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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신실한 마음 ㅣ 김지목 ㅣ 2023-08-20

by 김지목 posted Aug 22, 2023 Views 79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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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3-08-20

 

하늘뜻펴기 20230820 성령강림후12

신실한 마음"

45:1-15  67  11:1-2a,29-32  15:10-28

 

요셉은 형들의 시기를 받아서 이집트의 상인에게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아버지 야곱을 속여서, 야곱은 가장 아끼던 아들 요셉이 죽은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집트에서 최고 통치권자 바로의 총리가 되어 국사를 도맡을 정도로 성공하게 됩니다. 요셉의 고향 가나안과 이집트에 극심한 가뭄이 찾아왔습니다. 요셉은 가뭄을 대비해서 식량을 비축했지만 가나안 땅의 야곱은 부족의 먹거리를 조달하기 위해 아들들을 이집트로 보냅니다. 그리고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만나게 됩니다. 처음에 요셉의 형들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성공한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요셉은 이내 알아차리고는 북받치는 감정을 못이기고 울면서 형들에게 말합니다. “제가 요셉입니다. 형들이 이집트로 팔아 넘긴 그 아우입니다.” 이 말에 요셉의 형들이 받았을 충격은 상상이 됩니다. 동생의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에서 반가움도 있었을 것이고, 동생을 팔아넘겼던 죄책감에동생을 마주한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도 컸을 것입니다. 요셉이 한참을 울다가 또 이렇게 말합니다. “형님들은 자책하지 마십시오. 이집트로 팔려온 것은 다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요셉의 이 말에 형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겠습니다만 그래도 죄책감을 다 저버리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자기를 팔아넘긴 자들을, 아무리 형제라도 쉽사리 용서가 되기는 만무한 까닭입니다. 그러나 이제 요셉은 열명의 형들과 한명의 아우 베냐민을 한사람씩 부등껴 안고 또 한참을 울었습니다. 그제서야 형들은 안심하면서 요셉과 해후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요셉의 설화에는 주목할 만한 여러 소재들이 있습니다. 노예였다가 총리가 된 요셉의 성공신화, 죽은 줄로만 알았던 형제와의 극적인 만남, 형제를 팔아넘긴 범죄에 대한 보복의 긴장감 등의 소재들이 잘 엮어져 이야기로 전해진 설화입니다. 저는 오늘 여기에서, 한참동안이나, 그것도 세 차례 울었던 요셉의 울음에 주목하게 됩니다. 설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서 스토리를 재생해보면 요셉의 울음소리가 시종 끊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요셉의 긴 울음의 결과로 요셉의 형들이 그제야 근심을 풀고 요셉과 말을 주고받았다고, 오늘의 설화 장면은 마무리되는 것을 보면서, 요셉의 울음, 바로의 궁에까지 미쳤다는 그 울음에 호기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요셉이 울었던 그 긴 시간동안 요셉의 심경은 어떠했을까요? 그의 울음에는 감정의 격한 북받침이 있었을 것입니다. 어린 나이에 가족과 생이별을 했던 요셉이 자수성가 하고서, 가족을 그리워했던 감정이 한 번에 터져 나왔을 것입니다. 이겨내야만 했던 고난의 시간들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우리 감정이 소화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은 한정적입니다. 예술의 작품이나 행위에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깊이와 크기를 아늑히 초월하는 감정을 느꼈을 때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처럼, 압축된 시간이 순간 폭발할 때 우리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합니다. 요셉이 그토록 울었던 이유에도 비슷한 작용이 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의 긴 울음은 이것으로 다 설명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리움이 북받친 그런 울음만으로 형들의 마음을 안도시킬 수 있었을까요? 내가 죽이려고 했던 동생이고 실제로는 팔아넘긴 동생이었습니다. 아버지 야곱에게는 요셉을 실제로 죽여버린 형들이 안도하기에는, 그리움에 북받친 울음만으로는 많이 부족하게 느껴집니다.

저는 요셉의 긴 울음 속에는 적어도 두 가지 이상의 감정이 부딪히고 투쟁하는 과정이 있지 않았을까 상상했습니다. 일국의 총리가 되기까지, 숱한 고난의 시간들이 남겨놓았을 법한 복수심이 그의 감정에 전혀 없었을까요? 그러나 가족을 용서하고 싶은 마음도 있어서, 요셉의 긴 울음의 심경에는 적어도 복수냐, 용서냐 하는 갈등이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복수에 불타오른 눈물, 또 복수심을 승화시킨 눈물이 번갈아 흘러내리면서 요셉의 울음은 그토록 길지 않았을까요?

긴 울음 끝에 요셉은 힘들었던 자신의 과거를 스스로 치유하고 형제를 용서하는 결단을 내립니다. 그 증거가 바로 그의 고백으로 나타납니다. “형님들이 나를 이곳으로 팔아 넘기긴 했습니다만, 그러나 실제로는 하나님이 나를 이곳으로 보낸 것입니다.” 하는 고백으로, 요셉은 형들을 용서합니다. 그의 고백에 그제서야 형들은 안심하고 요셉과 말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화해를 이룬 것입니다.

신앙인의 고백은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고백은 항시 현실을 초월합니다. 요셉이 현실을 따랐다면 복수를 단행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을 용서와 화해로 이끈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한 그의 고백이었습니다. 고백은 인간의 논리가 아닌 하나님의 논리로 발길을 내딛는 결단입니다. 약육강식의 탐욕의 질서를 거슬러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계로, 나의 길을 천도하는돌이킴'이 동반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회개라고 말합니다. 혈육을 죽인 패륜에 대한 응징, 몇푼의 돈에 양심을 팔아버린 형제를 벌하는 심판자로 자신의 존재성을 드높일 수 있었지만, 요셉은 그것을 내려놓고 형제들과 더불어 공존할 수 있는 용서와 화해를 선택했습니다. 이것이 고백의 힘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건국이념을 설명하는 이 족장설화의 영향력은, 비록 다양한 부족으로 구성된 이스라엘 공동체가 그동안 철천지 원수지간이었다 하더라도, 요셉의 고백을 계승하여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자는 교훈이 되었을 것입니다. 주목하고 싶은 것은고백"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하는 고백은 현실을 뭉개고 좋은 것이 좋은 게 아니냐 하며 현실과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탐욕에 지배되는 인간적 질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질서로, 우리 공동체를 이끄는 힘으로써 신앙인의 고백은 소중합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그리스도교의 교리적 기본 고백문에서도, 그 안에 담긴 신앙의 역동성이 충만해야 할 것입니다. “너희가 죽인 예수가 3일만에 부활하셨다"는 초대교회의 혁명적인 고백을 우리도 함께 신앙으로 고백합니다.

향린공동체, 이같은 신앙의 고백으로 하나님나라가 추동되기를 기도합니다. 교회는 하나님나라를 향한 신앙의 고백으로, 생동하고 운영되는 곳이어야 합니다. 하나님나라, 신앙에 대한 해석이 자의적이지는 않은지 항시 돌이켜 되물으면서 공동체의 고백에 기여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명석한 지식? 경험의 지혜? 질서와 원칙? 이러한 소중한 것들은신앙의 고백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겨져야 할 것들입니다. 고백의 힘으로 우리 공동체 안에서 용서와 화해가 경험되기를 기도합니다.

사도 바울은하나님은 신실한 분이심"을 고백했습니다.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하심(긍휼), 베풀어주시는선물부르심이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고백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선교를 훼방하고 자신을 그토록 괴롭히고 있지만, 구원을 완성하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결코 파기되지 않는다고, 로마교회에 전언합니다. 그리스도교 전파로 이방인의 해방을 위해 선교하는 사도 바울을 감옥에 갇히게 한 유대인들을, 로마에 있는 이방그리스도인들은 그 유대그리스도인들을 저주하고 싶지만, 사도 바울은 만류합니다. 저주하고 반목하려는 그 길에서돌이키"라고 권면합니다. 유대인들의 그런 죄 때문에 당신들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입게 될 것이라고,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당신들이 저주하고 반목하는 길에서 돌이켜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자비를 받게 되면, 그 모습을 보는 유대인들이 또 회개하여 돌이켜 그들도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받아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러한 대담한 논리는 그의 고백,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라는 고백으로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 그의 고백도 요셉의 경우와 같이 용서와 화해를 향합니다. 밉고 원망스러운 타인을 자기자신으로 용납하라는 그의 고백은, 우리가 계승해야 하는 신앙의 유산입니다. 그 고백은 실로 초현실적입니다. 요셉처럼 기나긴 울음, 세 차례 연거푼 울음을 거치지 않고서는 소화하기 힘든 고백입니다. 힘들지만 함께 해내자고 우리가 교회로 모인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의 질서를 하나님나라의 질서로 전환시킬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의 가르침대로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굳게 믿을 때 가능할 것입니다. 용서와 화해는 하나님께서 신실하시다는 믿음 안에서 가능한 초현실 사건입니다. 피스토스(pistos),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 것은, 하나님나라를 이루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은 초현실이 아니라 비현실은 아닐까 의심되기도 합니다. 암담한 현실을 직면하는 것이 우리네 삶의 일상인데, 도대체 어느 세월에 그 나라가 도래하는 것일까요? 일상에서, 우리 안에서, 이 나라 이 사회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흔들릴 때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요셉처럼 기나길게 울면서라도, 사도 바울의 고백을 따릅시다. 신앙인의 고백으로 살아가기를 포기하지 맙시다. 그 길이 용서와 화해이기 때문입니다. 맘몬과 탐욕이 지배하도록 이 세상을 버려둘 수 없지 않겠습니까? 이를 위하여 우리의고백을 보다 깊이, 무게있게 수련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광화문에서 새로운 시작이 열린 것은 이러한 까닭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백성에게 신실함으로 대하시는 것은, 백성의 신실함을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실함, 이것이 고백입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우리에게 신실한 고백이 무엇인지 가리켜준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이례적으로 복음서의 두 대목을 읽었습니다. 하나는 보여주기식으로 거룩함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려고 정결의례를 과시하는 바리새인을 향한 예수님의 비판이고, 다른 하나는 두로와 시돈에서 가나안 여인의 간절한 믿음에 관한 장면입니다. 이와같이 두 장면을 동시에 보여주는 의도는 두 캐릭터를 대조시키기 위한 안배입니다. 신앙인의 신실함을 두고 바리새인과 가나안 여인의 대조적인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바리새인은 모세의 정결의례 율법을 매사 준수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살았습니다. 식전에 기도하는 손 위로 물 한줌을 부어서 손과 팔에 물이 흐르도록 하는 의례였습니다. 그렇게 율법을 잘 지키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거룩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는 홍보와 함께, 거룩함의 헤게모니를 획득해서 사회의 존경받는 자들이 되고 싶었고, 재판이나 율법해석의 권한의 영향력을 장악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 모습이 눈꼴사나워도 그들의 집단행동을 감당하기 어려워 차라리 흐르는 물에 눈을 씻고 마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예수님은 이들을 정면으로 비판합니다. 율법의 정결의례는 전염병을 예방하면서 사회 안정화를 도모하는 방편으로 유의미 했습니다. 민중공동체를 건강하게 지속하려는 율법의 법정신을 파괴하면서 바리새인은 율법을 권력쟁취를 위한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법해석과 공권력으로 제 잇속만 챙기고 있는 윤석열의 검찰공화국이 여기에도 있습니다. 정면으로 비판하시던 예수님의 모습도 우리가 보여주어야 합니다. 자기자신으로 수렴시키는 권력욕, 길잡이 노릇을 하면서 세상을 불법과 죄악으로 물들이는 바리새인의 모습은신실한 고백"의 반대급부를 지시하고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가나안 여인에 투영된 신앙인의 모습은 "신실한 고백의 바른 자세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의 초점이예수님이 왜 저렇게 매정하셨을까?”에 매몰되면 본문이 주는 의미를 놓치고 맙니다. 주인공은 가나안 여인이어야 합니다. 가나안 여인의 신앙적 자세를 드러내기 위해 예수님은 스토리 촉매제, 또는 조연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딸이 낫기를 바라는 간절함을 두고서 자기자신을 완전히 내려놓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셉이 형제들 앞에서 그토록 울면서 결국 고백으로 승화시키는 데에 이르기까지, 이 가나안 여인과 같은 간절함, 자기비움의 과정을 겪어야만 했을 것입니다. 이방선교라는 이유로 모략으로 멸시를 감당해왔던 사도 바울이 그의 고백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역시 가나안 여인과 같은 자기비움을 체화했을 것입니다.

하나님나라를 향한신실한 고백이 우리 안에서 샘솟게 하기 위해서는 가나안 여인의 고백을 깊이 묵상하고 그 심정에 동화되는 훈련이 필요할 것입니다.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여인과 같은신실한 고백을 향한 예수님의 탄성입니다. 향린, 신앙공동체 안에서 예수님의 그같은 탄성이 들려오기를 기대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신실하듯이, 하나님을 향하여 신실한 마음을 드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요셉의 길었던 울음의 과정, 거기에서 우러나온 사도 바울과 같은 고백으로 우리의 신실한 마음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고백의 신실함이 오늘 이어질 <새교우 가입식>에서도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마음이 느껴지는, 작지만 귀한 예식이 되기를 바랍니다. 

잠시 침묵합시다.

(침묵)

…......

 

(파송사)

편안히 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고백은 신앙인의 힘입니다.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추동시킬 우리의 힘입니다.

신앙의 고백은 기나긴 울음의 과정에서 깊어지고 또 새로워집니다.

두로와 시돈에서의 가나안 여인과 같이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마음을 가다듬고

우리 공동체의 고백이 깊어지고 또 새로워지기를,

언제나 기도합시다.

성령께서 우리의 기도를 운반하시고 소통시켜 주실 것을 믿습니다.

신실한 믿음으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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