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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고통으로/부터의 신학 ㅣ 정경일 ㅣ 2023-07-23

by 김지목 posted Aug 01, 2023 Views 95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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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3-07-23

향린교회 2023.7.23.

 

고통으로/부터의 신학

 

정경일 (심도학사)

 

지난해엔 명동에서, 올해는 여기 광화문에서 예배를 통해 향린 공동체를 뵙습니다. 교회의 장소가 상징하는 게 있는 것 같습니다. 19876.10 민주항쟁의 중심지는 명동이었고, 그곳에 향린이 있었습니다. 21세기 민중사건의 중심지는 광화문입니다. 여기서 촛불시위,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투쟁, 촛불혁명이 있었습니다. 향린이 명동에서 광화문으로 옮겨온 것은, 민중사건의 현장에 있고자 하는 향린의 집단지성·영성이 작용한 결과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곳이 향린이 고통받는 이웃과 함께 하느님 나라 운동을 계속해 가는 공간이 되기를 기도하며 응원하겠습니다.

 

초록나무 임보라 목사님의 자리

 

김희헌 목사님께서 제게 향린에서 하늘뜻펴기를 해달라고 부탁하시면서, 제 삶의 이야기를 하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신학자입니다. 그래서, 신학자로서의 소명과, 제 신학의 방법에 대해 말씀드려야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고통으로/부터의 신학을 제목으로 정하고 이야기를 준비했는데, 향린의 목사님 한 분이 마음에 떠올랐습니다. 고 임보라 목사님입니다. 왜냐면 오늘 제가 말씀드리려는 고통으로/부터의 신학에 대해  목사님과 몇 번 대화를 나눴기 때문입니다. 한 번은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에서 같은 제목으로 해방신학에 대해서 강의할 때였습니다. 임보라 목사님께서 오셔서 제 강의를 들으셨는데, 토론 중에 제가, 고통으로/부터의 신학에 대해선 목사님이 말씀하시고, 제가 들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말씀드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목사님과 역할을 바꿔 대화한 적도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청년들의 현장+신학 캠프에선 임보라 목사님이 목회·현장에서 신학 바라보기라는 주제로 발표하셨고, 저는 토론자로 참여해 대화를 나눴습니다. 제 토론 제목은 현장으로/부터의 신학 : 돌아보고, 찾아보고, 머무는이었습니다.

 

목사님과의 인연은 계속되어, 돌아가시기 전까지 몇 년 동안 차별과 혐오 없는 평등세상을 바라는 그리스도인 네트워크활동을 함께했습니다. 지난 2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아시아 젠더 회의가 있었습니다. 아시아의 성소수자, 앨라이 활동가와 신학자가 모이는 자리였습니다. 원래 임보라 목사님도 함께 참가하기로 한 회의였는데, 필리핀으로 떠나기 얼마 전에 목사님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너무 비통하고 황망해서, 참여를 포기할까도 생각했는데, 그럴수록 더 가서 한국 상황과 목사님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는 NCCK 관계자들의 독려를 거절할 수 없어, 무거운 몸과 마음으로 필리핀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필리핀에 가서 놀랐던 것은, 임보라 목사님을 알던 이들은 물론 모르던 분들까지 극진히 슬픔을 함께 나눴다는 사실입니다. 회의 중에 임보라 목사님 추모 예배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제가 증언하면서, “임보라 목사님은 어디에나 계셨고 어디에나 계십니다.”(She was everywhere; she is everywhere.)라고 했습니다. 추모 예배 제단을 준비하며 목사님의 생전 활동 사진을 몇 장 가져갔는데, 정말 목사님은 강정마을, 세월호, 퀴어문화축제 등, 정의·평화·생명을 일구는 현장 어디에나 계셨습니다.

 

추모예배가 끝나고 제단을 정리하려는데, 갑자기 주최 측 코디네이터 중 한 분이 임보라 목사님이 회의에 함께하실 수 있게, 회의장 한쪽에 목사님 자리를 만들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참가자가 앞으로 나와, 테이블, , 사진, , 꽃잎 등을 조금씩 나눠 들고 옮겨서, 임보라 목사님 자리를 함께 만들었습니다. 목사님 자리는 회의 끝까지 거기 있었고, 마지막 날 기념 촬영을 할 때도 목사님 사진을 들고 함께 사진까지 찍었습니다. 임보라 목사님은 그렇게 우리와 함께 계셨고, 함께 계시고, 앞으로도 우리의 기억과 행동을 통해 우리와 함께 계실 겁니다.

 

임보라 목사님이 공동대표 중 한 분으로 활동하셨차별과 혐오 없는 평등 세상을 바라는 그리스도인 네트워크에서는, 내년 임보라 목사님 1주기 즈음에 목사님의 삶과 신학을 기리는 자리를 만들려고 합니다. 그때 임보라 목사님의 향린 경험도 중요하게 이야기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고통 앞의 세 신학

 

고통으로/부터의 신학이 무엇인지 말하기 위해, 먼저 '신학'이 무엇인지부터 이야기해야겠습니다. 신학은 고리타분하거나 복잡하고 어려운 학문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하지만 신학이라는 것은 굉장히 단순합니다. 인간이 하느님(theos)에 관해 하는 말(logos)이 신학(theology)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에 관해 말하는 모든 사람이 신학자입니다.

 

신학자 존 B. 캅은 신학의 이러한 의미를 더 체계적으로 이야기해 줍니다. 그는 신학이란 중요 문제들에 대한 의도적인 그리스도교적 사고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신학이란 저처럼 전문 신학 교육을 받은 신학자나 목사만의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의 것이겠죠김재준 목사님이 믿음이란 신앙생활이 아니라 생활신앙이어야 하며, 그것을 잘 정돈하는 것이 생활신학이라고 하셨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드리는 고통으로/부터의 신학도 저 같은 직업적 신학자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의 공유물입니다.

 

고통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신학은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고통받는 자의 신학입니다.

 

도로테 죌레는 그의 책 고난에서 고통받는 당사자가 언어를 찾아가는 과정을 세 단계로 구분해 설명합니다. 첫 번째는 침묵입니다. 고통이 너무 크면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습니다. 이때 유일하게 가능한 소리는 동물의 외침 같은 신음입니다. 두 번째는 탄식입니다. 도대체 왜 내가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전능하고 전적으로 선하시다는 하느님은 왜 고통을 막아주시지 않는가, 하느님이 계시기는 한 건가, 탄식하고 항의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비로소 고통의 언어를 찾아가고, 이해하고, 행동으로 나아가는 변화입니다이러한 과정을 통해 고통받는 자의 언어, 즉 신학이 형성됩니다. 이렇게 고통받는 자가 언어를 찾아갈 때까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곁에서 함께 울고, 신음과 탄식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고통받는 자의 신학과, 그 신학을 듣는 이의 반응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욥의 이야기를 통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깊은 고통 속에서 욥이 탄식합니다.

 

누가 있어 내가 하는 말을 듣고 기억하여 주었으면. 누가 있어 내가 하는 말을 비망록에 기록하여 주었으면. 누가 있어 내가 한 말이 영원히 남도록 바위에 글을 새겨 주었으면. (욥기 19:23-24)

 

욥의 이 탄식을 들을 때마다, 신학자인 저를 향해 하는 말인 것만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사유하는 모두가 신학자니, 우리 모두에게 호소하는 말이겠죠.

 

고통받는 자의 신학에서 중요한 것은, 고통의 이유와 의미가 무엇인지 매끄럽게 설명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욥기 마지막 장을 보면, 이 비극의 결말에서도 하느님은 욥이 왜 고통받았는지 끝내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우주적 서사로 욥을 압도하며 침묵시켜버리십니다. 그런데, 욥의 친구들에게 말씀하시는 중에, 욥의 신학을 긍정해 주십니다. 하느님이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분노한 것은 너희가 나를 두고 말을 할 때 내  욥처럼 옳게 말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욥기 42:7) 신학이 하느님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라면, 욥의 말은 옳은 신학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욥이 하느님에 관해 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요? ‘항의였습니다. 욥은 고통 속에서 절규하고 억울함을 토로하며 처절하게 하느님께 항의합니다. 고통받는 자의 옳은 말, 옳은 신학은 하느님과 세상을 향한 항의입니다.

 

둘째, ‘고통에 대한 신학입니다.

 

이 신학은 타자의 고통을 대상화하여, ‘저쪽에 있는 타인의 고통과 악의 문제에 대해 안전한 이곳에서 거리를 두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고통과 악의 문제는 유신론 전통에서는 아주 오래된 문제입니다. 더 정확히는 고통과 악의 현실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나온 게 신정론’(神正論, theodicy)입니다. 신정론, theodicy의 그리스어 어원은 을 뜻하는 ‘theos’정의를 뜻하는 ‘dike’입니다. 고통과 악의 현실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변호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정론의 다른 이름은 변신론’(辯神論)입니다.

 

아마존닷컴(www.amazon.com)에서 신정론(theodicy) 또는 고통과 악의 문제(problem of suffering and evil)의 문제를 입력하면 수백 권의 책이 검색됩니다. 왜 그렇게 많은 신정론 책이 있을까요? 명확한 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1+1=2 식으로 답이 명확하다면, 책 한두 권이면 충분했을 것입니다. 쉽게 풀리지 않으니 지적 호기심을 더 자극하고, 온갖 복잡한 이론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신정론의 문제는 유일신론의 트릴레마’(trilemma)라고 합니다. 이중의 딜레마보다 한 층 더 복잡한 세 명제의 삼중 트릴레마입니다. 첫째, 신은 전능하다. 둘째, 신은 전적으로 선하다. 셋째, 악이 존재한다. 문제는 전능하고 전적으로 선하다는 신이 있는데 왜 세계에는 악이 존재하냐는 것입니다.

 

여기서 논리적으로 가능한 답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신은 전능하지만 전적으로 선하지는 않아 악을 그대로 둔다. 둘째, 신은 전적으로 선하지만 전능하지는 않아 악을 어찌할 수 없다. 셋째, 신은 없다. 신의 전능성과 전적 선함 중 하나를 포기하거나 신의 존재를 포기해야 풀리는 트릴레마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 셋 중 어느 하나도 포기할 수 없습니다. 하여, 이렇게 궁리해보고 저렇게 궁리해보면서 다양한 신정론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최종적 마침표를 찍을 수 없었기 때문에, 지금도 이렇게 수많은 신정론 책이 나오고 있는 겁니다.

 

고통과 악의 문제, 그리고 신정론을 공부하다 보면, 지적 흥미를 느끼게 됩니다. 고통과 악의 현실에 대해 탐구하는데, 이론적으로는 재밌는 거예요.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정론, 이레네우스의 신정론, 라이프니츠의 신정론, 몰트만의 신정론, 과정신학의 신정론 등등, 다양한 신정론에는 나름대로 그럴듯한 논거와 설득력이 있습니다. 근데, 누군가에게는 설득력이 있는 신정론이 누군가에게는 엄청난 폭력이 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고통과 악의 목적은 하느님이 인간을 교육하기 위함이라는 신정론은, 수백만 유태인을 학살한 홀로코스트의 현실 앞에서는 잔혹한 넌센스가 되어버립니다. 교육을 위해 수백만을 죽게 내버려 두는 존재는 전능한 살인마지 결코 전적으로 선한 하느님일 수 없으니까요. 이러니까 신정론은 계속 결론이 안 나고, 더 복잡해지고 더 다양해집니다. 이런 지적 유희가 바로 고통에 대한 신학, 즉 고통받는 자를 멀리서 바라보면서 타인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는 관조적, 이론적 신학입니다.

 

사실 진짜 문제는 신정론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유대교 랍비 아브라함 조슈아 헤셸은, 인간에게는 고통과 악의 현실에서 하느님의 정의를 변호하는 신정론이 문제지만, 하느님에게는 인간이 저지르는 무수한 죄와 악의 현실에서 인간의 정의를 변호하는 인정론(人正論, anthropodicy)이 문제일 거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신정론과 하느님의 인정론 중에 신학적으로 무엇이 더 난제일까요?

 

셋째, ‘고통으로/부터의 신학입니다.

 

고통으로/부터의 신학이란 고통받는 자에게 다가가 연대하고그 연대의 경험으로부터 돌아와 성찰하는 신학입니다여기서 순서는 연대,   실천이 먼저고, 신학, 즉 이론은 그다음입니다. 연대는 고통받는 자의 소리를 듣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민중신학자 서남동은 민중신학은 민중의 부르짖음에 대한 메아리라고 했습니다. 민중신학이 먼저 있어서 민중에게 말하며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민중의 부르짖음, 즉 죌레가 말한 침묵과 신음과 탄식에 메아리로서 응답하는 것이 민중신학이라는 것입니다이때 메아리는 일회적이지도 일방향적이지도 않습니다민중의 부르짖음이 있고, 그에 대한 메아리로서 신학이 있고이 산과 저 산이 마주쳐 울리듯이, 민중의 부르짖음과 신학의 메아리가 공명하고 증폭되면서 고통으로/부터의 신학이 형성됩니다.

 

중요한 것은 항상 실천이 먼저, 이론은 그다음이라는 것입니다. 해방신학은 실천(praxis)1차적 행위, 이론(theory)2차적 행위라고 했습니다. 해방신학자들은 이를 더 다듬어서 해석학적 순환의 세 단계를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보는 것’(seeing)으로, 사회에서 어떤 문제가 일어나고 있는지 관찰하는 사회분석입니다. 둘째는 판단하는  ’(judging)으로, 성서에 비추어, 그리스도교 전통과 이성에 비추어, 직면한 문제를 식별하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공동체적으로 식별한 원인과 해법을 들고 사회 현장으로 돌아가 행동하는 것’(acting)입니다. 이 과정 역시 일회적이거나 단선적이지 않고 순환적입니다. 보고, 판단하고, 행동하면서 변화된 현실을 다시 보고, 다시 판단하고, 다시 행동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사유가 깊어지고 넓어집니다.

 

이런 해석학적 순환은 직업적 신학자나 성직자만의 신학 방법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의 방법입니다. 실제로 남미 기초교회 공동체들은 모일 때마다, 먼저 생활나눔을 통해 농장과 공장과 마을의 사회적 문제를 분석하고, 렉시오 디비나 같은 성서 기도 및 묵상을 하면서 판단하고, 공동체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행동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계속 반복했습니다. 향린에서 일주일에 한 번 드리는 예배도 그런 해석학적 순환의 과정일 겁니다.

 

세 신학을 완전히 분리할 수는 없습니다. 고통의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이 신비에 가까운 사랑의 합일을 통해 고통의 신학을 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 합일의 경지까지 갈 자신이 없어, 고통받는 자의 곁에서 경청하고 공명하며 연대하는, 고통으로/부터의 신학을 하려고 애씁니다. 그것이 고통의 당사자가 아닌 제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신학, 하나님에 대해 옳게 말하는 신학일 것 같습니다.

 

신학의 주소

 

오늘 이렇게 신학의 가능성과 필요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직업적 신학자로서 제가 떨치지 못하고 있는 자괴감이 있습니다. 오늘 저를 포함해 한국의 신학자가 무엇을 하고 있나, 물으면서 갖게 되는 자괴감입니다.

 

한국의 신학자가 몇 명인지 통계가 따로 있지는 않지만, 2018년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그리스도교 사업장관계자가 약 10만 명이라고 합니다. 그중엔 목사, 전도사 같은 성직자도 있을 테고, 저 같은 신학자도 있을 겁니다. 대부분 전문 신학교육을 받은 이들이겠죠. 그들을 연구자로 치면, 엄청난 수의 연구 인원입니다. 한국에서 가장 큰 연구소가 뭔지 모르겠지만, 아무리 크다 해도 10만 명의 연구원을 가진 연구소는 없을 겁니다. 이렇게 전문 신학교육을 받은 그리스도인이 10만 명이라는데, 왜 우리 사회가, 우리 교회가 이 모양일까요?

 

이런 자괴감과 함께 제가 갖고 있는 딜레마가 하나 있습니다. 연대와 연구의 균형입니다. 열심히 세월호 그리스도인 가족과 연대하고, 차별과 혐오 없는 세상을 위한 활동도 하지만, 모든 고통의 현장에 가지 못하는 게 너무 미안할 때가 많습니다. 직업적 운동가여도 힘들 텐데, 저는 글 쓰고 강의하는 게 직업이고 생계수단인 연구노동자니, 앉아서 보내는 절대 시간이 필요합니다. 저를 아끼는 분들은 연대도 좋지만 좀 더 연구에 집중해 학자로서 기여하면 좋겠다고 조언해 주기도 합니다. 저도 그런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고통으로/부터의 신학을 연구하기 위해서도 연대는 필수적입니다. 그리고, 분리될 수는 없겠지만, 연대와 연구 사이에서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한다면, 저는 연대를 선택할 겁니다.

 

문익환 목사님께서 옥에 계실 때 당신 어머니께 보낸 편지에 이렇게 쓰셨습니다. “예수의 주소는 어딘가요? 거기가 바로 교회가 있어야 할 자리인데, 그곳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이방인의 땅 갈릴리였습니다.” 문익환 목사님은 예수의 주소, 고통받는 자의 땅 갈릴리가 교회의 주소여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안병무 선생님은 신학의 주소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신학의 주소가 교회가 아니고 한국의 현실이 되었죠. 신학이 교회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위해서 세상을 위해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현실을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 신학의 주소지도 고통받는 이의 현실이고, 그들과 연대하는 현장입니다.

 

제가 신학자로서의 자괴감과 딜레마를 갖고 있으면서도 직업을 바꾸지 않고 신학자로서 남아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고통받는 자가 하느님에 관해 옳게 말할 수 있도록 그 곁에서 작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입니다. 고통받는 자에게도 신학이 필요합니다. 세월호 참사 그리스도인 유가족만 해도, 하느님의 뜻, 신정론, 교회의 의미, 죽음 이후의 삶, 성서해석, 기도 등, 다양한 신학적 문제들과 씨름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은 캅이 말한 중요한 문제에 대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고를 그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시도해 왔습니다.

 

제가 고통받는 자의 신학, 고통으로/부터의 신학을 쓸 수 있을지, 아직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다만, 제 신학이 고통받는 자의 부르짖음에 대한 메아리로 응답해 가면서, 고통받는 자가 신학할 때 부딪히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작은 힘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이 계속 신학자로서 살아도 좋을 이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향린이 명동에서 해온 신학, 그리고 이곳 새로운 주소지 광화문에서 해나갈 신학도 고통으로/부터의 신학입니다. 하느님에 관해 옳게 말하는 향린의 신학이 더 깊어지기를 기도하며 응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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