하고, 너무 얕게 사랑에서 겉돌며, 너무 빨리 영혼을 지나치는것입니다. (박노해,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온 나는”)

예수는 그런 발걸음에 제동을 겁니다. 대신, 인간다움을 향해 나아가라고, 자기 영혼을 지키라고 말합니다. 어두운 시기를 지나는 불운을 겪더라도, 자기 안에 선한 불꽃을 일깨우면서 나아가라고, 사랑과 평화의 노래를 멈추지 말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진실은 곧장 힘을 발휘하기보다는 익어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삶이 진지할수록 많은 도전과 비참한 패배에 직면하게 됩니다. 삶에는 상처가 있기 마련이고, 무르익지 않은 우리 영혼은 절뚝거리며 길을 걷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향해 생생한 길을 찾아가는 데에는 믿음의 힘만이 아니라 사랑의 상처도 필요합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상처마저도 없기 때문입니다. 상처 속에서도 빛을 찾는 발걸음에 하늘의 은총이 함께 할 것입니다.

우리가 지나온 여정에, 시내산과 시온산의 기억이 있다면, 오늘 우리는 그 너머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시내산의 율법을 경험했으면, 더 나아가 시온산의 은혜를 배우고, 시온산의 은총을 누렸으면 또 다른 고갯길을 오르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사랑의 상처를 안고 믿음의 고갯길을 오르는 우리 모두의 삶에 주님의 인도하심이 있기를 빕니다.

침묵으로 기도합시다.

 

[파송사]

하나님은 준비된 자를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부름받은 사람을 당신이 직접 준비시킵니다. 사랑의 상처를 안고 있으면 기뻐하며 힘을 내십시오. 그것이 은총의 세계를 살아가는 믿음의 길입니다. 시내산의 율법을 넘어, 시온산의 은혜를 맛보고, 시온산의 은총을 누렸으면 또 새롭게 맞는 역사의 고갯길을 힘차게 올라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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