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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비움의 신앙 ㅣ 김지목 ㅣ 2023-07-02

by 김지목 posted Jul 04, 2023 Views 113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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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3-07-02

 

하늘뜻펴기 20230702 성령강림후5

 

비움의 신앙"

22:1-14  13:1-6  6:12-23  10:40-42

 

오늘의 창세기와 같은 본문을 접할 때면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 100세의 나이에 기적처럼 얻은 아들 이삭을 희생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기 때문입니다. 이토록 잔혹한 신인가? 다행히도 아브라함의 칼끝이 아들 이삭의 목으로 향하기 직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멈추게 하시지만, 하나님의 본심에 대한 의구심은 마음 한켠에 남게 됩니다.

그러나 이 본문이, 가나안으로 진입한 히브리 민족이 야훼신앙을 고수하기 위한 분투의 산물로 전승된 것임을 이해한다면, 이 민담설화에 담긴 깊은 뜻이 무엇일지 호감이 생깁니다. 어린이를 희생제물로 삼아서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이른바 유아인신제사는 고대 가나안에서 성행하던 제의문화였습니다. 상상하기도 싫은 잔인한 제사입니다. 이집트를 탈출하고 광야에서 야훼사상으로 체질변화를 해온 떠돌이 히브리 민족이 가나안에 들어서서 그것을 목격했을 때 받았을 충격이 어땠을지 상상해봅니다. 노예였던 자신들을 해방시키신 야훼 하나님의 사상으로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히브리들이 체득한 야훼 하나님은 생명을 자유롭게 춤추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나안에 들어선 히브리들이 모두 그렇게만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오늘의 아브라함 민담설화는 두 진영 간의 갈등의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야훼 사상에 입각해서 가나안의 유아인신제사를 배격하는 진영과 다르게, 그렇지 못한 다른 진영은, 유아인신제사가 가진 강력한 효력에 넋을 잃었을 것입니다. 살아있는 존재를 눈앞에서 죽이고 낭자하게 솟구치는 피의 퍼포먼스에 열광하며 흥분하는 가나안 인들의 모습에서 신을 향한 대단한 집중력을 목격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지배권력이 장악한 대중의 강력한 충성이었습니다. 일부 히브리들이 가나안의 그런 종교적 효과를 동경하면서 야훼사상은 배반당했고 그들에게서 야훼신앙을 고수하기 위하여 오늘의 민담설화가 전승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해 주신다"는 의미로 우리는여호와 이레'라는 단어를 종종 말합니다. 마지막 절에 강조되어 있는 이 단어의 의미는, 이삭 대신 수풀 속에 숫양을 제물로 준비해주신 하나님께서, 유아가 아닌 짐승의 번제물을 준비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인신제사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잔인하면서도 강력한 효과를 가진 유아인신제사를 대신할 대안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순종입니다. 지배권력에 굴복하는 광기가 아니라 야훼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 순종이 무엇보다 중요한 대안임을, 아브라함의 민담을 통해 전해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고향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나왔습니다. 과거를 떠났습니다. 축적된 문명의 혜택과 이룩했던 자신의 공적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가리키시는 낯선 땅으로 나아갔습니다. 떠돌이의 삶을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일평생 남긴 것이라고는 아내 사라와 함께 묻힌 묘지 몇평뿐이었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아브라함은 과거도 버렸고 이제 후손인 미래도 가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아브라함은 순종합니다. 그 순종은 완전한 자기비움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온 히브리는 아브라함의 순종, 곧 철저한 자기비움의 신앙으로 스스로를 채근했습니다. 그것이 잔혹하기 그지없었던 가나안 바알숭배에 현혹되지 않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칼날이 이삭을 향했던 절명의 시간에 하나님의 천사가 아브라함을 다급히 부르면서 말립니다. “네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줄을 이제 알았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시험은 종료됩니다. 당시신을 향한 두려움은 곧종교'라는 말과 상통합니다. 즉 신을 두려워하는 사람은곧 종교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써 아브라함과 히브리인은 가나안 사람들과 전혀 다른 신관을 수립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백성에게 주는 일과 빼앗는 일이 자유로운 분이심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을 향하여이게 무슨 일입니까?” 하고 따질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받들면 복을 주는 가나안의 바알신과 다릅니다. 숭배했으나 복을 주지 않으면 바알신상을 부수는 가나안 사람들과 다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자신을 비우는 것을 신앙의 푯대로 삼았습니다. 또 그 비움 속에 은총이 채워지는여호와 이레'의 신앙을 지켰습니다. 이것이 우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신앙입니다. 

아브라함이 보여주는 자기비움의 신앙은 상당히 깊은 성찰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광기에 사로잡혀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현존을 분명히 인정하며 하나님의 뜻하시는 길로 자기 인생을 만들어가는 신앙입니다. 자기의 길에 신통력을 끌어오는 바알신앙이 아닙니다. 자신을 비워낼 수 있는 순종의 용기를 가진 신앙인만이여호와 이레'의 은총을 담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얼만큼 비울 수 있습니까? 오늘의 창세기 민담이 우리에게 던지는 물음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로 순종하며 자신을 비웠을 때여호와 이레의 은총을 약속 받았습니다. ‘자기비움'은총으로 채워짐'이 공존하는 역설입니다. 이러한 역설의 레퍼토리는 종교적 논리의 전형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관계도 마찬가지로 역설입니다. 이러한 역설이 가능한 요인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개입입니다. 순종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개입하셨기에 자기비움이 곧여호와 이레'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순종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일으키시어 부활하셨습니다. 종교적 역설을 이해하려면 하나님의 개입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개입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종교적 역설은 한낱 우연한 것, 모순된 것, 흩날리는 미사여구에 불과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개입을 신뢰하지 않는 이들과 논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하나님의 은혜 아래에서 율법에 얽매이지 말고 자유롭게 살기"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핵심을 저버리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그들은 자유를 핑계로 제멋대로 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가르침은 분명히 율법의 굴레에서 해방하여 하나님의 은총 아래에서 자유로운 신앙인이 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인 은총으로 우리가 의롭다고 칭함을 받고, 율법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인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그들은 하나님을 망각한 채 그저 자유로운 삶만 누리려 하였습니다.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기는커녕 다시 죄의 삶으로 복귀하고 말았습니다.

사도 바울의 가르침 역시 역설적입니다. 순종으로 해방되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순종과 해방을 공존시켜 연결하였습니다. 이같은 역설에는 역시 하나님의 개입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인의 고백은 주권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인정하고 내 삶의 주권을 예수 그리스도께 의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의 고백은 세례로 이어집니다. 세례는 더 이상 세상의 권세를 따르지 않기를 결단하며 삶의 방향을 전환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세례를 받음으로써의롭다' 하는 칭함을 받습니다. 이 선언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은총으로써 이제 율법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인이 됩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거룩한 존재가 되기까지 성화의 과정을 걸어야 한다고 바울은 권면합니다. 이것은 세상의 권세에 저항할 수 있는 거룩한 성장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세례와 칭의, 그리고 성화에 이르는 수행의 도상으로 우리를 안내함으로써 매 순간 새로운 삶을 깨우치는 존재가 되도록 촉구합니다. 새로운 삶을 살아가면서 또다른 새로운 생명들이 나타나도록 봉사하는 것이 신앙인의 바른 삶이라고 가르칩니다. 결국 죄에서 해방되는 길, 세례를 받는 순종으로부터 시작한 자유와 해방의 삶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그들은 순종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결국 은총의 주체인 하나님을 망각한 채, 자유에만 천착합니다. 그리스도에 순종하는 수행을 저버리고 자유의 권리만 누리려는 것입니다. 결국 죄인이 되고 맙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불의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새롭게 다가오시며 새로운 삶으로 안내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자만하는 것입니다.

의인이 성화로 수행해가지 않으면 근본을 잃어버립니다. 그런 점에서 신앙인의 삶은 언제나 도상에 있어야 합니다. 도상에서 끊임없이 걷고 있어야 합니다. 매 순간 시간이 우리 일상을 지나고 있듯이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이것을 알아차리는 신앙인이어야 근본을 지킬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서에서 예수님은 항상 깨어 있어서 근본을 놓치지 말라고 제자들을 가르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우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어떤 사람이 예언자를 예언자로 바로 알아볼 수 있을까요? 과연 어떤 사람이, 고난당하여 아픔을 호소하는 사람에게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을까요? 자기 자신을 비우고 매순간 하나님의 개입을 기대하는 사람입니다. 그에게는여호와 이레'와 같은 하늘의 보상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성령강림의 계절을 지내면서 오늘은 성서일과에 따라 자기비움의 신앙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신앙인에게 자기비움이 필요한 궁극적인 이유는 자기의 뜻을 비우고 그곳에 하나님의 뜻을 깃들게 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문제는 자기의 뜻을 어떻게 비워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처럼 과거로부터 축적해온 소유물도 비우고 또 미래에 보장된 것까지 깨끗하게 비워낼 수 있는 용기가 좀처럼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2주 전에 우리는 이 자리에서, 교회 창립 70주년을 기념하면서 교우들이 정성을 다해 올린 연극 한 편을 감상했습니다. “꽃들에게 희망을" 어렸을 때 그림책으로 보았던 것을 연극으로 감상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극 중에 호랑애벌레가 노랑애벌레와 행복하게 살면서도 애벌레기둥 올라가는 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장면이 기억납니다. 결국 호랑애벌레는 사랑과 행복을 뒤로하고 욕망이라는 본능에 이끌려 애벌레기둥을 다시 올라가지요.

호랑애벌레와 같이 욕망을 채우려는 본능이 아니더라도, 거친 자연세계에 던져진 인간실존은 생존을 위해서 자기를 채워나가야 했습니다. 인류 역사의 큰 줄기는 채우고 축적하고 쌓는 것이었습니다. 종교는 생존과 본능에 주력하는 인류를 향해 반성적 물음을 던져서 고치를 뽑게 하고 나비의 새로운 차원을 꿈꾸게 했습니다. 그 방식이 바로 자기비움입니다.

자기를 채우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고질적인 문제는, 사도 바울도 지적했듯이, 타자의 주체화였습니다. 타자까지도 소유하려는 욕망에서 인류는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더 채우지 못한 불안함이 혐오와 배제, 소외, 반목의 문화를 잉태하였습니다. 종교는 자기비움의 신앙으로 왜곡되고 가련한 이 시대를 치유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자기비움의 수행은 성화의 과정입니다. 자신을 비워낼 수록 새로운 세계가 보일 것입니다. 비워내는 자리에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비움의 신앙으로 우리 향린공동체의 지평이 새롭게 넓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저마다 자기비움의 신앙으로 하나님의 개입하심을 체험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우리 공동체 되기를 빕니다. *

(침묵)

 

(파송사)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요,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나 자신을 비운 그 자리에 그리스도를 맞아들입시다.

우리 서로의 모습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도록

자기비움으로 그리스도를 모시어 들입시다.

우리 서로를 맞아들이면서 그리스도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입시다.

성령이시여, 우리의 가난한 마음들 사이사이에 개입하시어 새로운 지평으로 우리를 인도하소서.

…......

 

(공동축도)

 

축복의 기도를 나눕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주시는 친교가 우리 가운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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