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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브니엘, 하나님의 얼굴 ㅣ 김지목 ㅣ 2023-08-06

by 김지목 posted Aug 06, 2023 Views 82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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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3-08-06

 

하늘뜻펴기 20230806 성령강림후10

 

브니엘, 하나님의 얼굴"

32:22-31  145:8-9,14-21  9:1-5  14:13-21

 

 

1성서의 이스라엘의 실제 역사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집트를 탈출하던 기원전 14세기경으로, 이스라엘의 민족적 시초를 설정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앗시리아와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고 포로로 잡혀갔던 기원전 6세기경에, 탈바벨론의 희망을 공유하기 위해 출애굽기가 저술되었다는 연구결과는 우리에게 다른 가능성을 제시해줍니다. 이스라엘이 민족적 집단의식을 확립하고서 이집트를 탈출했다는 것은 무리한 생각입니다. 그때 이미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적 형태를 띠고 당당히 독립국가로서 이집트를 탈출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말입니다. 출애굽의 시기에는히브리'라고 불렸던 하층민 떠돌이 집단들이 여러 방면에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왔다고 보는 것이 논리적입니다. 가나안에 유입된 후 가나안 본토민들과 수세기동안 부족들을 이루어 섞여살면서 점점 부족연합 단계를 이루었다가 제정일치의 사회, 그리고 왕조시대까지로 사회적 진화를 이루었을 것입니다. 떠돌이 히브리 집단들이 가나안 땅에 유입되어 부족 간에 대립 또는 공생하면서 부족연합을 성취한 때가 사사기의 시대(B.C. 12세기), 사무엘이 활동하던 시대(B.C. 11세기)가 제정일치의 사회, 그리고 사울로부터 다윗,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왕조시대(B.C. 10세기)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실제 역사를 서술하기 전에 신화적 설화를 기술한 것이 창세기입니다. 천지창조, 아담과 하와, 노아와 홍수 등의 내용이 담겨있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으로 이어지는 족장설화가 창세기 곧 이스라엘의 원역사입니다. 창세기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이 마치 대를 잇는 한 집안의 선조와 후손인 것처럼 엮었습니다. 그렇지만 학자들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은 가나안 땅으로 유입해 들어온 각기 다른히브리' 집단들을 지칭하는 부족들의 상징이며, 한 집안으로 엮인 것은 서로 다른 부족들이 서로 어우러져서 이스라엘 공동체가 형성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설화적 은유(메타포)라고 합니다. 족장설화는 이스라엘의 신화로서 이스라엘 공동체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 민족적 정체성이 무엇인지, 이스라엘이 어디에서 왔고 또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이스라엘의 원역사입니다. 족장설화는 이스라엘이 야훼 공동체로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교훈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다른 부족의 신들과 차별적으로 야훼는 자비와 긍휼의 신이면서 동시에 정의와 평화의 하나님이기에, 선택받은 민족으로서 자비와 긍휼, 정의와 평화의 신앙을 계승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올해 성령강림절기는 창세기 족장설화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는 장면, 이삭이 아내 리브가를 맞아들이는 장면이 있었고, 그리고 오늘은 야곱이 형 에서와 만나기 전 얍복강가에서 어떤 이와 씨름하는 장면입니다. 이 모든 장면들은 매우 극적입니다. 유아인신제사를 하나님께서는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아브라함의 이야기, 하나님은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주신다는 이삭의 이야기는, 당대 히브리 공동체 안에서 많이 회자되고 즐겨듣던, 유명한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오늘 야곱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또한 히브리 공동체의 여러 세대에 걸쳐 전승되고 안정성 있게 편집된 것입니다. 그만큼 야훼사상의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는 오늘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이제 내일이면 형 에서를 만나야만 하는 동생 야곱의 두려움에 휩싸인 오늘입니다. 동생이 형을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 사연이 있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를 속이고 부족승계의 대표권이라 할 수 있는 장자축복권을 가로채고 도망나왔던 전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생의 속임수로 장자의 권리를 빼앗긴 형 에서가 벼르고 있을 분노를 생각하면서, 동생 야곱은 전날밤 홀로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형 에서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릴 수 있을까 하여 저녁에 재산과 가족을 앞세워 먼저 보내고, 밤이 되었다는 이유로 자기는 다음날 건너갈 요량이었습니다. 물질공세로 에서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피붙이라고 할 수 있는 가족을 보게 함으로써 인정을 끌어내려는 용의주도한 계획이었습니다.

 

홀로 남겨졌을 때 문득어떤 이'가 나타나서 야곱과 씨름을 하게 됩니다. 야곱은 자신에게 씨름을 걸어온 그가 자신의 고뇌와 두려움을 해결해줄 수 있으리라 믿고 결사적으로 대응합니다. 그의 결기가 어찌나 대단했던지어떤 이'는 도저히 야곱을 이길 수 없으리라 판단하고 날이 새려고 할 즈음에 엉덩이뼈를 내리쳐서 씨름을 끝내려 했습니다. 어떤 이'는 날이 새면 돌아가야 했는가 봅니다. 이것을 또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야곱은 동터오는 해를 피해 돌아가려는 그를 붙잡고축복해주시 않으면 놓지 않겠다"고 떼를 씁니다. 그러자 그는 야곱의 이름을 묻고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지어주면서 야곱을 축복해줍니다. 얻고자 한 축복을 얻은 야곱은 그의 이름을 알고자 했지만 그 이름만큼은 알아내지 못하고 그를 떠나보냅니다. 축복을 받은 효과인지는 몰라도 두려움에서 벗어난 야곱은 그가 하나님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도 죽지 않았음을 감탄하며 그곳을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의브니엘이라고 이름지으면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했습니다. 오늘 본분은 여기까지입니다만 그 뒷이야기는 잘 아실 것입니다. 에서는 용서를 구하는 동생 야곱을 얼싸안으면서 용서해주고 한 가족으로 맞아들입니다.

 

밤에 강가에서 신이 인간을 습격했다는 레퍼토리는 야훼신앙에서 찾아볼 수 없는, 다분히 이교도적인 것입니다. 야훼 공동체는 고대 가나안에 떠돌던 이런 이야기 소재를 그들의 신앙으로 소화하여 진일보한 신학사상으로 발전시킨 결과물이 바로 오늘의브니엘 설화'입니다. 신화는 역사적 사실이 아닐지라도 어떤 근거를 단초로 삼아서 교훈과 의미를 전승하는 문학입니다.

 

오늘브니엘 설화에서 살피고자 하는 의미는이름에 있습니다. 고대인의 생각에 이름이란 것은 존재의 본질을 담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곧 그의 본질이었던 것입니다. 이름을 밝히는 것은 그의 전 존재를 드러내는 것과 같았습니다. 야곱과 씨름했던어떤 이'는 야곱을 축복하면서 그의 이름을 물었습니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은 대답합니다. “속이는 자입니다.” 야곱이라는 말의 뜻은발뒷굼치'입니다. 뒷굼치를 잡아 속여 넘어뜨린다는, 야곱의 이름이 곧 그의 본질이었습니다.

 

야곱은 그 이름의 본질대로 속임수의 연속인 삶을 살았습니다. 형 에서를 속였고 아버지 이삭을 속였습니다. 외삼촌 라반에게 속임수로 당해보기도 했고, 재산을 증식하는 일에도 속임수는 유용했습니다. 그의 주변에는 속임수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두번째 아내 라헬은 속임수로 라반의 수호신상을 훔쳤습니다. 자기 아내가 라반의 수호신상을 훔친 줄도 모르고 라반 앞에서 맹세까지 했던 야곱도 라헬의 속임수에 당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말년에 야곱은 아들들의 속임수에 당해 이집트로 팔려간 요셉이 죽은 줄로만 알고 날마다 슬픔을 안고 살았습니다. 야곱은 열심히 살았지만 그의 삶 안팎에는 속임수가 가득했습니다.

 

야곱과의 씨름을 당해내지 못한 그가 야곱의 이름을 물은 것은 야곱의 본질에 관여함으써 축복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야곱에게 새로운 이름을 수여합니다. 이스라엘, 직역하면하나님이여, 통치하소서"라는 뜻인데 오늘 본문에서는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으로 변형이 되었습니다. 야곱의 본질이 바뀌었습니다. ‘기만하고 속이는 자에서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가 되었습니다. 이같은 본질의 혁명, 이것이 오늘브니엘의 설화'에 담긴 중요한 의미입니다. 신앙은 우리의 본질을 하나님의 본질로 바꾸는 혁명입니다. 우리의 세상을 하나님나라의 본질로 혁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의 위로와 평화를 위해 신앙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고뇌를 회피하는 신앙은 진정한 신앙일 수 없습니다. 진정한 위로와 평화는 고뇌를 극복한 데서 오는 것이기에, 오히려 신앙은 우리의 고뇌를 가열시키는 기제로 작동합니다. 고뇌를 극복하게 함으로써 우리의 본질을 혁명하며 참된 위로와 평화를 안겨주는 것이 참 신앙입니다. 우리의 고뇌를 가열시킨다는 점에서 어쩌면 신앙은하나님과 겨루기"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의브니엘 설화'는 야곱과 같이 고뇌에 충실한 신앙인에게 하나님께서는 혁명의 축복을 내려주신다는 교훈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교 고난의 상징인 십자가, 십자가의 능력은 우리의 본질을 하나님의 본질로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우리 사회가 하나님나라의 본질로 혁명하는 길에, 우리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를 두고 하나님과 겨루는 우리 향린 공동체이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는 길은, 십자가의 능력으로 우리의 본질을 하나님의 본질로 혁명하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야곱이 하나님의 이름을 묻는 대목에 집중해 보겠습니다. 야곱은 이미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음으로써 축복을 받고자 한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름을 아는 것은 이름의 소유자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기에, 야곱은 대범하게도 하나님의 이름을 묻습니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시오.” 하나님의 이름을 알면 하나님의 축복을 완전하게 차지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대에 인간과 신의 관계는, 인간이 신을 찾아 이름을 물으면 답해주고, 그것이 계약이 되어, 신은 인간이 자기 이름을 부르며 청원하는 것은 들어주어야 했다고 합니다. 이같은 고대 신관에 입각해서 야곱이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지만, 하나님은어찌하여 나의 이름을 묻느냐?”고 반문하시면서 그의 원하는 대답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야곱을 향한 축복은 지속하였습니다.

 

브니엘 설화"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인간에게 말해주지 않음으로써 다른 종교들과 차별적인 야훼종교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에게 종속되지 않는, 야훼의 신적 주권을 고수했기 때문입니다. 즉 야훼는 인간이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신이 아니라는 선언이었습니다. 신의 이름을 걸고서 인간의 욕망을 채우는 종교 풍토에 야훼종교가 저항을 선포한 것입니다. 야훼는 인간에게 종속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야곱을 축복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독특하면서도 자유로운 신이었습니다.

 

야훼 하나님은현재, 인간의, 물질적 풍요를 제공하는 신이 아닙니다. 시간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은 현재를 장악하고 시간을 묶어두는 신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미래를 이끌어 오시는 분입니다. 하나님나라를 우리의 세계로 오게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미래, 하나님의, 완전한 뜻을 실현"하시는 분입니다. 주술적으로 야곱의 두려움을 일시적으로 망각하게 만드시는 분이 아니라, 미래로부터 도래하는 하나님나라의 희망으로 오늘의 두려움을/고뇌를 극복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존중해야 할 그분의 자유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이름을 파악하여 그분의 축복을 소유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발뒷굼치야곱의 술수는 하나님께 통하지 않았습니다. 야곱이, 축복의 권한은 여전히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깨닫고서 그곳의 이름을브니엘"이라고 지었습니다. 이는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인데, 야곱이 하나님의 얼굴을 뵙고도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음에 착안한 지명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되면 죽게 된다는 당시의 통속적인 사고방식도 그렇지 않다고 야훼신앙으로 새롭게 설정했습니다.

 

오늘브니엘 설화", 당대 만연한 전형적인 종교문화를 거절하고 전혀 다른 새로운 야훼종교가 출현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등바등 생존하기 위해서 속임수의 삶을 살았던 야곱의 두려움을 극복하게 한 야훼종교가 시대의 새로운 희망임을 역설해주고 있는 설화입니다. 야훼종교의 새로운 희망은, 첫째로 야곱이 새로운 이름을 수여받은 것과 같이 인간의 본질이 하나님의 본질로 혁명하는 것, 둘째로 하나님의 이름을 감춰둠으로써 하나님의 신적 자유와 주권을 존중하는 것으로 보장됩니다.

 

오늘 로마서의 사도 바울은, 그가 이방선교의 사도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저버리지 않았음을 강력하게 피력합니다.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동족과 겨레를 위하여 그 어떤 일도 불사하겠다는 바울의 간절함에서 자신의 본질을 혁명하려는 의지가 느껴집니다. 나 자신을 하나님의 본질로 변화시키는 신앙 혁명은숱한 슬픔과 마음의 고통”(9:2)을 감내해온 바울의 고뇌와 간절함, 곧 십자가가 필요합니다.

 

마태복음서의 오병이어 이야기는, 헤롯에게 세례 요한이 참수당하여 상심한 수많은 무리들에게 예수께서 위로하시고, 사랑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희망을 안겨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과 무리들이 함께 거한외딴 곳"은 헤롯의 지배질서가 통하지 않는 곳, 하나님의 사랑이 통용되는 빈들입니다. 예수님은 무리(오클로스)들을 불쌍히 여기시고(스틀랑크니조마이) 빈들로 초대하여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치 목자 잃은 양들과 같이 세례 요한을 잃은 무리들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품어주셨습니다. 이것이 오병이어 사건의 동기입니다.

 

식사 때가 되어 제자들은 무리를 각자 흩어보내자고 하였지만, 예수님은 빵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를 두고 하늘을 향해 축사하셨습니다. 오병이어 먹을 것이 많아지도록 빵과 물고기를 향해 마술적으로 축사하신 것이 아닙니다. 식사 때 하늘을 향해 축복기도를 드리신 것은 유대인 식사 풍습에 따라 가장의 역할로 행하신 것입니다. 곧 세례 요한을 잃은 무리들의 가장이 되셔서 그들을 먹이신, 그 사랑을 증언하려는 것이 오병이어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축사하신 오병이어를 제자들에게 떼어주시면서 무리에게 나누어주게 하십니다. 떼어서(클라사스) 주는 것은 자신의 것을부순다는 의미입니다. 사랑은 자신의 것을 부수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을 부수어 인류에게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자신을부수어' 무리에게 사랑을 나누어주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 또한오병이어를 떼어서”/”자신을 부수어서사랑을 나누었을 때 무리가 배불리 먹었습니다. 세례 요한을 잃어 상심한 무리들이 다시 생명을 소생하게 된 것입니다.

 

오병이어 이야기는 초현실적 마술행위의 기록이 아닙니다. 희망을 잃은 오클로스 민중을 향하여 하나님의 마음으로 자신을 떼어서/부수어서 사랑을 나눌 때 상심한 마음이 치유되는 것을 가르치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주목할 만한 부분은 예수님의 신적 자유와 주권입니다. 무리를 불쌍히 여겨주신 것, 앓는 이들을 고쳐주신 것, 제자들과는 다른 결정을 내리신 것, 하늘을 우러러 감사기도를 드리신 것, “오병이어를 떼어서”/”자신을 부수어서사랑을 전하신 것 등 자유롭게 하나님의 주권을 대행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봅니다.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보았다던하나님의 얼굴"은 오병이어의 예수님의 모습이 아니었을까요? 무리(오클로스)를 위로하시며 희망을 안겨주신 예수님, 그같은 하나님의 얼굴을 확인했던 야곱이었기에, 용기를 가지고 형 에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지 않았을까요?

 

오병이어, 한 사람의 한끼 식사입니다. 그것을떼어서" 나누는 사랑의 실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나의 한끼를부수어" 사랑을 실천하라고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자유를 우리는 존중해야 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상심한 오클로스 민중의 생명이 소생되는 기적이, 광화문에서 우리에게 경험되기를 기도합니다.

 

잠시 침묵합시다.

 

 

(침묵)

…......

 

 

(파송사)

 

편안히 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성령과 함께 살아가면 우리에게 새 이름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존중하십시오.

성령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시켜 주십니다.

광화문 이곳에 우리 신앙의 혁명이 솟구치도록 성령께서 함께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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